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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42화 (42/300)

42화

앤드류의 말처럼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던 동료 형사가 돌아왔다.

“확인됐습니다. 물감 샘플에서 글리세린 성분이 검출되었다는군요.”

도윤은 씩 웃고 말았지만 앤드류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마침 알고 있던 현상이라 파악하기 쉬웠을 뿐입니다.”

“이 박사님에게야 쉬운 일이었겠지만 저희로서는 정말 난감한 사건이었습니다.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나중에 샘플에서 글리세린 성분을 발견했어도 그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웠을 겁니다.”

글쎄? 도윤이 생각하기에는 과학수사 팀이 제대로 일을 하기만 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밝힐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개입한 덕에 좀 더 일찍 진상을 알게 된 것뿐이다.

이제 슬슬 자신의 본론을 꺼낼까 하던 그는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짚기로 했다.

“그 복원전문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사실 복원전문가들이 일을 맡을 때 그림 밑에 글리세린이 발라져 있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글쎄요. 피해배상 문제야 고소인이 포기하지 않는 한 법정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산 손괴 부분은 무혐의 처리가 될 겁니다. 이 박사님 말에 따르면 고의가 아니었을 테고 결과를 예상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럴 경우 배상 문제도 복원전문가에게 유리하게 되겠죠. 그림 주인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요.”

그림 주인이 억울하다고? 과연 그럴까?

“제 생각에는 그 그림 주인이라는 사람도 한 번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정서를 발부했다는 감정사도 함께요. 그림이 보험에 들어있는지도 확인해 보십시오.”

“네? 그건 왜……?”

“만약 담당 형사가 수사를 대충해서 저 그림이 녹아내린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면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그러면 복원전문가는 꼼짝없이 120만 달러를 물어내야 했을 겁니다. 고작 드가의 가짜 그림 값으로요.”

앤드류는 뒤늦게 도윤의 말을 이해하고 안색이 확 변했다.

“게다가 그림을 보험에 들어놨다면 그 돈 외에 따로 보험금까지 수령했겠군요. 피해배상과 보험금 지급은 별개의 일이니까요.”

“그림을 지인에게서 샀다고 했는데, 그 때 주고받은 영수증이나 매매 서류가 있는지 조사해보세요. 설사 서류가 있다고 해도 진위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될 겁니다. 그만한 돈을 현금으로 주고받았을 리는 없으니까 계좌 내역도 살펴보시고요.”

“설마 사기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냥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뿐이에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앤드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닷없이 도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재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현장 경험도 없는 분이 어떻게 사건의 성격을 이렇게 금세 파악하십니까? 이 박사가 범죄자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이, 이 사람아. 범죄자라니? 그건 감사 인사가 아니지. 도윤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손을 슬며시 뿌리쳤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도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앤드류가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순진, 아니 순수한 게 원래 가족 내력이구나. 앤드류는 덩치만 다를 뿐 자기 여동생과 같은 과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드리는 말인데 혹시 사람 하나만 찾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요?”

“네. 삼십 년 전에 보스턴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도윤은 앤드류에게 자신이 잔류 기억에서 봤던 남자의 용모를 설명했다. 당시 나이는 대략 삼십에서 삼십오 세 사이. 검은 머리카락에 각진 턱, 그리고 광대뼈가 약간 돌출된 얼굴을 지닌 중남미 출신의 남자. 그는 남자의 신장과 체중을 어림잡아 불러주면서 마약 관련 전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도윤이 보았던 범인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공범이었던 백인은 당시에도 이미 머리가 반백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반면에 히스패닉 남자라면 이제 경우 육십이 넘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찾기보다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앤드류는 처음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이 박사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삼십년 전의 전과자를 찾습니까? 혹시 개인적으로 연관이 있는 인물인가요?”

도윤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는 케이티에게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한 뒤, 앤드류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삼십년 전에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서 발생했던 미술품 도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이 어쩌면 당시 그림을 훔친 범인일지도 모릅니다.”

앤드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는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한참동안 도윤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앤드류는 가끔씩 도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가 삼십 년 전의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 사람아 나는 삼십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당연히 미국에 살지도 않았고.’

마침내 앤드류가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이 박사가 왜 그 사람을 찾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하지만 설사 원하는 자료를 찾더라도 그냥 보여드리는 정도가 최선입니다. 문서나 디지털, 어떤 형태로도 자료를 직접 드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원래 관할 지역이 아닌 곳의 범죄 기록은 아무리 경찰이라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보스턴에는 마침 제 대학 동기가 형사로 근무하고 있지요. 그 친구에게 한 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지요. 감사합니다.”

앤드류는 전화기를 들더니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통화했다. 그러더니 전화를 끊고 도윤을 자기 책상으로 안내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저쪽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앤드류가 컴퓨터를 켜서 여러 개의 파일을 보여주었다. 모두 열두 명의 얼굴과 신상 기록이 적힌 파일들이었다.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중에 혹시 의심되는 인물과 일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윤은 앤드류가 모니터에 띄워준 파일들을 빠른 속도로 읽으며 넘겼다. 하지만 열두 명의 자료를 모두 살핀 그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없네요. 어쩌면 제가 말한 그 사람이 전과자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과자가 아니면 경찰 기록이 없어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쉽게 됐네요.”

앤드류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도윤의 부탁으로 무리한 일을 벌인 건 맞지만, 내심으로는 그 역시 어쩌면 삼십년 전의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앤드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내일 출국 준비를 위해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예상보다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렀네요.”

“별 말씀을. 저야말로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윤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앤드류에게 작별을 고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하지만 케이티와 헤어져 호텔로 가는 택시를 타는 순간, 그의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파울로 마르케스. 올해 나이 예순 둘. 콜롬비아 메데인 출신. 이미 29년 전에 미국을 떠난 뒤로는 다시 입국한 적이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도난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했다는 얘긴데……. 골치 아프네. 또 콜롬비아까지 가야 하나?’

도윤은 앤드류가 보여준 파일들 가운데서 범인의 것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그 사실을 숨겼다.

앤드류에게는 도움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드너 사건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 이상 공식적으로 그 사건과 연루되는 건 아직 곤란하다. 당장 경찰이 범인의 얼굴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는 과거를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날, 그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이틀이나 늦게 시카고를 떠났다. 서울에 도착해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회포를 풀고 있던 어느 날, 런던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최서라였다.

* * *

본선 3차전이 녹화된 다음날, 드디어 ‘트루쓰 앤 밸류’ 첫 회가 방송됐다. 여덟 명의 본선 참가자를 뽑는 예선전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도윤을 비롯한 지명 참가자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방송 말미에 그들에 대한 짤막한 예고 방송이 있기는 했다.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기 위해 뒷모습이나 얼굴이 가려진 실루엣만 살짝 보여주는 방식으로.

최서라는 인터넷을 샅샅이 뒤진 끝에 미국 TV 방송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냈다. 비록 첫 회에는 도윤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뉴욕보다 다섯 시간이나 빠른 런던의 시차 때문에 그녀는 새벽잠을 설치면서 컴퓨터 모니터 앞을 지켰다.

“사람들 실력이 엄청나네. 도윤 씨가 잘 할 수 있을까?”

파베르제의 능력을 전해 받은 뒤, 예술품을 보는 최서라의 안목은 엄청나게 좋아졌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 발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으로도 도대체 저런 그림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선 참가자들의 솜씨는 뛰어났다.

한 주 늦게 영국에서 정식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을 시청한 장예주 박사의 의견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던데? 출연자들의 대부분이 프로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라더라. 잘 하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이 박사라면 문제없이 우승할 수 있을 거야.”

듀란의 주인인 아이작 듀란의 견해 역시 비슷했다.

“내가 그림 보는 눈은 조금 부족하지만 진짜 실력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던데? 다음 주부터 지명참가자들이 나온다면서? 그 사람들이 나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시카고에서 본선 4차전 녹화가 진행된 다음날, 최서라는 또 다시 새벽에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그냥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편하게 보자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그래도 도윤이 첫 출연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결과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4차전을 끝낸 도윤으로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4강에 진출했다는 전화를 받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래도 경선이 어떻게 치러졌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잠을 설친 보람이 있었다. 첫 본선 무대에서 출제된 문제는 그녀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다른 출연자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선보이면서 완벽한 1등을 차지했다. 마지막에 심사위원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에서는 그녀도 혼자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냈다.

일주일 뒤, 영국의 여러 언론에 ‘트루쓰 앤 밸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본선 1회전이 영국에서 방송되자마자 도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거론되었고, 인터넷에서 그의 사진이 돌아다녔다. 장예주 박사 역시 방송을 보자마자 최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이 박사더라. 게다가 그렇게 스타 기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 서라 씨 긴장해야겠어. 일반 대중들은 어떨지 몰라도 미술계의 젊은 아가씨들한테서는 관심 좀 받겠던데?”

“어머? 이 박사님이 관심을 받으면 받는 거지 제가 왜 긴장을 해요?”

“오호라. 자신 있다 이거지? 하긴 서라 씨 정도면 자신을 가질 만 하지.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 게다가 배경 좋고 지적이고…….”

“내일 시간 있으면 저녁 식사나 함께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비싸고 맛있는 걸로 사 줄 거야?”

“좋은 데로 모실게요.”

다음날, 그녀는 모처럼 장예주 박사를 만나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뒤에도 전날 방송된 트루쓰 앤 밸류 본선 1차전에 대해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장 박사는 얼굴도 모르는 피디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미술품 감정가들이 나오는 방송을 누가 보겠냐 싶었어. 근데 피디가 재주가 좋더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근히 긴장되게 편집을 한데다 마지막에 이 박사가 반전을 꽝 터트리니까 우와,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더라고.”

모처럼 속이 후련해지도록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동안 논문 준비와 세공 기술 연마를 병행하느라 피로가 머리 꼭대기까지 쌓였었다. 그랬던 것이 장박사와 도윤을 화제 삼아 수다를 떨자 몸과 마음이 모두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웠던 기분은, 집에 돌아와 현관문 여는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도둑이 들어와 집을 뒤졌는지 사방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열려 있었고, 옷가지 역시 여기저기 사납게 널브러진 채였다. 주방의 그릇 몇 개는 깨진 채 바닥을 굴러다녔고, 심지어 침대 매트리스는 칼로 온통 난도질을 해놔서 섬뜩할 지경이었다.

최서라는 조용히 문을 열고 도로 집밖으로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전화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어 경찰에 연락을 하고 나니, 당장 오늘 밤 잘 곳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도윤 씨…….”

이럴 때 왜 부모님이나 오빠들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내일 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나? 거기가 아니라 이곳으로 오는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긴장이 사르르 풀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서라 인생에서 가장 무섭고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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