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카심 알 오마르는 영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의 문관이었다. 동시에 국왕의 둘째 동생인 이브라힘 파티흐 알 사우드 왕세제를 위해 일하는 비밀 정보원이기도 했다.
물론 카심은 지금까지 이브라힘을 직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브라힘은 카심같은 말단 정보원이 만나기에는 너무 고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직속상관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정보원들을 총괄하는 무함마드 유스프였고, 무함마드는 다시 이브라힘의 비서실장인 압둘 바시뜨 알 하쉬르를 위해 일했다. 카심은 처음 비밀 정보원으로 임명될 때 딱 한 번 압둘의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카심이 비밀 임무를 부여받고 런던의 자국 대사관으로 파견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는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듀란이라는 귀금속 전문점에서 드디어 지겨운 기다림의 끝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런 빌어먹을.”
라 일리하 일랄라. 알라 이외에 신은 없도다. 알라도 이번에는 그가 욕하는 것을 용서해주실 것이다.
카심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목걸이를 노려보았다. 저걸 사기 위해 12만 파운드를 썼다. 그때만 해도 돈이 아까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텅 빈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목걸이의 로켓이 마치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보고를 해야겠지? 뻔한 사실을 놓고 며칠이나 고민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심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속상관에게 며칠 전 일어났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무함마드는 한 마디도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이다가 그의 보고가 모두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로켓을 열었더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는 말이지?”
언제나 그렇듯이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목걸이를 사기 전에 미리 확인했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그 목걸이가 듀란이라는 가게가 아니라 거기 여자 종업원의 개인 소유물이었다고 했나? 일개 종업원이 그렇게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건……. 죄송합니다. 그 여자는 목걸이가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여자가 로켓 안에 있던 매뉴얼을 미리 꺼냈을 가능성은?”
“여자는 로켓의 비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전화기 저쪽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카심의 입이 바짝 말라갔다. 역시 내가 너무 성급했어! 그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드디어 무함마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몰랐을 수도 있고, 확실치도 않다……. 그럼 확실하게 알아내야지. 안 그래?”
“무, 물론입니다.”
“내가 확실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열흘, 아니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안에 다시 정확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일주일이라……. 일주일 뒤에는 자네에게서 12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보고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지. 그럼…….”
“잠깐만요. 부탁이 있습니다.”
상대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자 카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부탁? 뭐지?”
“야세르를 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무리를 하려 드는군. 잘못하면 우리 쪽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어.”
“그저 가볍게 협박만 할 겁니다. 상대는 평범한 가게 종업원입니다. 겁을 주면 아는 걸 쉽게 털어놓을 게 분명합니다.”
“자네 입에서 오늘 처음으로 분명하다는 얘기를 듣는군. 하지만 사고는 늘 쉬운 일이 어그러지면서 시작되는 거야.”
“혹시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야세르를 쓰려는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직접 손을 쓰는 게 더 무리라는 걸. 부탁합니다.”
무함마드의 입에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허락할 것이다. 야세르보다는 본래 목걸이의 로켓 안에 들어있었어야 할 매뉴얼이 백만 배는 더 중요하니까.
“알았네. 대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야 돼. 야세르에게 연락을 해 두지.”
전화가 뚝 끊어졌다. 카심은 그제야 넥타이를 끄르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비밀 요원이라고는 하지만 카심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적국의 스파이를 때려눕히고 미녀와 사랑에 빠지는 특수 요원이 아니다. 물론 사십이 넘은 나이치고는 아직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신체적으로는 당과 콜레스테롤을 걱정하며 식사량을 조절해야 하는 중년의 대사관 문관이 그의 정체였다.
카심이 이브라힘 왕세제의 비밀 요원으로 발탁된 것은 오로지 미술품에 대한 그의 뛰어난 안목 덕분이었다. 당연히 특수부대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무술이나 사격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실제로 유럽 곳곳에 파견된 다른 요원들도 대부분 그처럼 미술사나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이브라힘 왕세제는 그런 분야에 유난히 관심이 깊은 것으로 유명했다.
카심과는 달리 야세르는 전직 영국 특수부대 출신의 바텐더다. 전형적인 영국 백인인 그는 군에 있을 때 비밀스럽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는 야세르라는 이슬람식 이름을 받은 뒤에도 공식적으로는 프랭크 오웬이라는 본명을 바꾸지 않았다. 혹시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그의 얼굴과 신분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어. 야세르가 도와주기만 하면 그까짓 가게 종업원의 입을 열게 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을 거야.”
하지만 그 여자가 정말로 매뉴얼의 행방을 모를 경우엔? 빌어 처먹을……. 알라여 용서하소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다.
* * *
‘트루쓰 앤 밸류’의 본선 4차전이 끝나자 4강전 진출자들에게 석 주 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4강전부터는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녹화한 분량이 모두 방송되기 전까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INB 방송국은 참가자들에게 각자 집에 돌아가 쉬다가 방송 일주일 전까지 LA에 모여 달라고 부탁했다.
“4강전 생방송은 ‘LA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촬영될 거예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 동안 고향에서 푹 쉬면서 피로를 풀고 오세요. 왕복 항공비는 INB가 부담하겠습니다.”
사실 참가자들을 이십일 넘게 미국에 머물게 하면서 숙박비를 지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복 항공비를 부담하는 게 방송국 측으로서도 이익이었다. 아울러 INB는 4강 진출자들이 고향에서 생방송을 기다리며 생활하는 모습을 촬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들의 고향에 있는 주요 방송국들에서 ‘트루쓰 앤 밸류’의 판권을 사들였습니다. 동시 방송은 불가능하지만, 이곳에서 방송이 나가고 일주일 뒤면 각자의 집에서 편안하게 TV로 자신이 활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존 카론의 말에 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고향인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카론이 한 말이 맞다. 하지만 한국 송출권을 사들인 KTV는 미국 현지 방송과의 시차를 두 주로 잡았다. 번역해서 자막을 달기 위한 시간을 여유 있게 둔 것이다. 그 때문에 도윤이 한국에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것은 본선 1회전까지가 고작이었다.
‘방송이 나간 뒤에 4강 진출자들이 고향에서 받게 될 관심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의도겠지. 하지만 내 경우에는 좋은 영상을 얻기 힘들걸?’
본선 1회전이 한국에서 방송되면 그는 곧바로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한다.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겠다고 일부러 번화한 곳을 찾아다닌다고 해도 촬영할 시간 자체가 부족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시카고를 바로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전담 스태프인 케이티 패럴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녀의 오빠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도윤이 케이티의 청을 거절하지 않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이 잘 되면 자신도 그녀의 오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들어줄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지만 일단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어서 오십시오. 시카고 경찰청(CPD)의 앤드류 패럴 경위입니다. 협조 요청을 승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윤이 케이티의 오빠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시카고 경찰청이었다. 본선 4회전을 찍기 위해 시카고에 온 뒤에 안 사실이지만 케이티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시카고 토박이였다. 그녀의 오빠 역시 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형사가 되었는데, 가녀린 몸매를 지닌 여동생과는 달리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티가 간절히 부탁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군.’
겉으로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도윤은 앤드류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읽지 못했다. 아마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끈질긴 주장을 무시하지 못하고 일단 사람이나 한 번 만나보자는 심정으로 그를 초대했을 것이다.
“저한테 보여주실 것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도윤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상대의 신뢰가 필요했고, 그러자면 먼저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케이티의 얘기를 통해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 가는 게 있었던 것이다.
“듣던 것과는 달리 성격이 급하시군요. 저야 서둘러 주실수록 고맙지요. 따라오십시오.”
앤드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앞장서서 도윤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뒤를 케이티가 종종거리며 쫓아왔다.
앤드류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증거 보관실 옆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세 사람이 방 안에 들어서자 한쪽에 흉측한 몰골의 그림 한 점이 이젤 위에 얹혀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미리 가져다 놓은 게 분명했다.
“보여드릴 게 이겁니다. 그저께 신고가 들어와서 일단 경찰서에 가져다 놨는데 저희로서는 처음 접하는 사건이어서 난감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제 케이티가 오랜만에 집에 들렀기에 무심코 얘기했더니 이 박사님이라면 틀림없이 해답을 주실 거라고 하더군요.”
가끔은 나보다 이 아가씨가 더 나를 믿는 것 같아. 도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은 몇 명의 무용수가 군무를 추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녹아내리는 바람에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도윤은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맞았다.
그가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옆에서 앤드류 형사가 상황을 설명했다.
“드가의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이제는 쓰레기나 다름없게 변했지만 피해자는 이 그림을 지인으로부터 120만 달러에 사들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물손괴 죄로 고소까지 했습니다.”
이걸 120만 달러에 샀다고? 도윤은 앤드류 형사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일까? 그는 그림을 보느라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고소를 당한 사람이 복원 전문가입니까?”
앤드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림만 보고도 범인을 짐작하신 겁니까?”
“범인이라……. 글쎄요. 그 사람이 한 짓 때문에 그림이 이렇게 된 건 분명하지만, 그걸 범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림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복원전문가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부주의한 술주정꾼이거나.”
도윤의 자신 있는 말에 약간은 심드렁하던 앤드류의 태도가 조금은 진지해졌다.
“괜찮으시면 조금 더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형사 한 명과 케이티가 각각 앤드류와 도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커피가 놓이고, 설명이 시작했다.
“우선 이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저 그림은 드가의 작품이 아닙니다. 당연히 120만 달러짜리도 아니죠. 그림 주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짜를 잘못 산 겁니다.”
그의 말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드가의 작품이 아니라고요? 감정사가 서명한 감정 확인서도 있는데요?”
“저도 그림을 감정하지만 감정사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진짜 드가의 작품이었다면 저렇게 녹아내릴 리가 없었겠죠.”
“그림이 녹아내린 이유를 아십니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정확한 건 물감 샘플을 과학 수사 팀에 보내서 성분 분석을 의뢰해야 될 거예요. 만약 거기서 글리세린 성분이 나오면 제 짐작이 맞은 겁니다.”
글리세린? 갑자기 웬 글리세린?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도윤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위조범들 가운데는 단순히 위작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그림 안에 시한폭탄을 숨겨놓는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캔버스에 글리세린을 한 겹 발라서 말린 뒤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거죠. 못된 장난이지만 효과는 강력합니다.”
“피부 보습제가 시한폭탄이 된다고요?”
“네. 마른 글리세린은 물이나 알코올에 잘 녹기 때문이에요. 화가들이 유화를 완성하면 위에 바니시라는 걸 발라서 마감합니다. 복원전문가들이 오래된 유화를 복원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그 바니시를 알코올로 벗겨내는 거죠. 그때 장난을 쳐둔 그림의 경우, 유화 물감에 스며든 알코올이 밑에 있던 글리세린을 녹이게 됩니다. 그럼 물감이 물 위에 뜬 얼음처럼 미끄러져 흘러내려가죠. 바로 아까 본 그 그림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 앤드류의 동료 형사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앤드류가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행동을 설명했다.
“오전에 과학수사 팀 사람들이 와서 물감 샘플을 가져갔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샘플에 글리세린 성분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전화를 하러 갔을 겁니다. 글리세린 성분을 확인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림 위조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당장은 바쁜 일이 없으니 그렇게 하죠.”
결과를 확인해야 신뢰감이 높아질 거 아냐? 그래야 나도 부탁을 하기가 쉬워지지. 도윤은 앤드류를 향해 최대한 따뜻한 웃음을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