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최서라가 들고 있던 금 목걸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목걸이 줄은 모두 도금한 쇠니까 굳이 값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펜던트 무게가 대충 3온스 정도 되네요. 그럼 금값의 시세를 감안할 때 3400파운드 정도인가요? 아까부터 세공을 자꾸 언급하시는데, 흠…, 세공이 마음에 들기는 하네요. 하지만 이게 빅토리아 여왕의 목에 걸렸던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육천 파운드가 넘는 돈을 더 붙이실 수가 있어요?”
주인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학생이라 그러지 않았어요? 어떻게 금 시세를 그렇게 잘 알아요?”
“금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에요. 귀금속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어머, 호호. 보기보다 맹랑한 아가씨네? 세상에 금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금 시세를 알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호구가 아니라 그 반대쪽인 것 같다. 그냥 팔지 말까? 주인 여자의 얼굴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어른거리자 최서라가 얼른 다시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음…, 펜던트 디자인이 확실히 마음에 들기는 하네요. 근데 너무 낡아 보이는 게 좀 그렇다. 아냐, 오히려 골동품 느낌이 나서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이걸 목에 걸고 다니면 애들이 웃을 것 같은데…, 차라리 줄만 좋은 걸로 갈아서 엄마한테 선물로 드리면 어떨까? 에이, 엄만 이미 목걸이가 많잖아. 그래도 모르지. 명색이 영국 골동품이잖아…….”
그녀의 말에 따라 주인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최서라가 결심을 한 듯 목걸이를 내려놓고 지갑을 잡았다.
“이거, 디자인이 제 스타일은 아닌데 줄을 바꿔서 엄마한테 선물로 드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오천 파운드에 주세요. 그럼 살게요. 아니면 그냥 가고요.”
그녀는 지갑을 살짝 열었다. 결심해!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카드를 꺼낼 테니.
주인 여자의 눈동자가 이제는 물결처럼 마구 흔들렸다. 팔까? 아니면 조금 더 버텨? 아냐. 그건 안 돼. 벌써 십 년째 팔리지 않고 있는 물건이잖아. 처음 이 물건을 매입할 때는 금 시세도 지금보다 낮았다. 오천 파운드만 해도 이미 산 가격의 두 배다.
“아무리 그래도 오천 파운드는 좀……. 이거 진짜 귀한 물건이에요.”
주인 여자가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최서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오호라, 절벽 끝까지 다 왔는데 이제 와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시겠다고?
“오천오백 파운드. 그 이상 받고 싶으면 다른 분에게 파세요.”
최서라가 주인여자의 엉덩이에 가볍게 발길질을 했다. 그녀가 지갑을 집어 들고 당장이라도 일어서려는 기세를 보이자 주인여자가 다급히 붙잡았다.
“좋아요. 오천오백에 팔게요.”
주인 여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금 웃는 얼굴로 변한 최서라가 그녀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건 금붙이라서 귀국할 때 세관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시죠? 물건 이름과 무게까지 다 적어서 영수증 확실하게 만들어주세요. 부탁합니다.”
한 번 기가 꺾인 주인 여자는 군소리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영수증과 함께 두 개의 목걸이가 든 상자를 핸드백 안에 집어넣은 최서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성공적인 쇼핑이다. 이런 날은 맛있는 걸 좀 먹어줘야 하는데…….
“도윤 씨는 잘 하고 계시려나? 실력이 좋은 분이니까 우승할 수 있겠지?”
이럴 때 같이 있으면 혼자 뭘 먹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 박사님 말고 도윤 씨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어디야? 그녀는 기운을 내서 다음 가게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트루쓰 앤 밸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녹화장소를 바꿔가며 대회를 치른다. 1회전과 결승전만 뉴욕에서 할 뿐, 나머지 경연은 각각 서로 다른 도시에서 녹화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현재 보스톤에 와 있었다. 지난주에 필라델피아의 반스 미술관에서 2회전을 치른 뒤, 이번 주에 있을 3회전 녹화를 위해 이곳으로 이동했다. 2회전에서는 캐나다의 벨라 베르나르와 헝가리계 미국인 레프 오보린이 탈락했다. 벨라는 탈락이 확정된 후 너무도 슬프게 울어대서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INB는 참가자들의 양해를 구해 새로운 도시에 들를 때마다 작은 이벤트를 열기로 했다. 이른바 출장 감정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시청자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그림을 정해진 장소까지 가져오면 참가자들이 현장에서 즉석 감정해주는 행사였다.
“이건 잭 브라운의 그림이네요. 지금 당장 화랑에 팔아도 3만 달러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경매에 올리면 그 이상도 가능하고요.”
“아쉽지만 위작이에요. 돈을 받고 팔기는 어렵겠는데요? 돌아가신 어머니한테서 받은 거라고 하셨죠? 그럼 그냥 가지고 계세요. 추억은 돈보다 소중하잖아요.”
“어머? 던컨 호킨스의 초기 작품은 오랜만에 보네요? 보관 상태가 안 좋은 게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3천 달러 정도 들이면 깨끗하게 복원시킬 수 있을 거예요. 당장 팔고 싶다고요? 그래도 복원을 먼저 받으세요. 그럼 2만 달러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저 양반은 무슨 감정 자판기 같네. 도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옆에서 한창 감정에 열중하고 있는 할리나 도비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가 그림을 감정해주는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빨랐다. 의뢰자가 테이블 위에 그림을 내려놓으면 입에서 자동으로 가격이 척척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엉터리로 대충 때려잡느냐 하면 그것도 분명 아니었다. 도윤이 보기에도 그녀가 산출하는 가격은 실제 시장 가격과 거의 유사했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니, 도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저 아줌마가 감정하는 그림에는 무슨 가격표가 따로 붙어 있는 것 같아.”
도윤이 기가 막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쉬주하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황당한 게 뭔지 알아? 가끔씩 보면 그림 가격이 진위 감정 결과하고 안 맞아. 자기 입으로 가짜 그림이라고 말해놓고서는 가격은 만 달러, 이만 달러를 막 불러. 누가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미국 화가의 가짜 그림에 만 달러를 내겠어? 그게 말이 돼?”
그러게 말이야. 물론 말이 될 가능성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그림을 척 보면 그 위로 가격이 뿅 하고 숫자로 나타나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 말이다. 황당한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할리나 도비치가 벌써 세 주째 보여주고 있는 황당한 감정 능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란 법도 없잖아?’
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신안이라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폴리니 역시 정말로 아우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란 보장이 있겠는가?
‘만약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면 감정은 그만 두고 전 세계의 화랑이나 경매장을 돌아다닐 거야. 시세보다 싸게 나온 물건들을 쓸어 모으면 떼돈을 벌 거 아냐?’
어쩌면 폴리니는 그저 허풍쟁이에 불과하고 저 여자가 진짜 다크호스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할리나 도비치를 쳐다봤다. 그때 옆에 있던 쉬주하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이 든 모양이다.
“나도 동의를 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무료 감정 서비스를 할 줄 알았으면 프로그램 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거야.”
또 한 점의 그림 감정을 끝낸 쉬주하오가 피곤한지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눌러댔다. 방금 전 그가 감정했던 그림은 가짜였다. 그런데 의뢰인이 감정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펄펄 뛰면서 화를 내는 바람에 쉬주하오는 기진맥진했다.
“완전 무료는 아니지. 방송국 측에서 감정료를 주겠다고 했잖아.”
도윤의 말에 쉬주하오가 피식 웃었다.
“정작 의뢰인들에게는 돈을 안 받잖아? 방송국에서 준다는 감정료도 얼마 안 되고. 이건 말 그대로 서비스라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방송국 측의 참가자 쥐어짜기야.”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예술품을 감정하면 소액의 정해진 대가만을 받는다. 하지만 물품의 감정가가 고가로 예상될 경우, 수고료도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자진 탈락할 게 아니라면 닥치고 서두르자. 일이라도 빨리 끝내야 일찍 쉬지.”
한숨을 푹 내쉬던 쉬주하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금요일이지? 우리 1회전 첫 방송이.”
“이번 주가 첫 방송이기는 한데, 1회전 방송은 다음 주야. 첫 회는 예선전 하이라이트잖아. 근데 너는 그것보다 모레 가드너 미술관에서 있을 3회전 녹화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걸? 너 지난 번 2회전 때도 하마터면 탈락할 뻔 했잖아.”
“이 자식이 아픈 상처를! 그리고 너야 두 번 다 일등 했으니까 마음이 편하겠지. 난 위작을 진작이라고 잘못 감정한 게 방송에 나가는 거라고. 중국에서 전화가 마구 걸려올 걸?”
“그러니까 3회전에서는 더 잘 해야지. 그래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잖아.”
도윤의 말에 쉬주하오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다음 의뢰자가 자기 키만한 그림을 운반하는 스태프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건 뭐지?”
공방에서 새로 사온 목걸이 펜던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최서라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상이 온통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제야 오른쪽 눈에 세공용 돋보기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그것을 뺐다. 그제야 허리를 약간 숙인 채 펜던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작 듀란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 지난주에 포토벨로에 갔다가 구한 목걸이 펜던트에요. 줄이 없기는 하지만 펜던트의 세공 방식이 독특해서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샀어요.”
“그래? 가만 있자, 이건 러시아 쪽 물건 같은데? 내가 잠깐 봐도 될까?”
“그럼요. 여기 앉아서 보세요.”
최서라는 얼른 일어나 아이작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녀 대신 테이블 앞을 차지한 아이작은 한참 동안 펜던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아하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이건 알렉세이 안트로포프의 작품이야. 화가로 유명하긴 하지만 귀금속 세공품도 여러 개 만들었지. 물건이 많지 않아서 나도 몇 번 본 적이 없어.”
“그럼 귀한 건가요?”
러시아 유명 화가의 작품이라는 말에 최서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아이작이 씩 웃었다.
“얼마 주고 샀어?”
“오천오백 파운드요. 처음에는 가게 주인이 만 파운드를 부르더라고요.”
아이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횡재했군. 그 가게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안목이 꽤나 없었던 모양이야.”
“횡재라고요? 그렇게 비싼 물건이에요?”
“하긴 주인의 안목을 탓하기도 어렵지.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물건이니까. 이건 임자만 제대로 만나면 십만 파운드 이상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예술적 가치도 높고, 무엇보다 희귀성이 있거든. 오천오백 파운드면 적은 돈이 아니었을 텐데 과감하게 질렀네?”
최서라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룹 지분의 가치에 비하면 몇 억 정도는 큰돈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식이 지갑 안에 있는 돈이 아닌 이상 십만 파운드는 재벌 그룹 손녀에게도 절대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의 안목으로 고른 물건이 그렇게 귀한 예술품이라니 왠지 가슴이 뿌듯했다.
“가만 있자, 그런데 이걸 펜던트로 알고 있었던 건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작의 말에 최서라는 뜨끔했다.
“아닌가요? 모양은 분명 목걸이용 펜던트 같은데…….”
“모양은 그렇지. 하지만 이게 안트로포프의 물건이 맞는다면 아마 열 수 있을 거야. 펜던트가 아니라 속이 비어 있는 로켓이라는 얘기지. 잠깐만 기다려 봐.”
아이작은 펜던트를 다시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펜던트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원래 손가락으로 누를 수 있도록 돌기가 나와 있어야 해. 그런데 그게 부러져버렸나 보군. 이 상태로는 열기가 힘들겠는데?”
그는 세공할 때 쓰는 가늘고 긴 금속 막대를 손에 들더니 돌기가 부러진 부분에 대고 눌렀다. 그러자 미세하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상태에서 아이작이 뒷면을 잡고 살짝 밀자 펜던트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안에 있던 빈 공간이 나타났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여기 텅 빈 공간이 보이지? 이건 원래부터 안에다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거야. 부피가 큰 건 곤란하겠지만 보석이나 접은 종이 같은 작은 물건들은 충분히 숨길 수 있지.”
“그런 줄 전혀 몰랐어요. 무게가 제법 나가서 속이 꽉 찬 줄 알았는데…….”
“텅 빈 부분이 얇잖아.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무게 차이를 느끼기 힘들 거야.”
아이작은 씩 웃으며 로켓을 다시 결합시킨 뒤 돌려주었다. 최서라가 그것을 받아들며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안에 원래는 귀한 물건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네요?”
“왜? 아무것도 없어서 아쉬워?”
“솔직히 말하면 약간이요. 안트로포프가 만든 거라면 최소한 이백 년 이상 된 로켓이라는 뜻이잖아요. 러시아 황실의 옛날 보석이 들어있었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아이작이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서라답지 않게 욕심이 과하네? 괜한 욕심은 내지 말고, 소더비에 경매를 의뢰해 봐. 그 정도 물건이면 거기서도 받아줄 거야.”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당장 팔 생각은 없어요.”
“그래? 그럼 공부도 할 겸 목걸이 줄을 만들어 보든지. 그 로켓에 어울리는 줄을 만드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거야.”
“네. 그럴 게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공방을 떠났다. 최서라는 한참동안 로켓을 들여다보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게 남자에게 어울리는 로켓이라면 줄까지 달아서 도윤 씨에게 선물해도 좋을 텐데.”
그녀는 로켓을 상자에 담아 공방에 있는 작은 금고에 넣었다. 그 대신 안에서 백금으로 만든 줄을 꺼냈다. 도윤에게 줄 열쇠고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였다. 우선 열쇠고리를 완성한 다음에 안트로포프의 목걸이를 손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