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제일 왼쪽에 있는 것은 폭 2미터에 높이는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유화였다. 두 명의 젊은이가 말을 타고 서로 경주하듯 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사람과 말의 근육과 표정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토마스 에이킨스로군. 이 사람 그림을 쓰고 싶었으면 차라리 2회전에서 내놓을 것이지.’
2회전은 필라델피아의 반스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에이킨스는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해부학을 깊이 연구한 에이킨스는 과학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릴 정도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데 집착했다. 그의 그림 중에는 사람을 수술하거나 시체를 해부하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여러 점 있었다. 그 때문에 생전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운데 있는 두 번째 그림은 윈슬로우 호머의 것이었다. 유화가 아닌 수채화였고, 당연히 캔버스가 아니라 수채화용 종이에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 속에서는 한 손에 엽총을 든 늙은 사냥꾼이 다른 손으로 이마 위를 가린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살짝 굽히고 있는 그의 옆에서는 두 마리의 사냥개가 앞으로 뛰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일종의 자화상이군. 왠지 말년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림이야.’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호머는 석판화 공방의 견습생을 거쳐 잡지의 삽화가로서 화가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을 따라다니는 종군 화가로도 활약했던 그는 한때 미국의 자랑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유화보다는 수채화를 주로 그리며 죽을 때까지 사람들과의 교류를 삼가며 살았다.
세 번째 그림은 윌리엄 체이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정물화였다. 호머와는 달리 체이스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았고, 6년 동안 파리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배우고 돌아온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인상주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미술 교사였기 때문에 제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허~! 이것 봐라?’
윌리엄 체이스의 정물화를 살피던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서명까지 선명한 그의 그림이 오늘 출제된 세 점 가운데 유일한 위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안으로 볼 때 빛이 전혀 새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도저히 위작으로 감정하기 어려울 만큼 체이스의 화풍을 똑같이 재현해낸 그림이었다.
‘이건 체이스 본인이 그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위작인데?’
위작의 종류와 제작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그래도 거칠게 구분하면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거장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원본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뛰어난 손재주와 옛날에 제작된 캔버스나 널빤지, 액자, 물감 등도 필요하다. 그런 도구를 쓰지 않고 그냥 모사할 경우 경험 있는 감정가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다.
둘째는 앞서 말한 그런 도구들이 갖춰져 있지 않을 때 쓰는 방법이다. 위조하려는 화가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무명 화가의 진작을 구한 뒤, 거기에 살짝 손을 대고 서명을 위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평범한 그림을 고가의 걸작으로 변신시키는 속임수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조하려는 화가의 화풍을 치밀하게 연구한 뒤, 무수한 연습을 거쳐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방법이다.
도윤이 볼 때 윌리엄 체이스의 정물화는 세 번째 수법으로 만든 위작이었다. 캔버스가 아닌 나무판 위에 그려진 정물화는 물감과 나무, 액자 등을 모두 19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을 이용했고, 체이스가 환생해서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풍도 똑같이 재현했다.
‘눈으로만 보면 세 점 모두 진작이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오늘은 도구를 쓰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어.’
앞선 두 차례의 경연에서 출제된 작품이 세 점 모두 진작이거나 위작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의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감정이 시작된 지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아 게릭 올슨과 에이미 그리넘을 비롯한 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손을 들었다.
“자외선램프(UV Lamp)를 쓰겠습니다.”
도윤은 2차전에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역시 자외선램프를 신청했다. 3차전에서도 아무런 도구를 요구하지 않은 사람은 리치오 폴리니와 할리나 도비치 두 사람뿐이었다. 폴리니는 처음부터 도구가 없어도 그림의 진위를 가리는 것 따위는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고, 할리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 하더니 결국 손을 들지 않았다.
방송국 측에서 자외선 램프를 챙기는 동안, 여전히 윌리엄 체이스의 그림을 살피고 있던 도윤이 갑자기 인상을 확 일그러트렸다.
‘이건 뭐야? 이럴 리가 없잖아?’
확대경을 들이대고 다시 한 번 살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뚜렷해졌다. 도윤은 그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생각에 잠겼다.
‘전문가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위작을 만든 자가 저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이게 말이 되려면 위조범에게 주어진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다는 뜻인데……. 설마?’
도윤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진실이 뭔지 알려면 정확히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잠깐만요.”
참가자들에게 자외선램프를 나눠준 스태프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 도윤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는 프로그램 책임자인 알랭 피디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늘을 하나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늘을 써도 감점이 되나요?”
알랭의 시선이 심사위원들에게 향했다. 그러자 심사위원들이 서로 뭔가를 의논하는가 싶더니 메트로폴리탄의 하이든 박사가 마이크를 켰다.
“바늘은 감점 대상이 되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설마 그걸로 그림을 마구 찔러볼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그림에는 손상을 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습니다. 감점 없이 바늘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심사위원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후 스태프 하나가 어디서 구했는지 손가락 하나 길이의 바늘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바늘을 전해 준 스태프가 자기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 가만히 있던 올슨이 불쑥 손을 들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바늘 하나만 주십시오.”
그림을 향해 돌아서던 도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올슨은 몰랐던 거야?
* * *
한 시간 뒤, 그림 감정이 끝난 참가자들이 면접을 기다리기 위해 모두 대기실에 모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게릭 올슨의 안색이 유독 어두웠다. 그림을 감정할 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을 계속 내비쳤는데, 대기실에 들어온 뒤로도 입술을 꾹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디 불편하세요?”
도윤이 게릭 올슨의 옆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올슨이 흠칫 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가 제 홈그라운드 아닙니까? 잘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긴장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올슨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도윤은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입맛을 다셨다.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마음이 너무 여리네.
참가자들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스튜디오에서는 사회자인 제임스 페이건이 오늘의 면접 방식을 설명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의 감정 결과가 굉장히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세 점 모두 진작이라고 감정한 참가자가 두 명이고, 나머지 여섯 명은 각각 한 점, 혹은 두 점이 위작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작품이 위작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시 참가자들마다 의견이 갈렸네요.”
감정결과가 다양하게 나왔다는 말에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 가운데 몇 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오늘은 사람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리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이건 또 뭐야? 불안하게. 이번에도 내가 뭔가를 놓친 거야?”
프랑스에서 온 파비앵 말레가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도윤을 흘낏 쳐다봤다. 앞선 두 번의 경연에서 작품의 진위 여부와 시세를 가장 완벽하게 맞힌 사람이 바로 도윤이었다. 감정 결과가 다양하게 나왔다니까 그가 어떤 의견을 내놨는지 궁금해진 모양이다.
대기실의 분위기가 출렁이는 사이, 스튜디오에서는 리키가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그래서 오늘은 면접 방식을 조금 바꾸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 점 한 점에 대해 정답을 맞힌 참가자들만 감정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죠? 하지만 오늘은 모든 참가자들이 면접을 치러야 합니다. 한 분씩 심사위원들 앞에 서서 세 그림에 대한 자신의 감정 결과와 그 이유를 한꺼번에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하는지 이해하셨나요? 그럼 가장 먼저 마이크 모리타 씨의 설명부터 들어보겠습니다.”
2회전부터는 앞선 경연에서 성적이 제일 좋지 않은 사람부터 면접을 실시했다. 마이크 모리타는 2회전에서 간신히 탈락을 면했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모리타가 이를 꽉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사무라이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대기실을 나갔다. 하지만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싸움에 패해 목이 잘린 장수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기요, 이박사님. 저 그림들 세 점 모두 진작인 거 아니었어요?”
모리타가 도윤에게 다가오더니 최대한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무리 작게 말해도 사람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도윤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만 살짝 저었다. 모리타가 통곡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도윤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할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발견했다.
‘할리나 도비치? 저 여자도 전부 다 진작이라고 감정했어?’
그러고 보니 할리나 도비치는 1회전에서도 그림의 진위 감정에서 실수를 범했었다. 그림을 보면 자동으로 가격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냥 시세 계산이 빠를 뿐인 건가?
모리타의 뒤를 이어 파비앵 말레와 쉬주하오가 차례로 스튜디오로 나갔다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번째 면접 대상자는 에이미 그리넘이었다.
“그리넘 씨는 첫 번째와 세 번째, 그러니까 에이킨스와 체이스의 그림을 진작으로 봤습니다. 반면에 호머의 수채화는 위작으로 감정했군요. 일단 수채화를 위작으로 판단한 이유부터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시카고 예술대학의 그렉 브렌트 교수가 첫 질문을 던졌다. 에이미는 턱을 살짝 치켜든 특유의 자세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림 자체는 호머의 화풍을 훌륭하게 흉내 냈습니다. 하지만 위조범이 종이를 잘못 선택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더군요.”
까미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요? 종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수채화를 그리는데 쓴 종이는 장인이 한 장 한 장 손으로 만든 핸드메이드 중목이더군요. 황목보다는 곱고 세목보다는 거친 수채화용 종이인데 품질이 아주 우수했습니다.”
“종이의 품질이 우수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수채화용 종이는 펄프로만 만드는 일반적인 종이와는 달리 면과 아마를 섞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눈과 결이 있고 물감도 잘 먹죠. 특히 색감이 살아나게 하려면 그런 종이를 써야 합니다. 19세기에 그 정도로 우수한 수채화용 종이를 생산한 곳은 영국밖에 없어요. 당시에 영국은 전 세계 수채화의 본고장이었으니까요.”
흑인이기는 하지만 영국인인 에이미의 얼굴에 슬쩍 자부심이 우러나왔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얼굴에는 반대로 한심하다는 빛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19세기의 미국 화가인 호머가 영국에서 만든 수채화 종이로 그림을 그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군요. 혹시 호머가 영국에서 수입된 종이에 그림을 그렸을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해 봤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해요. 당시의 수채화용 종이는 영국에서도 생산량이 많지 않았어요. 남는 것이라고 해도 프랑스나 네덜란드, 독일 등으로 수출하기에도 양이 부족했지요. 미국으로는 아주 극소량만 수출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극소량이라…, 그러니까 19세기에 미국으로 수출된 영국산 수채화 종이가 당시 미국 화단을 대표하던 화가도 구하기 어려웠었을 정도로 희귀했다는 말이죠? 그럼 도대체 그 종이는 어떤 사람들이 썼을까요?”
“그, 글쎄요? 아마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썼겠죠.”
에이미가 비로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브렌트 교수가 결정타를 가했다.
“그리넘 씨는 호머가 말년에 영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는 걸 혹시 아십니까? 그가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은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라는 것은요?”
에이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다른 그림들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지만, 그녀가 그나마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한 것은 첫 번째 그림인 에이킨스의 유화에 대한 것뿐이었다. 에이미가 축 처진 어깨로 퇴장하자 까미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1회전 때부터 느꼈지만 그리넘 씨는 자신감이 너무 과해요. 그에 비해서 밑바탕에 깔린 지식이나 감정 경험은 너무 얕고 좁아요. 영국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저런 식으로 감정하다가는 언젠가 큰 사고를 치지 않을까요?”
하이든 박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술품 감정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거지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하기가 힘들어요. 우리로서는 그리넘 씨가 이번 경연을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요.”
에이미의 뒤를 이어 할리나와 폴리니, 그리고 게릭 올슨이 순서대로 면접을 치렀다. 올슨의 표정은 비교적 무덤덤한 편이었지만 할리나와 폴리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결과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면접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올슨이 스튜디오로 나가려는 도윤을 살짝 잡았다.
“바늘을 달라고 한 건 미안하게 됐어요. 이 박사가 그걸 요구하는 걸 보니까 엉겁결에 손이 번쩍 올라갔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안 그러는 게 나았을 걸 그랬어요.”
도윤이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누가 뭐래도 올슨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다른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올슨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도윤이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눈에 미안함과 고마움의 감정이 동시에 얽혀 들었다. 도윤은 그런 그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주고는 대기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