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죄송합니다만 그 목걸이 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갑작스런 남자의 요구에 최서라는 흠칫했다.
“왜 그러시죠?”
“제가 아는 물건이랑 똑같이 생긴 것 같아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목걸이를 잡아챌 기세였다. 불안함을 느낀 최서라가 슬그머니 목걸이를 집어넣으려고 하자 남자의 얼굴이 더욱 다급해졌다.
“죄송합니다. 그 목걸이가 제가 찾고 있던 것과 너무 비슷해서요. 혹시 팔지 않는 물건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최서라는 말끝을 흐렸다. 팔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듀란 공방 매장이 아니라 소더비 경매장에 목걸이를 팔아달라고 내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목걸이는 공방에서 만든 물건이 아니라 최서라 개인의 소유였다. 게다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골동품의 일종이기도 했다. 그런 물건을 매장에서 파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최서라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매장의 남자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분위기가 이상해 보이자 혹시 위협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러자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최서라와 남자직원이 동시에 움찔했지만, 다행히 상대가 꺼낸 것은 신분증이었다. 남자 직원이 신분증에 쓰인 내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네. 저는 영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외교관이죠.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갖고 계신 목걸이를 잠시만 보여주십시오.”
최서라가 남자 직원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구경하는 건 괜찮지만 조심해서 다뤄주세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남자는 최서라의 목걸이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목걸이에 작은 글씨로 코란 구절이라도 적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감정가처럼 세심하게 목걸이를 뜯어보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목걸이를 사고 싶습니다.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사시겠다고요? 하지만 그건 아직…….”
최서라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 아이작이 공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남자와 그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물건이 어떤 건지 아시오? 미리 말씀드리자면 듀란에서 만든 건 아닙니다.”
그러자 남자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8세기에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안트로포프의 목걸이가 아닙니까?”
최서라는 남자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설마 상대가 목걸이의 정체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이작도 약간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럼 가격도 대충 알고 있겠군요.”
“짐작은 합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만들어진 장신구들을 모으고 있었거든요. 물건의 상태를 보니 약간 수리를 했군요. 줄도 새로 만들어 달았고요.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니까 10만 파운드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최서라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아이작을 향했다. 그는 이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10만 파운드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남자는 정확히 그 금액을 불렀다. 복원을 하고 줄을 만들어 달았다고는 하지만 구입 가격의 20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뭔가 고민하든 듯하던 아이작이 최서라에게 물었다.
“이거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아직 확실히 결정한 건 아니었어요. 최서라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12만 파운드 드리겠습니다. 마침 제가 찾고 있던 물건이었거든요. 그 정도 돈이면 이 목걸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더 좋은 선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작의 고개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이 물건은 공방의 것이 아니라 제 개인 소유에요. 그래서 영수증도 제 이름으로 끊어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남자에게 계좌로 돈을 이체 받고 영수증을 써주면서도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오천오백 파운드에 산 물건을 두 주도 안 돼서 12만 파운드에 팔았다. 나중에 세금을 낸다고 하더라도 일단 엄청난 이익을 본 것이다.
“아차.”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목걸이에 달린 게 사실은 펜던트가 아니라 로켓이라는 걸 설명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게 펜턴트가 아니라 로켓이라고 해서 물건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 않을까? 안토로포프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봤으니까 어쩌면 로켓을 여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몰라.”
이제 와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가지도 않았으니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어차피 열어봤자 속에 든 건 아무것도 없다. 정 답답하면 나중에 가게로 찾아오겠지.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트루쓰 앤 밸류’ 1회전 녹화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미국 참가자들은 열두 명 중에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2회전을 거치면서 그 가운데 무려 세 명이 탈락하는 바람에 현재는 두 명만 남은 상태였다. 시청자의 대부분이 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INB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결과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남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흑인이고, 다른 한 명은 일본계 미국인이다.
3회전 녹화에 들어가기 며칠 전, 피디인 알랭 클로드가 메인 작가인 존 카론을 은밀히 불렀다.
“위에서 전화가 왔어. 결승전에 올라가는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반드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시청률이 바닥을 칠거라고 걱정하는 것 같아.”
존 카론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정당한 걱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공중파 방송은 어차피 광고로 먹고 사는 곳인데 시청률이 떨어지면 광고 계약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직 1회전이 방송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4강 이후의 생방송 광고는 완판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남은 둘 중에 한 사람한테 힘을 실어주자는 거야? 어떻게?”
“방법이야 뻔하지. 그 전에 누굴 밀 건지부터 생각해 보자고. 이 박사가 계속 치고 나가는 상황에서 모리타를 띄우기는 좀 그렇지? 같은 동양인이잖아. 정작 참가자들이 감정하는 건 서양 그림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게릭 올슨에게 하이라이트를 주자고.”
“위에서 모리타는 안 된데? 그 친구도 미국인이잖아?”
“모리타는 싫은가 봐. 그 친구를 미느니 차라리 할리나 도비치나 파비앵 말레를 부각시키자고 하더라고. 특히 할리나는 우리가 초대한 지명 참가자잖아.”
“흑인까지는 받아들이겠지만 아시아계는 안 된다? 그 사람들 도대체 왜 그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방송국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 안에 은근히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개입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자니 정말로 시청률이 떨어지면 자신들의 밥줄이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다.
“게릭 올슨을 띄워줄 방법은 뭐야? 나더러 사회자에게 주는 대본을 고치라는 거야? 올슨에게 멘트를 잘 쳐줄 수 있도록?”
존의 말에 알랭이 미안한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올슨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을 해야 하겠지. 심사위원들에게 슬쩍 언질을 주는 건 어떨까? 역시 어렵겠지?”
“프로그램 쫑 내고 싶어? 그 양반들은 우리처럼 방송국에 목을 매단 사람들이 아니야. 괜히 말 잘못했다가 인종차별이라고 욕만 먹을 걸? 섣부른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알랭이 자신도 짜증이 나는지 숱도 별로 없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튼 해 보는 데까지 해 보자. 어차피 우리가 별짓을 다 해봤자 그게 참가자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4강전 때부터야. 생방송이 시작되어야 시청자들의 점수가 함께 집계 되니까. 그 전에는 오로지 심사위원들에 의해서 탈락자가 결정된다고.”
“위에서도 그걸 알고 하는 소리겠지. 그 전까지 분위기를 잘 만들라는 뜻이잖아.”
“그렇기는 한데, 만약 그 전에 게릭 올슨이 탈락하면 어떻게 하지?”
“그럼 우린 그냥 헛수고 한 거지, 뭐. 그렇다고 할리나 도비치하고 파비앵 말레까지 같이 미는 건 힘들어. 그건 오히려 초점을 분산시키는 효과만 낼 가능성이 커.”
“빌어먹을이네.”
“그러게 말이야. 이 박사가 백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도윤을 직접 초대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도윤을 우승 후보 손꼽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두 번의 경연에서 나타난 결과는 알랭과 존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도윤은 1, 2회전에서 모두 압도적인 일등을 차지했다.
* *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보스톤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 와 있습니다. 바로 ‘트루쓰 앤 밸류’의 3회전이 열리는 장소죠.”
드디어 3회전 녹화가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마이크를 잡고 있는 페이건과 리키의 뒤로 텅 빈 액자가 걸려 있는 벽을 함께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렘브란트의 ‘갈릴리 호수의 푹풍우’가 걸려 있던 그 전시실에 서 있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가드너 미술관은 삼십년 전에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불행한 도난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비록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 당시를 살짝 되돌아보도록 할까요? ‘트루쓰 앤 밸류’의 미국 대표이자 가드너 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인 게릭 올슨 씨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도윤은 게릭 올슨이 약간 흥분된 얼굴로 리키와 페이건 사이에 서는 것을 보며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 프로그램의 초대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가드너 미술관 도난 사건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알려달라는 관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INB가 녹화 시작부터 그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었으니 올슨으로서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가드너 미술관이 방송국 측에 특별히 부탁을 했나? 솔직히 기회를 얻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말하는 걸 보니까 올슨 씨 준비 많이 했네.”
올슨은 짧지만 요령 있게 삼십년 전 도난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마지막에는 그림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미술관 측의 결의도 밝혔다. 사회자들이 호들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건 그가 미술관 측에서 내건 현상금을 언급했을 때였다.
“우와! 천만 달러요? 시청자 여러분 잘 들으셨죠?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행운도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예요. 지금 화면에 나가는 몽타주 보이시죠? 그 얼굴들을 꼭 기억하세요. 경찰서는 물론이고 INB 방송국이나 가드너 미술관, 어디든지 좋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즉시 신고하세요.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를 되찾읍시다.”
사건 소개와 관련된 촬영이 끝나자 올슨은 두 사회자는 물론이고 방송국 스태프들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했다. 도윤이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빈정대는 소리가 들렸다.
“잘들 한다, 얼굴이 까매도 역시 미국인이라는 거지? 지들끼리 핥아주고 빨아주고 아주 난리가 났구나.”
에이미 그리넘이었다. 도윤은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 막 나가는데? 그냥 넘어가려다 결국 한 마디 했다.
“잃어버린 그림을 찾아주자는 거잖아요. 좋게 봅시다.”
에이미의 사나운 눈초리가 도윤에게 내리꽂혔다. 그녀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두 번이나 일등을 하더니 여유가 생기신 모양이네? 방송국에서 마음먹고 올슨을 띄워주고 있는 게 안 보여요? 이 쇼는 매주가 단판 승부예요. 당신이 지난주까지는 운이 좋았는지 몰라도 이번 주에 똑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요.”
“내 운이 그리넘 씨만 하겠어요? 엉뚱한데 신경 쓰지 말고 각자 감정이나 잘 합시다.”
에이미는 한참동안 도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휙 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도윤은 혼자서 혀를 차다가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 한창 의논하고 있는 피디와 메인 작가를 흘낏 쳐다봤다. 그래. 표현이 좀 거칠기는 했지만 아마 에이미의 말이 맞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 뭐? 적진에 들어온 주제에 대우받을 생각이었어? 이 정도면 양반이지. 이만한 차별도 감당한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프로그램에 출연할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
잠시 후 이제는 여덟 명으로 줄어든 참가자들이 모두 임시 스튜디오에 모였다. 평소처럼 심사위원들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사회자들의 멘트가 이어진 후, 장막이 걷혔다. 이번에도 감정해야 할 그림의 수는 셋. 그런데 세 점의 그림들 성격이 조금 묘했다.
‘이 사람들 진짜 작심했나 보네? 아무래도 가드너 미술관하고 INB 사이에 확실히 뭔가 얘기가 오고간 모양이야. 무슨 기브 앤 테이크도 아니고…….’
매 회마다 문제로 출제되는 그림은 해당 미술관이나 박물관 측에서 정한다. 그런데 가드너 미술관이 준비한 그림은 세 점 모두 19세기에 활동한 미국 화가들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