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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36화 (36/300)

36화

‘트루쓰 앤 밸류’ 3회전이 열리기 하루 전, 도윤은 게릭 올슨의 안내로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을 관람했다. 예전에 몇 번씩 다녀간 곳이지만 몇 년 만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트루쓰 앤 밸류’에 초대된 지명 참가자이자 이곳의 책임 큐레이터이기도 한 올슨은 바쁜 와중에도 그를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주었다.

“저기로군요. 렘브란트의 그림이 걸려 있던 곳이.”

도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텅 빈 액자가 걸려 있었다. 원래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라는 렘브란트의 명화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올슨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베르메르의 ‘콘서트’가 걸려 있던 자리에도 마찬가지로 빈 액자만 걸어두었죠. 도난당한 그림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선대 관장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요.”

올슨이 언급한 두 점의 그림은 1990년, 다른 열한 점의 그림들과 함께 도난당했다. 꽤 유명한 도난 사건이어서 아직까지도 FBI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진 그림들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림을 찾는 거 말이에요.”

도윤의 물음에 올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그로서도 현실적인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 그림들을 실제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진으로 봤을 뿐이지요. 하지만 사진 만으로도 얼마나 뛰어난 그림인지 충분히 알겠더군요. 언제가 되었든 좋으니까 그 그림들이 꼭 원래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도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림들의 원래 자리가 가드너 미술관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들이 이미 파손됐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계속 잠들어 있는 것보다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편이 낫다는 건 분명했다.

“그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올슨은 도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시실을 떠났다. 그는 그동안 ‘트루쓰 앤 밸류’에 참가하느라 벌써 세주 째 이곳을 비웠다. 모처럼 돌아왔으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시간을 내준 것만 해도 이미 무리를 한 셈이었다.

올슨이 떠나자 도윤은 혼자서 천천히 전시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내일 있을 ‘트루쓰 앤 밸류’의 녹화 때문에 가드너 미술관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그 때문에 창문을 두드리는 짧은 겨울 햇살이 아직 환한데도 전시실에는 관람객들이 한 명도 없었다.

도윤은 인적이 끊긴 전시실을 돌아다니다가 이따금씩 벽이나 창틀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때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기도 했다. 혹시라도 어딘가에 도난 사건과 관련된 잔류 기억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몇 군데서 잔류 기억이 발견되기는 했다. 하지만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모두 살펴봐도 딱히 도난 사건과 연관되었을 것 같은 기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성과는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너무 많아.”

그는 오늘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삼십 년 전의 도난 사건에 관한 기록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비록 수사 기록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그와 관련된 언론 기사들이 넘쳐흘렀다. 당시의 사건을 다룬 책들도 여러 권 나온 상태였다. 도윤은 그 자료들을 전부 읽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비원들을 제압하고 보안 장치를 무력화시킬 때까지는 경험이 많은 도둑들처럼 행동했어. 그런데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들처럼.”

당시의 범인들은 경비원들을 속여 먼저 수갑을 채운 뒤 그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경비실에 있는 전자 장치들을 무력화시켰다. 거기까지는 최소한 여러 번의 절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정작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안에 있던 감시 카메라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셨다. 단순히 무력화시키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박살을 내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초조해도 그렇지, 그림을 훔치러 들어온 놈들이 사방에 파편이 날리도록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른다는 게 말이 돼? 잘못하면 그림이 상할 게 뻔한데.”

놈들은 정확하게 값비싼 그림들만 골라서 훔쳐갔다. 하지만 그런 용의주도함에 비해서는 정작 자신들이 훔치려는 그림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너무 없어 보인다는 점이 이상했다. 범인들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들은 칼을 이용해 액자에서 잘라낸 뒤 돌돌 말아서 가져갔다. 거기까지는 다른 미술품 도둑들도 흔히 쓰는 방법이다. 문제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이었다.

“콕 집어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노린 놈들이 정작 그게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판 위에 그려졌다는 걸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놈들이 그날 훔친 열세 점의 그림들 가운데 렘브란트의 그림은 네 점이었다. 서로 다른 전시실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전시실을 오가며 기어코 떼어간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림 열세 점을 훔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한 시간 반이야. 아무리 보안 장치를 무력화시킨 덕에 여유가 있었다고는 해도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어. 전문적인 미술품 도둑이라면 길어야 삼십분을 넘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들은 나무판에 그려진 렘브란트의 그림을 가져가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심지어 가져온 차가 작아서 미술관을 두 번이나 왕복하며 훔친 그림들을 날라야 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돼. 그림을 잘 아는 놈들이었다면 애초에 트럭을 가지고 왔을 거야. 승용차가 아니라. 그래야 나무판을 통째로 싣기에 편했을 테니까. 그랬으면 두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겠지.”

훔쳐간 그림들을 어떻게 팔려고 했는지도 궁금했다. 놈들이 훔친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나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 베르메르의 ‘콘서트’ 같은 그림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것들이다. 그런 그림은 공식적인 미술 시장은 물론이고 암시장에서도 거래가 힘들다. 컬렉터들이 매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모르는 놈들이었다고 해도 역시 말이 안 돼. 그런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비싼 그림들만 콕 집어서 훔쳐간 거야? 전시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까지 말이야. 주변에 훔치기 쉬운 그림들이 널려 있었을 텐데.”

도난 사건이 일어난 지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놈들이 훔친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 거래가 시도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얼떨결에 그림을 훔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세상이 떠들썩해지는 바람에 겁이 나서 판매를 포기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단독 범행도 아닌 2인조 절도 사건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두 명의 범인이 모두 그렇게 겁이 많거나 참을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근방인 것 같은데…….’

도윤은 전시실에서 나와 뒷마당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범인들이 액자를 해체한 것으로 알려진 장소였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나무판에 그려졌기 때문에 칼로 잘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범인들은 일단 액자를 통째로 들고 나왔다. 하지만 뒤늦게 그래서는 승용차의 좁은 뒷좌석에 그림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들은 액자를 떼어내기로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액자를 해체한 장소가 바로 미술관 뒷마당이었다.

‘그림을 액자가 붙어있는 채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몹시 초조해졌던 게 분명해. 액자를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렸으니까. 마치 감시 카메라를 박살낸 것처럼.’

도윤은 자료에서 읽은 대로 뒷마당의 분수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놈들 가운데 한 명이 이 이 근처에서 담배를 피웠다. 범행 후에 분수 안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경찰들이 그것을 수거했을 때는 이미 물에 퉁퉁 불어서 DNA를 추출할 수가 없었다.

도윤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주변의 땅과 돌, 벤치 등을 더듬으며 잔류 기억을 읽으려고 애썼다. 행운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어떤 물건에 잔류 기억이 남는 경우는 흔치 않다. 또한 원래 있었던 잔류 기억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거나 사라진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맞을 경우, 몇 백 년 전의 일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잔류 기억이 남기도 한다. 삼십년 전의 일이라면, 그리고 당시 범인들이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까지 잔류 기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했다.

극도로 정신을 집중시킨 가운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도윤은 피곤해지려는 심신을 다잡으며 되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뒷마당에 설치된 여러 시설물과 장식들을 지나 분수에서 제일 가까운 벤치에 손을 대는 순간, 머릿속으로 몇 개의 영상들이 잇달아 떠올랐다.

도윤은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저 아가씨는 왜 저렇게 슬피 울고 있는 거지? 아무튼 사건과는 무관해 보이니까 통과. 저 할아버지는 아예 넋을 잃었네. 부인이 죽기라도 했나? 역시 통과. 저건 경찰 아닌가? 가만 그냥 경찰이 아니라…, 빙고!’

경찰관 복장을 한 남자 하나가 땀에 흥건하게 젖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 검은 머리카락에 각진 턱. 광대뼈가 약간 돌출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외모만 보아서는 멕시코나 남미 쪽 사람에 가까웠다.

남자는 담배를 피면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판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윤의 시선이 남자를 따라 이동했다.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

분명 렘브란트의 그림이었다. 순간 온몸에 찌르르 하는 전율이 일었다.

그림 옆에는 백인 남자 하나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서 있었다. 그 역시 경찰복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모자를 벗는 바람에 잿빛이 드문드문 섞인 금발이 훤히 드러났다. 상의의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채여서 가슴에 새긴 문신이 얼핏 보였다.

‘나이는 대충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초반. 가슴에 새긴 저 문신은 뭐지? 나비인가?’

도윤이 문신을 조금 더 자세하게 확인하려는 순간, 영상이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꺼져버렸다. 아쉽지만 그가 볼 수 있는 잔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후우~. 그래도 범인들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성과가 없지는 않아 다행이네. 그나저나 그 몽타주들은 도대체 뭐야? 전혀 비슷하지가 않잖아?”

도윤은 뒷마당을 빠져나와 미술관 입구로 향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경찰들은 경비원들의 협조를 얻어 2인조 도둑들에 대한 몽타주를 작성했다. 하지만 신문에까지 실렸던 그 몽타주들은 도윤이 읽은 잔류 기억 속의 인물들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잠깐. 경비원들이라고?”

미술관을 나서려던 도윤은 방향을 들어 일층 입구 근처에 있는 경비실을 찾았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경비원들이 제압당해 지하실로 끌려간 장소였다. 도윤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비원의 양해를 얻어 경비실 구석구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짐작대로였다.

몇 개의 영상을 걸러낸 뒤, 그는 경찰관 복장을 한 두 명의 남자가 이미 수갑을 찬 채 엎어져 있는 경비원들을 다시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는 영상을 찾았다. 아까 뒷마당 벤치에서 보았던 남자들과 같은 놈들이었다.

도윤이 영상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라틴 계열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다. 동료를 등진 채 돌아서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 팩을 꺼낸 것이다. 녀석은 그것을 손등에 대고 툭툭 털더니 거기서 나온 하얀 가루를 코에 대고 훅 들이마셨다. 그러자 잔뜩 긴장되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저 놈, 마약 중독자였군.’

영상은 곧 끝났다. 도윤은 그제야 전시실에 있던 감시 카메라가 완전히 박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검은 머리 남자가 약에 살짝 취한 상태였던 게 분명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녹화 때 또 뵐게요.”

도윤은 협조를 해준 경비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미술관을 나왔다. 생각 외로 성과가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에 얻은 정보를 딱히 써먹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국이라면 조명근이나 윤다솔에게 도움을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보스톤에는 그가 아는 경찰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 발로 경찰에 찾아가서 사실은 범인들의 얼굴이 이렇게 저렇게 생겼고, 그 중 한명은 마약 중독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 * *

“다 됐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두 개의 물건을 바라보는 최서라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하나는 수선을 마치고 새로 금줄을 만들어 달은 안트로포프의 목걸이였고, 다른 하나는 백금 줄을 꼬아서 만든 열쇠 고리였다.

“열쇠고리는 나중에 도윤 씨한테 선물하고, 이 목걸이는 어떻게 하지? 한국에 계신 고모한테 보내드릴까? 아니면 마스터 말대로 경매에 올려?”

목걸이는 아이작의 도움을 받아 깨끗이 복원했다. 부러진 돌기는 다시 만들어 붙였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손상된 곳이 없어서 정성을 다해 닦고 광을 내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덕분에 이제는 쇠막대가 없어도 손가락만으로 쉽게 열고 닫는 게 가능해졌다.

목걸이 줄은 새로 만들어 달았다. 디자인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안트로포프의 다른 목걸이 사진을 참조했지만, 거기에 아이작과 최서라의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경매에 올릴 때 문제가 되면 로켓만 팔면 그만이었다. 굳이 줄을 만들어 단 것은 혹시 팔지 않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최서라는 완성된 열쇠고리를 들어 찬찬히 살펴봤다. 마음이 뿌듯했다. 도윤 씨가 기쁘게 받아줄까? 불편하다고 평소에는 손목시계도 차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자동차가 없으니 차 키를 열쇠고리에 달고 다닐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주고 싶었다.

“나름대로 고생해서 만든 거니까 분명 고마워할 거야.”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열쇠고리를 만들어줬으니 거기에 매달 열쇠는 알아서 준비하겠지. 가령 집 열쇠라든가, 차 키라든가, 등등.

“완성한 건가?”

마침 공방에 들어오던 아이작이 테이블 위에 놓인 목걸이와 열쇠고리를 발견했다.

“네. 이제 상자에 넣어 예쁘게 포장하기만 하면 돼요.”

“포장? 선물할 생각인가 보군. 목걸이는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본다고 했으니까 선물은 열쇠고리겠지? 남자용 디자인이니까, 아빠? 아니면 애인?”

최서라는 살짝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도윤을 애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고개를 젓기도 싫었다. 그녀가 대답을 않자 아이작이 피식 웃더니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선물용 상자하고 포장지는 매장에 있으니까 거기 가서 포장하도록 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좋겠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직접 만든 선물을 받고 말이야.”

게다가 열쇠고리는 온통 백금 줄을 꼬아서 만든 터라 재료값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최서라는 아이작에게 살짝 웃어보이고는 얼른 매장으로 나갔다. 매장 직원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는 일단 상자 두개와 포장지, 그리고 리본을 챙겼다.

그녀가 정성을 다해 열쇠고리를 포장하고 있을 때, 매장 안으로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단정하게 기름을 바른 사십대 중년 남자였는데, 정장을 입고 넥타를 맸지만 외모로 보아서는 중동 사람이 분명했다. 매장을 천천히 돌며 물건을 구경하던 남자의 시선이 막 목걸이를 상자에 넣고 있던 최서라에게 꽂혔다.

“잠깐만요.”

왠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소리친 남자가 최서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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