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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32화 (32/300)

32화

도윤은 사람들의 반응에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스태프가 가져온 적외선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우고 묵묵히 촬영 준비를 했다. 전신 초상화를 살피기 위해 다가온 에이미 그리넘이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림에 손을 댄 흔적이 보여서 그러나 본데, 적외선 카메라는 괜한 호들갑이야. 아무리 똑똑해도 역시 아직은 어리다는 건가?”

영국 출신의 복원전문가. 버스에서 로지나 레빈과 함께 리키 배런스의 뒷담화를 하던 마흔한 살의 흑인 여자. 도윤은 이미 두 여자에게 지뢰표지판을 꽂아뒀다. 그는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신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 라파엘로는 아닌 것 같고, 미켈란젤로일까요, 아니면 마사초일까요?”

에이미가 흠칫 하더니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도윤에게 한 발짝 더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농담하는 거야? 눈이 삔 게 아니라면 이걸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본다는 게 말이 돼?”

“역시 그렇겠죠? 그럼 남은 건 미켈란젤로냐, 아니면 마사초냐인데…….”

“흥! 그걸로 잘 찍어보지 그래? 혹시 알아? 물감 뒤에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숨어 있을지.”

에이미는 던지듯이 말을 하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라고? 도윤은 실소를 머금었다. 조롱하는 척 말을 던지면서도 그 안에 교활한 속임수를 심어놓는군. 결국 미켈란젤로는 아니라는 얘기고. 그럼 이 그림을 마사초의 것으로 보라는 소린데…….

마사초는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였다. 미켈란젤로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성당의 제단화와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비슷하기는 한데, 그래도 마사초의 작품은 아니지.’

도윤이 그림을 보며 씩 웃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보기가 안쓰럽군. 내가 충고 하나 할까? 에이미 그리넘이 뭐라고 했든 신경 쓰지 마. 그 여자, 얌전하게 생긴 얼굴로 사람들 뒤통수치는 걸로 유명하니까.”

몸을 돌리자 아우라를 본다는 남자, 리치오 폴리니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충고는 그게 다입니까?”

“이왕 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하지. 그 그림은 위작이야.”

“이게 가짜 그림이라고요?”

“그래. 혹시 미켈란젤로나 마사초의 그림이라고 판단했다면 다시 생각해 봐. 10점이나 감점을 당하고도 또 실수하지 말고.”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줘도 되는 겁니까? 명색이 경쟁자인데?”

“이 정도 감정에서 적외선 카메라까지 꺼내드는 순간, 자네는 이미 경쟁자 자격을 잃었어. 도대체 어떻게 지명 참가자로 초대를 받았는지 모르겠군.”

폴리니는 그 말을 마치고 휭 하니 사라졌다. 재미있는 친구네?

이로써 폴리니가 단순히 거만한 허풍쟁이만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다. 어차피 적외선 카메라까지 빌렸으니 결국 초상화가 위작이라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윤의 짐작이 맞는다면 폴리니는 자신의 견해를 솔직히 밝혔다. 이유야 어쨌든 경쟁 상대에게 그럴 수 있다는 건 적어도 그가 음흉한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 덕분에 얻은 것도 있고.’

가장 큰 소득은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폴리니가 가진 능력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정말로 아우라를 볼 수 있다면, 그 아우라는 아마 벤야민이 말한 것과 거의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폴리니의 능력은 내 신안과는 성격이 다른 게 틀림없어. 저 친구는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느끼는 게 아니야. 오로지 원본이냐 모작이냐를 구분할 수 있을 뿐이지.’

도윤이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초상화를 찍고 있을 때, 또 다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늘은 그에게 참견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리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이봐, 도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저 그림은 진작이야. 그 카메라는 괜히 빌린 것 같아.”

쉬주하오였다. 폴리니와는 정반대의 견해였다.

“진작이라고? 왜 그렇게 생각해?”

“저 그림말이야. 액자를 한 번 떼어냈다가 수리해서 다시 붙였어. 그림도 꼼꼼하게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고. 가짜라서 상태가 멀쩡한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메트로폴리탄에서 가짜를 그렇게 열심히 복원했을 리가 없다는 거지?”

“그래. 내가 보기에는 붓을 놀린 솜씨나 색감의 배합도 …….”

“그만. 거기까지. 그 이상 말하면 내가 컨닝한 꼴이 되잖아. 충고 고마워.”

도윤이 상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누르자 쉬주하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바로 여기 있었군. 이 프로그램이 참 재미있게 흘러갈 것 같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 * *

한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참가자들이 심사위원과의 면접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실로 이동하자 잠시 휴식을 취한 사회자들이 다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왔다.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페이건이 카메라를 향해 손에 든 카드를 들어올렸다.

“지금 제 손에는 참가자들이 제출한 결과를 정리한 카드가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놀랍게도 여성의 세미 누드가 그려진 가운데 그림에 대해서는 모든 참가자들이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페이건이 보이지 않는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말을 멈추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실력 있는 분들이 참가하신 게 맞는 것 같군요. 정답은 그 그림이 위작이라는 겁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로트렉의 위작이지만 어떤 참가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한 분씩 모셔서 왜 그 그림을 위작이라고 판정했는지 이유를 들어볼까요?”

리키가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서 마이크 앞에 세웠다. 그들은 자신이 왜 가운데 그림을 위작으로 판정했는지를 설명하고, 예상 그림 값을 말했다.

“백 달러 정도면 살 의향이 있습니다. 가짜 그림이기는 하지만 장식용으로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으니까요. 저걸로 누굴 속일 생각만 아니라면요.”

헝가리계 미국인인 레프 오보린의 말이었고, 다른 참가자들의 대답도 그와 비슷했다. 원래 위작의 가치는 영에 수렴하지만, 아주 잘 만든 것일 경우 약간의 가격을 매기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한 명씩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심사위원들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앞에 놓인 버튼을 눌러 점수를 매겼다. 사람들마다 설명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는 했어도, 전체적으로 핵심에서 크게 어긋나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가운데 그림에 대한 판정 결과에서는 점수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왼쪽에 있는 뱅크시의 판화에 대한 감정 결과는 다소 예상 밖이었다. 열두 명 가운데 무려 다섯 명이나 화가를 알아맞히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 가운데 두 명은 뱅크시의 판화를 아예 위작이라고 감정했다. 레지나 로빈과 레프 오보린이 그 주인공이었다. 현직 화가인 레지나가 뱅크시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지목한 것은 도윤으로서도 뜻밖이었다.

‘뭐야? 화가가 뱅크시를 못 알아봤다고? 설마 다른 사람의 그림에는 관심이 없는 거야?’

감정에 실패한 다섯 명은 아예 면접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면접을 하면 왜 그 그림을 뱅크시의 것으로 감정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정작 화가를 알아맞히지 못했으니 심사위원들로서도 애초에 들을 말이 없었던 것이다.

뱅크시 그림의 시가에 대한 평가는 참가자들마다 조금씩 격차가 있었다. 도윤은 30만 달러를 매겼다. 최근에 거래된 뱅크시 그림의 최고 경매가가 13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금 낮은 가격이었다.

그는 주로 소더비의 카미유 마르텔을 상대로 자신이 가격을 책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뱅크시의 그림이 시장에 많이 풀리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폭탄을 안고 있는 소녀는 예외입니다. 가장 많이 그린 연작 그림들 가운데 하나고, 실제 거래되는 양도 적지 않지요. 그래서 20만 달러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20만이 아니고 30만 달러로 책정했죠?”

“다른 연작 그림들과는 달리 여기 있는 그림에는 폭탄 위에 십자가와 다윗의 별, 이슬람의 초승달을 그려 넣었습니다. 전쟁의 원흉이 어느 특정 집단이 아니라 중동과 서구권 모두라는 것을 명시한 거죠.”

“그게 10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뱅크시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반전사상입니다. 주제 의식을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10만 달러 정도의 가격 상승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더비에서 뱅크시의 그림을 경매할 때 방금 하신 말씀을 참조하라고 일러둬야겠군요.”

까미유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도윤의 차례가 끝나고 화가를 알아맞히지 못한 다섯 명이 유력한 탈락 후보자로 확정됐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뒤 곧바로 세 번째 그림에 대한 감정 결과가 공개되었다.

* * *

“세 번째 그림인 귀부인의 초상화에 대한 감정 결과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열두 명의 참가자 가운데 여덟 명이 이 그림을 진작이라고 판정했네요. 다만 누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세 명은 미켈란젤로를, 다른 다섯 명은 마사초를 화가로 지목했군요.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이 그림이 위작이라고 봤습니다.”

감정 결과를 발표하던 페이건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심사위원석을 쳐다봤다.

“감정 결과가 이렇게 다양하게 나오니까 저도 정답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어떤 분이 정답을 발표해주시겠습니까?”

조금 전 도윤에게 집중적으로 질문했던 까미유 마텔라가 웃으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휴우~. 제가 참가자가 아닌 게 다행이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 초상화는 위작입니다. 덕분에 이번 심사에서는 면접이 간단해졌네요. 네 분하고만 면접을 하면 되니까요.”

까미유의 발표가 나오자 참가자 대기실이 신음소리와 탄식으로 출렁였다.

“말도 안 돼! 저건 마사초의 진작이 틀림없다고. 심사위원들이 착각한 거야.”

프랑스에서 온 파비앵 말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반면에 폴리니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저건 위작이야. 누가 봐도 속을 만큼 잘 그리기는 했지만 마사초의 그림은 아니라고. 당연히 미켈란젤로와도 거리가 멀고.”

게릭 올슨은 초상화를 위작이라고 감정했다. 그러나 그는 폴리니를 향해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 싼 소리 때문에 대기실 분위기가 흉흉해질까 걱정된 것이다.

쉬주하오는 자신의 감정 결과가 틀렸다는 얘기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그럼 메트로폴리탄은 도대체 저 그림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위작을 그렇게 공들여서 복원한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영국에서 온 복원전문가, 에이미 그리넘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흥. 당연한 걸 묻네요. 메트로폴리탄이 아니라 저 그림을 만든 위조범이 일부러 복원한 흔적을 만든 거예요. 당신처럼 경험 없는 감정가들을 속이기 위해서.”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도윤을 힐끗거렸다. 자신이 교묘하게 던진 그물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대기실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녹화는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

“자, 그럼 정답을 맞힌 분들을 한 분씩 모시고 일대일 면접을 실시하겠습니다. 먼저 에이미 그리넘 씨부터 스튜디오로 입장해 주세요.”

대기실에 비치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에미이가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다른 참가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턱을 쑥 내밀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저 여자는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무대 한 가운데 서자마자 하이든 박사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에이미 그리넘 씨. 귀부인의 초상화를 위작이라고 감정한 이유가 뭐죠?”

에이미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 초상화는 나무판 위에 백색 칠을 입힌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기법이나 화풍으로 볼 때는 르네상스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특징이 너무 어정쩡해요.”

“어정쩡하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겠어요?”

“마사초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명암의 대비가 너무 뚜렷하고,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반대로 명암의 깊이가 얕아요. 그래서 마사초의 화풍을 흉내 내서 그린 위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명암의 깊이라…….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직 기량이 무르익지 않은 젊은 미켈란젤로는 마사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명암과 원근법에 대한 연습도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고요. 그렇게 설명하면 최후의 심판에 비해 명함의 대비가 약한 걸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그, 그것은……. 하지만 저 그림은 인위적으로 손을 본 흔적이 너무 뚜렷합니다. 액자도 일부러 떼었다가 다시 붙인 게 확실하고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림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양호한데다 나무판에 그린 것이니까 캔버스를 수선할 필요도 없이 용제로 세척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그 정도 보존 처리 작업이라면 굳이 액자를 뗄 필요가 없어요. 오래 된 그림이라는 티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과하게 수선한 흔적을 남기려 한 게 분명합니다. 위조범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죠.”

하이든 박사의 얼굴이 살짝 찌그러졌다. 그에 따라 에이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아시다시피 르네상스 시대에는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판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저 그림처럼 말이죠. 하지만 목재는 시간이 지나면 부식됩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을 수리할 때는 액자를 떼어낸 뒤에 패널의 뒷면을 대패로 얇게 깎아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방부제를 두껍게 바르죠. 추가적인 부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작업을 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에이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흑인인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긴장한 것을 본 하이든 박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원전문가라고 들었는데, 작업 범위가 꽤 한정되어 있었나 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넘 씨. 이만 대기실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대기실을 나섰던 에이미가 좀비가 되어 돌아왔다.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다른 참가자의 설명을 참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대기실의 모니터를 꺼놓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심사위원들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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