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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52화 (52/300)

52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림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었다. 물론 사회자가 다섯 번째 그림은 우승자 상품으로 선택할 수 없다고 했으니 마크 로스코의 진작은 그것뿐일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누군지 모를 위조범이 그린 위작임이 분명했다. 관객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참가자들이 과연 진위 감정에 성공했을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럼 이번에는 폴리니 씨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폴리니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동시에 모니터에 그의 감정결과가 떴다.

네 번째 그림 - 마크 로스코의 진작, 감정가 1200만 달러.

다섯 번째 그림 -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흉내 낸 위작. 감정가 0원.

관객석에서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폴리니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도윤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여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위 감정에서 실수를 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물론이고 관객들 역시 이번에도 그가 최소한 그림의 진위 여부는 확실히 맞힐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하필이면 승패가 거의 확정된 마지막에 와서 실제 진위 여부와는 정반대의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역전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관객들은 폴리니에게 측은함마저 느끼는 듯했다.

“폴리니 씨. 어, 진실, 아니 진위 판정의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마이크를 든 하이든 박사도 당황했는지 살짝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어진 폴리니의 대답은 여전히 당당하고 간결했다.

“다섯 번째 그림에서는 아우라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네 번째 그림에서는 뜨겁고 신비한 아우라, 보는 사람의 가슴을 고동치게 만드는 강한 빛을 느꼈습니다.”

하이든 박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이어질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폴리니의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이든 박사의 입에 고소가 맺혔다.

“그게 다입니까? 한쪽에서는 아우라가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아우라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 말입니다. 그게 감정 이유의 전부인지를 묻는 겁니다.”

“네. 그게 답니다.”

하이든 박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뒤를 이어 소더비의 까미유가 착잡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 번째 그림의 가격을 1200만 달러로 책정한 것 역시 그것을 마크 로스코의 진품으로 봤기 때문이겠죠?”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비싸다. 지금까지 거래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싸게 팔린 것은 2012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낙찰된 ‘오렌지, 레드, 옐로우’의 8600만 달러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점을 꼽으면 그의 작품이 항상 대여섯 점 이상 들어갈 정도로 마크 로스코는 인기 있는 화가였다. 1200만 달러면 오히려 그의 그림들 가운데는 아주 비싼 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의 진품이고, 작품의 크기와 완성도를 두루 감안했을 때 그 정도의 가격이 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폴리니는 아예 막나가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보니까 딱 그 정도다’라는 식의 말을 던지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폴리니가 감정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던 관객들도 나중에는 그의 태도에 실망한 것 같았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멍한 표정으로 폴리니를 쳐다보던 사회자 페이건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이크를 도윤에게 넘겼다.

“이것으로 폴리니 씨의 발표는 모두 끝난 것 같군요. 자 그럼 이제 이도윤 박사의 감정 결과를 확인할 시간입니다. 보여주시죠.”

모니터에 지체 없이 도윤의 감정 결과가 떴다. 그 순간, 관객석 여기저기서 ‘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이 수군대며 예상치 못한 결과에 술렁이고 있을 때,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입을 꾹 다문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네 번째 그림 - 마크 로스코의 진작, 감정가 1400만 달러.

다섯 번째 그림 -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흉내 낸 위작. 감정가 0원.

네 번째 그림에 대한 감정가만 약간 더 높을 뿐, 전체적으로 폴리니와 똑같은 감정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폴리니 때와 같을 수가 없었다.

“어, 이 박사도 네 번째 그림이 마크 로스코의 진작이라고 감정하신 겁니까?”

사회자가 진행을 위한 멘트를 하기도 전에 브렌트 교수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놀라움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네. 네 번째 그림이 마크 로스코의 진작이고, 다섯 번째 그림은 네 번째 그림을 흉내 낸 위작입니다. 다섯 번째 그림이 개인 소장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분이 처음부터 위작을 진작으로 잘못 알고 매입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잠깐만요.”

소더비의 까미유가 급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다섯 번째 그림은 그렇다 쳐도, 네 번째 그림은 저희 소더비에서 화랑을 통해 구입했다가 위작으로 판명되어서 보관하고 있던 거예요. 이미 전문가들의 감정이 끝난 그림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 박사는 지금 그게 사실은 위작이 아니라 진작이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게 제 감정 결과입니다.”

까미유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벌린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하이든 박사가 나섰다.

“저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의 감정결과이군요.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리뭉실한 얘기 말고 되도록 저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곤란하다고요?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말입니까?”

“제대로 입증하려면 굉장히 복잡한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열 가지 이상의 단색광을 쏠 수 있는 분광 카메라와 데이터를 분석할 성능 좋은 컴퓨터 같은 것 말입니다.”

하이든 박사가 말을 멈춘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설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도 최대한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그거라도 듣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마크 로스코는 앞서 소개되었던 윌리엄 헌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종교적인 화가였습니다. 그는 특정 종교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명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깨달음을 중시했죠. 그래서 그런지 로스코의 그림을 감상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그림을 통해 종교적 체험을 했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게 진위 판정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네 번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캔버스의 붉은 색상을 통해 뜨겁게 타오르는 거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섯 번째 그림에서는 화가의 정신적 깊이가 전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지요. 그건 그저 적당히 물감을 칠한 캔버스일 뿐입니다.”

하이든 박사가 답답한 듯 목에 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데, 도대체 이 박사는 네 번째 그림에서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림을 통해서 느껴지는 내면적 감동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건 정말 붓질의 미세한 차이와 색과 색의 경계선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긴장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결국 이 박사의 주관적인 느낌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군요.”

“원하신다면 그림을 다중분광 영상법으로 검사할 수 있습니다. 로스코는 관람자들이 신비한 느낌을 얻게 하기 위해 다른 색의 물감들을 여러 겹 밑칠한 뒤, 그 위에 원하는 색깔을 다시 입히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빨간 색으로 칠해진 그림을 보면서도 거기서 단순한 빨강 이외의 느낌을 받게 되죠. 막연한 느낌이기는 하지만요.”

“위작은 다르다는 말입니까?”

“위작은 아마 처음부터 한 가지 색의 물감만을 사용했을 겁니다. 그들의 목적은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데 있으니까요.”

다중분광 영상법은 특수하게 고안된 분광 카메라를 이용해서 그림을 여러 차례에 걸쳐 스캔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그림을 파괴하지 않고 캔버스에 칠해진 여러 겹의 색상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도윤은 내 말을 믿던가, 아니면 복잡한 장비를 동원해서라도 그림을 다시 검사해보라고 얘기한 것이다. 그것도 싫으면 당신들도 그냥 본인들이 원하는 결론을 고수하던가.

물론 지금 당장 무대 위로 그런 장비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다. 설사 가져온다고 해도 다중분광 영상법은 무대 위에서 삼십분 만에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검사가 아니었다. 진위 감정에 대한 도윤의 얘기는 끝났고, 이제 공은 심사위원들에게로 넘어갔다.

심사위원들이 마이크를 끈 채 예정에 없던 짧은 논의를 시작했다. 그들의 논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윤은 옆에 서 있는 폴리니를 힐끗 쳐다봤다.

‘아우라를 볼 수 있는 게 확실하군.’

그의 신안에도 네 번째 그림에서는 환상적인 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인 반면에 다섯 번째 그림에서는 아무런 빛도 느껴지지 않았다. 폴리니도 같은 것을 본 게 분명했다.

사실 그림을 감정하는 내내, 도윤은 어떡하든 안목 감정만으로 두 그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그만큼 두 그림이 겉으로는 차이를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흡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폴리니는 서슴지 않고 도윤과 똑같은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그가 정말로 신기에 가까운 찍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진짜로 아우라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심사위원들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무려 5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알랭 피디와 사회자들은 갑자기 발생한 생방송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마침내 짧으면서도 긴 논의가 끝나고 메트로폴리탄의 하이든 박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저희 심사위원들로서는 현재까지 그림의 진위에 대한 기존의 감정 결과를 바꿀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두 분의 감정은 일단 잘못된 것으로 판정하겠습니다.”

관객석에서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 나올 때, 하이든 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지금까지 보여준 두 분의 감정 실력을 인정해서, 이 방송이 끝난 뒤에 두 그림 모두에 대해 말씀하신 다중분광 영상법을 이용한 재검사에 착수할 것을 약속드리죠. 어차피 로스코의 그림에 대해서는 두 분 모두 유사한 결론을 제출하셨기 때문에 오늘의 심사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야유가 순식간에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바뀌었다. 하이든 박사가 제시한 대안을 관객들이 인정한 것이다.

도윤도 하이든 박사의 입장을 이해했다. 아무리 폴리니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감정 솜씨가 뛰어났다고 해도, 쇼 프로그램 무대 위에서 확실한 근거도 없이 제기된 주장을 덥석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이 박사께서 그림의 가격을 1400만 달러로 책정한 것도 기존의 시세를 참조한 겁니까?”

까미유 박사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간단히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발표가 끝났다. 잠시 광고를 위한 휴식 시간이 주어진 후 다시금 생방송이 이어졌다. 심사위원들이 넘겨준 채점표를 받아든 리키가 도윤과 폴리니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결과를 발표했다.

“트루쓰 앤 밸류의 최종 우승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승자는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이 주신 점수를 모두 더해 총점 92.3점을 받으셨네요. 지금까지 나온 점수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군요.”

리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오늘의 주인공. 트루쓰 앤 밸류의 최종 우승자는 한국에서 온 젊은 천재. 감정의 신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바로 그 분입니다. 축하합니다, 이도윤 박사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무대 위에서는 폭죽이 터지면서 반짝이는 꽃가루가 사방에 휘날렸다. 도윤은 가장 먼저 옆에 서 있던 폴리니에게 악수를 청했다.

“폴리니 씨를 알게 돼서 기쁩니다. 덕분에 즐겁고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굳은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던 폴리니도 그의 눈빛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등감 때문에 계속 못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로서도 도윤의 실력을 완전히 부정할 도리는 없었다.

이어서 꽃다발을 들고 온 사회자들과도 악수와 포옹을 나눈 도윤이 무대 한가운데로 나와 마이크를 들었다.

“감정가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참 좋은 직업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남이 얼마나 잘했는지를 평가하는 게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거꾸로 제가 얼마나 잘 했는지를 심사받았네요. 이제야 비평가들의 평에 가슴 졸이는 화가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프로그램을 쭉 지켜보신 분들은 이미 잘 아시겠지만 뉴욕은 물론이고 미국 곳곳에는 엄청나게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처럼 제대로 감상하고 있는지 평가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마음 편하게 미술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거기엔 명품 백이나 고급 시계보다 훨씬 비싼 것들이 즐비합니다. 부디 수많은 천재들이 만들어낸 걸작들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도윤의 수상 소감이 끝나자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들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순서가 끝나자 카메라가 다시 도윤의 얼굴을 잡았다. 페이건이 아직 무대 중앙을 떠나지 않은 그에게 물었다.

“자, 이제 정말 마지막 순서인데요.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트루쓰 앤 밸류’의 우승자에게는 지금까지 출제되었던 그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승자가 선택한 그림은 2월에 있을 소더비 경매에 올라가게 되죠. 물론 오늘 출제된 그림들 가운데 일부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겠지만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페이건이 관객석과 심사위원석을 한 바퀴 쭉 돌아보았다.

“자, 이도윤 박사님. 박사님이 경매에 올리고 싶은 작품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어디선가 출정을 앞둔 병사들을 재촉하는 듯한 드럼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를 든 채 잠시 뜸을 들이던 도윤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저는 오늘 출제된 그림들 가운데 네 번째로 나온 작품. 제가 마크 로스코의 진작이라고 감정했던 그 그림을 선택하겠습니다.”

팡파레와 함께 무대 뒤의 모니터에 로스코의 그림이 비춰졌다. 심사위원들, 그중에서도 까미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도윤의 선택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두 달 가까이 끌어오던 쇼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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