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53화 (53/300)

53화

<9.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벌써 세 번의 폭격이 있었다. 5월 11일과 6월 15일, 그리고 바로 어제인 8월 5일까지.

미군 폭격기들이 한 번씩 하늘을 메우며 지나갈 때마다 그 아래의 땅들은 불지옥으로 변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들의 절반가량이 소이탄이었다. 부수고 태우자. 미군들은 마치 바퀴벌레나 개미소굴을 소탕하듯이 도쿄와 오사카, 그리고 고베와 나고야를 박살냈다.

“주인어른!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고요. 공습이 또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제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간 뒤부터 계속 저 소리다. 아직 날도 완전히 밝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 너무 시끄럽잖아. 늙은이는 새벽잠이 없다더니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야마모토 코야타는 처음에 실소를 내뱉다가 나중에는 아예 낄낄거리며 대놓고 웃어젖혔다. 늙은 충복 아오키가 그런 그를 걱정이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집안 식솔들은 이미 어제 모두 죽거나 도망쳤다. 남은 것은 평생 이 집을 위해 일하다가 허리마저 굽은 노인네 한 명뿐.

한참을 웃다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차분한 절망.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고? 도망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살아서 뭐할 건데? 세상이 온통 들불이 핥고 지나간 황무지처럼 변해버린 마당에.

“아오키. 이리 와라.”

야마모토가 손짓하며 부르자 아오키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칠십이 다 된 노인네.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했는데 험한 일을 하며 살아온 영감치고는 목숨이 질긴 편이다. 늙으면 오히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고 했던가? 아마 그 말이 맞을 거다. 그러니 저 노인네도 지옥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 궁리를 하는 거겠지.

“이걸 가지고 가거라.”

야마모토는 자기 방에 걸려 있던 그림을 손수 떼어 두꺼운 종이로 포장한 뒤 아오키에게 건네주었다. 고흐의 다섯 송이 해바라기. 혹은 여섯 송이 해바라기. 조그만 해바라기 한 송이는 꽃병이 놓인 테이블 위에 엎어지듯 쓰러져 있어 개수로 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파리에 있을 때 친구 무시야노코지로부터 1만 엔에 사서 일본으로 가져온 그림이었다.

“이게 뭡니까? 이걸 가지고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아오키가 불안한 눈빛으로 액자를 받아들며 물었다.

“아들 내외가 고베에 산다면서? 집이 온통 엉망이라 다른 건 줄 게 없구나. 그러니 이거라도 들고 고베로 가거라. 삼십년 전에 만 엔을 주고 산 것이니 나중에 팔면 꽤 돈이 될 거야. 평생 우리 집안을 위해 수고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주인어른은요? 제가 주인어른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씀입니까? 그러지 말고 저하고 같이 가세요. 여기 있다가는 위험하다니까요.”

야마모토가 늙은 아오키의 손을 꼭 쥐더니 씩 웃었다.

“선장은 죽을 때까지 배를 지키고, 당주는 무너지는 집을 버리지 않는 법이다. 너는 일단 고베로 피신했다가 혹시 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다시 찾아오너라.”

아오키가 굽은 허리를 억지로 펴서 주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죽을 각오를 했구나. 그제야 그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야마모토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오키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림은 절대로 팔지 않고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세요. 늙은 몸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요.”

평생 줄에 매여 살아온 짐승은 구속을 풀어주어도 도망가지 못한다더니. 너도 그런 게냐? 야마모토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마당을 나서는 아오키의 굽은 등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돌아와 봐야 찾아볼 흔적조차 없을 테니까.

아오키가 떠나고 두어 시간 뒤, 히로시마 상공에 미군 B29 폭격기 한 대가 떴다. 잠시 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버섯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 때, 오사카와 고베 일대에 미군이 네 번째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야마모토의 집이 있는 아시야 현은 고베와 오사카의 중간에 위치했지만, 미군 조종사들에게는 그냥 다 같은 일본 땅에 불과했다. 가을날 잠자리 떼 같던 미군 폭격기들이 하늘에서 사라졌을 때, 지상에서도 살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야마모토도, 그의 집도, 그리고 집주인이 미처 옮길 수 없었던 수많은 미술품들도.

* * *

방송이 모두 끝났는데도 ‘트루쓰 앤 밸류’는 오히려 전보다 더 화제가 됐다. 결승전에 나왔던 두 점의 그림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마크 로스코의 진작인지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에서는 ‘트루쓰 앤 밸류’ 결승전을 문화면 톱기사로 다루었고, 한국 방송에서도 도윤이 마지막에 네 번째 그림을 선택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도윤은 생방송이 끝난 뒤에도 각종 인터뷰에 응하느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뒤늦게 샤워를 마치고나서 전화기를 확인하자 각종 축하 문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의 번호를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보낸 것 같았다. 개중에는 한국 언론사들에서 보내온 인터뷰 신청도 여럿 있었다.

시차를 따져보니 서울은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먼저 부모님께 간단하게 우승 소식을 전한 뒤 최서라의 번호를 눌렀다. 그녀는 지금 짧은 겨울 방학을 이용해 잠시 서울에 와 있는 상태였다.

“도윤 씨 정말 축하해요. 저 본방 사수했어요. 당연히 도윤 씨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한 거 있죠? 멋있게 잘 하셨어요.”

이 여자도 이렇게 흥분해서 수다를 떨 줄 아는구나. 도윤은 늘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가 갑자기 참새처럼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모습도 그 나름대로 또 신선한 매력이 있었다.

“도윤 씨가 고른 그림이 소더비의 2월 정기 경매에 나온다고 했죠? 그림이 팔리면 도윤 씨 부자 되겠네요. 서울에 오면 미리 한 턱 내세요.”

최서라는 도윤이 고른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진작일 거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런던 크리스티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그녀는 도윤의 안목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아니더라도 결승전까지 가는 동안 그가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그를 ‘감정의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결승전에서 사회를 맡았던 리키가 잠시 언급했던 말이 어느새 그의 별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윤은 최서라의 설레발에 짐짓 한 발을 뒤로 뺐다.

“아직 확정된 거 아니에요. 일단 소더비 측에서 재감정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결과를 기다려봐야죠. 진작으로 판명된다고 해도 실제 경매에서는 얼마에 팔릴지도 모르고요.”

“에이, 도윤 씨가 진작이라고 감정했는데 결과는 보나마나 뻔하죠. 1400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한 백육십 억 되나요?”

“그렇기는 한데 그걸 다 제가 받는 건 아니에요. 소더비에서 경매 수수료로 낙찰가의 12% 정도를 떼어갈 거고, 미국에서 얻은 수익이니까 여기서 세금도 내야 해요. 이것저것 제하면 제가 가질 수 있는 건 백이십 억 정도 될 거예요.”

“에이, 그게 어디에요. 아무튼 서울 오면 그 돈의 십분의 일만 쏘세요. 저도 이 기회에 배가 터지도록 먹어보게요.”

도윤은 최서라의 배포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날씬한 배로는 백분의 일이 아니라 만분의 일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자 새삼 이번 쇼에 참여한 대가로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승 상금인 십만 달러나 그 동안 받았던 출연료도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합해도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경매에서 팔릴 경우 벌게 될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는 경매가 성사될 경우 판매자와 구매자 양쪽으로부터 낙찰가의 12~20퍼센트에 이르는 금액을 수수료로 받는다. 미술품 판매는 주식 매도와 똑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판매자가 그 돈을 다른 미술품을 구입하는데 쓸 경우 세금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도윤은 판매 수익금을 한국으로 가져갈 생각이기 때문에 과세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 정도 돈이면 서울 가서 집을 사도 몇 채는 사겠다.”

결승전 때 그가 로스코의 그림에 매긴 가격은 1400만 달러였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위작이 진작으로 둔갑하는 깜짝쇼를 연출하면서 해당 작품은 지금 화제의 중심에 놓인 상태였다. 덕분에 실제 경매에서는 도윤이 책정했던 것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림의 가격은 인지도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재감정을 통해서 그림이 진작으로 밝혀진 뒤의 일이겠지만.”

소더비가 일부러 재감정을 아무렇게나 할 걱정은 없었다. 그 작품은 소더비에서도 어차피 위작으로 알고 있던 그림이었고, 진작으로 팔릴 경우 INB와 후원사들이 금액을 분담해서 물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소더비로서는 그림이 팔릴 경우 경매 수수료는 물론이고 다른 후원사들이 내는 분담금까지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익이 보장된 셈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잭팟을 터트린 셈이지. 이번엔 진짜 운이 좋았어.”

살면서 이런 일이 몇 번만 더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 * *

다음날 아침, 도윤이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방으로 올라오려는데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일라 아트 갤러리(Naila Art Gallery)? 이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건데?”

잠시 후 전화기가 울렸다. 문자를 보낸 사람인 것을 확인한 도윤은 일단 전화를 받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스카웃 제의였다. 높은 연봉을 포함해서 주택과 항공권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건만 보면 괜찮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묵묵히 상대방의 얘기를 듣던 그는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표시했다.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한국에 있는 현소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갤러리라 현재로서는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상대방은 호텔로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건 절대 사양이었다. 설사 현소 갤러리가 아닌 다른 곳에 취직할 생각이 있다고 해도 사막 한 가운데서 일할 생각은 없었다.

도윤이 나일라 아트 갤러리의 제안을 거절한 몇 시간 뒤, 이번에는 준우승자인 폴리니가 자신을 찾아온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저보고 사우디아라비아로 오라고요?”

폴리니는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제안이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가 호텔 로비의 카페에서 마주 앉은 사람들은 중동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그들이 내민 명함에는 ‘나일라 아트 갤러리’라는 미술관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폴리니가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자신을 살만 알 오타이프라고 소개한 사십대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관장님이 ‘트루쓰 앤 밸류’의 애청자셨어요. 그분은 우승을 차지한 이도윤 박사보다 폴리니 씨의 안목을 훨씬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폴리니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입에 걸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니까 저를 이 갤러리의 서양화 부문 감정가로 초대하겠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나일라 아트 갤러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훌륭한 미술관입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왕세제인 이브라힘 전하의 후원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혹시 그 분의 이름은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봤습니다. 최근 십년 사이에 미술 시장의 큰 손으로 새롭게 등장하신 분이죠.”

“이름을 들어보셨다니 이야기를 하기가 편하겠군요. 이브라힘 전하는 현재 세계 각국의 뛰어난 미술품들을 굉장히 공격적으로 수집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폴리니 씨가 그분이 구입하기를 원하시는 서양 미술품들을 철저하게 감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폴리니는 슬쩍 발을 뺐다. 나일라 아트 갤러리는 폴리니도 이름을 들어본 곳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가장 큰 미술관인데다 살람의 말마따나 지난 십 년 사이에 소장품들을 계속 늘려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의 찌는 듯한 날씨가 문제였다. 주변이 온통 사막으로 둘러싸였다는 것도 문제지만 술도 마시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이슬람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곳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지금도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는 낭만주의자였다.

그가 선뜻 제안에 응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살만이 자신의 명함을 한 장 더 꺼내더니 뒤에다 뭔가를 적어서 보여주었다.

“만약 폴리니 씨가 나일라 아트 갤러리로 오시면 받을 수 있는 연봉입니다. 리야드에 오시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주택을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아울러 일 년에 두 번씩 이탈리아에 다녀올 수 있는 왕복항공권을 드리지요. 물론 퍼스트클래스입니다.”

명함을 힐끗 살핀 폴리니의 얼굴이 굳었다. 살만이 제시한 금액은 그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받는 돈의 두 배가 넘었다. 게다가 상대는 주택과 항공권까지 제공하겠다고 했다. 폴리니는 은근히 마음이 동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저 돈이면 몇 년만 고생해도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에 충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명함을 집어 지갑 안에 넣었다.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며칠만 시간을 좀 주시지요. 제가 언제까지 대답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저희야 되도록 빨리 답변을 주실수록 좋지요. 언제까지나 마음 편하게 미국에 머무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요. 물론 저희가 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연락을 주셔도 되지만, 이왕이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계약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연락을 드리죠.”

살만 일행이 돌아간 뒤, 폴리니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인터넷을 뒤져 나일라 아트 갤러리에 대해 알아봤다. 미술관은 건실했고, 조건도 만족스러웠다. 미술관이 위치한 장소가 사우디아라비아만 아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건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사흘 뒤, 폴리니는 결국 살만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전했다. 살만은 그날 저녁 곧바로 계약서를 들고 다시 호텔로 찾아왔고, 폴리니는 흔쾌히 거기에 사인했다.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정리할 게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게 끝나면 곧바로 리야드로 가겠습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리니는 환하게 웃으며 살만과 악수를 나눴다. 당장 아랍어부터 배워야겠군. 그가 계약서를 챙겨 호텔을 나서는 살람의 뒷모습을 보며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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