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도윤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트루쓰 앤 밸류’ 결승전이 끝난 사흘 뒤였다. 그는 뉴욕을 떠나기 전에 소더비의 까미유를 비롯한 그곳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까미유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철저하게 재감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차피 그 그림이 진작으로 밝혀지면 소더비로서는 큰 이익을 보는 셈이에요. 말씀하신 다중분광 영상법도 사용할 테니까 서울로 돌아가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세요.”
까미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도윤이 슬쩍 물어봤다.
“다른 그림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위작이라고 감정했던 개인 소장품 말이에요.”
그의 질문에 까미유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림은 소장자가 재감정을 거절했어요. 저희가 재감정을 제안해 봤는데, 이미 진작임이 확인된 작품이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집을 피우더라고요.”
“그 양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불만이 많겠네요?”
까미유는 그냥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도윤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언제 누구를 통해 구입했는지는 몰라도, 로스코의 그림을 진작이라고 생각하고 샀다면 적어도 몇 백만 달러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윤이 그것을 위작이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잘못하면 그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게 생긴 셈이다.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그림의 주인은 지금쯤 도윤에게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까미유와 악수를 나눈 뒤 서울로 돌아온 도윤은 또 다시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다들 도윤을 만나면 그의 활약을 칭찬하는 한편, 슬그머니 청탁을 넣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그림을 사게 되면 이 박사가 꼭 감정을 해줬으면 좋겠어.”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도윤은 해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아시다시피 현소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정이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현소 갤러리로 연락주세요. 최선을 다해 감정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요즘 지명도가 높아진 덕분에 감정료가 제법 세졌을 거라는 건 아시죠? 도윤으로서는 들어오는 감정 의뢰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른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인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최서라와도 몇 번 데이트를 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미술관을 관람하고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팝콘을 나눠먹기도 했다. 그 사이에 석훈을 만나 녀석의 술주정을 받아줘야 했던 것은 덤이다.
최서라의 경호원으로 채용된 조민아는 이번에 그녀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런던에 그대로 머물렀다. 한국에서까지 최서라를 밀착 경호할 필요가 없기도 했거니와,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런던을 구경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덕분에 도윤은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석훈의 투정을 받아줘야 했다.
“야, 인마. 그래봤자 1년이야. 아니지? 서라 씨가 내년 8월이면 졸업이니까 빠르면 8개월만 기다려도 될지 몰라.”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말하시네. 형은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며 지내는 일 년이라는 게 얼마나 길고 험한 시간인 줄 모르죠? 그런 거 보면 사람이 참 인정머리가 없어.”
“야, 조민아 씨 취직시켜달라고 부탁한 게 너 아니었어? 기껏 일자리 구해줬더니 뭐 인정머리? 이 자식이 진짜 고맙다는 얘기는 안 하고…….”
“그거야 당연히 한국에서 취직시켜달라는 얘기였죠! 누가 런던까지 보내버릴 줄 알았나?”
“얼씨구? 그럼 너도 비행기 타고 영국으로 가든가. 너 여기서 당장 할 일도 없잖아?”
“영어가 안 되잖아요, 영어가! 두고 보쇼. 그렇잖아도 나도 요즘 열심히 영어 공부 하고 있으니까. 내가 더러워서라도 한 십 개 국어쯤 떼든지 해야지…….”
네가 영어로 아침 인사도 제대로 하기 전에 조민아 씨가 먼저 돌아오겠다.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녀석이 원하는 대로 술을 사줬다. 그림 팔아서 한 턱 내려면 최서라가 아니라 이 자식이 더 걱정되네.
도윤이 서울에서 나름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최서라로부터 또 다시 연락이 왔다. 그녀가 런던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이었다.
“도윤 씨 혹시 오늘 시간 좀 되세요?”
“저요? 저야 남는 게 시간인데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하고 고모님께서 도윤 씨를 좀 봤으면 해서요.”
뭐? 아니 이 아가씨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네? 벌써 어른들한테 인사를 시키려고?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자고 한 것은 손녀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최근에 갑자기 유명해진 젊은 천재 감정가였다.
미래 그룹의 최인탁 회장이 도윤을 부른 곳은 청파 갤러리 관장실이었다. 도윤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 관장실로 들어가자 호호백발의 노인이 상석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이곳의 관장 최수아 여사가 배석해 있는 게 보였다.
“현소 갤러리의 이도윤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도윤이 배에 힘을 꽉 주고 인사를 하자 최인탁 회장이 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가 자리에 앉고 비서가 차를 내오자 최 회장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요즘 미술계에 젊은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이 박사가 후기 인상파를 전공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래서 말인데 혹시 고흐의 해바라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오?”
“고흐의 해바라기라면…….”
“나마타 보험이 가지고 있는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말이오. 그게 시장에 나왔다는구먼.”
“네? 그게 정말입니까?”
도윤은 정말 깜짝 놀랐다. 그건 매물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는 지금까지 일본을 몇 번 간 적이 있다. 하지만 도쿄에는 딱 한 번 들렀을 뿐인데 하필이면 그때 나마타 갤러리가 내부 수리를 위해 휴관 중이었다. 그래서 거기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이 나마타 보험이 망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시장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도윤이 놀라는 모습을 본 최수아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나마타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는 나마타 보험이 요즘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나 봐요. 그래서 갤러리가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대거 내놓았어요. 청파 갤러리도 그 그림들에 관심이 있는데, 특히 고흐의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를 꼭 사들이고 싶어요.”
고흐의 해바라기를 사겠다고? 도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추정 가격만 해도 1억 달러, 원화로는 1200억이 넘을 거라고 예상되는 고가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걸 미래 그룹, 아니 청파 갤러리에서 사겠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된다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사들였던 어떤 서양 미술품보다도 비싼 그림이 되는 셈이었다.
* * *
고흐의 그림은 수집가나 감정가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림 자체가 대부분 고가인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품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흐는 살아생전 동생인 테오에게 7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마다 동생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이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최근에 그린 그림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가 첨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편지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덕분에 후대의 사람들이 고흐가 평생 어떤 그림들을 그렸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고흐의 편지에서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그림은 그의 화풍을 흉내 낸 모작이거나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흐의 해바라기가 시장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도윤은 두 사람의 의도를 대충 짐작하면서도 이야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인탁 회장이 최수아 관장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진짜 용건을 꺼냈다.
“일본에 있는 고흐의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에 위작 논란이 있다는 걸 이 박사도 알 거요. 그래서 나는 그림을 사기 전에 먼저 진작인지의 여부를 확실하게 따져봤으면 좋겠소. 그래서 말인데, 이 박사가 일본에 가서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고 의견을 말해줄 수 있겠소?”
도윤은 잠깐 고민했다. 좋은 제안이다. 아니, 감정가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받아들여야 할 만큼 멋진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짚을 걸 짚기로 했다.
“나마타 갤러리에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는 본래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그림이었습니다. 크리스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믿을만한 중개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죠.”
“나도 그건 알고 있소.”
“2002년 4월에 네덜란드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서 문서를 하나 내놨죠. 그 문서에는 문제의 그 그림이 원래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소장품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야마타 보험의 해바라기가 진작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지.”
“그런데도 위작일 가능성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방안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도윤은 두 사람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결국 최 회장 대신 최수아 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와 아버님은 몇 년 전에 일본에서 그 그림을 직접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물감의 색감이 다른 해바라기 그림과 다르더군. 해바라기가 꽂힌 화병에 고흐의 서명도 없었고 말이오. 이 박사도 알겠지만 고흐는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그릴 때 ‘Vincent’라는 서명을 반드시 남겼소. 화병에 말이오. 다른 그림들은 다 그랬지.”
최인탁 회장이 최수아 관장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눈치를 보니 고흐의 해바라기를 꼭 갖고 싶다는 욕망 못지않게, 그림에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은 게 분명했다. 최 관장뿐만이 아니라 최 회장 역시 원래 그림에 관심이 많았구나. 도윤은 청파 갤러리가 그렇게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심정은 이해했지만, 도윤은 최회장의 ‘감’에 섣불리 장단을 맞춰주지 않기로 했다.
“말씀하신 건 위작을 의미하는 핵심적인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액자의 크기도 다른 해바라기보다는 조금 컸소.”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차이점에 불과합니다.”
최 회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본 최수아 관장이 다시 끼어들었다.
“저희도 이 박사가 말하는 뜻을 모르지는 않아요. 그래도 우리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원화로 천억이 넘는 그림이잖아요. 그런 고가의 그림을 구매하는 마당이니까 조그만 의문점이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게 청파 갤러리의 생각이에요.”
“감정 결과가 위작으로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어떤 결론이 나와도 좋으니까 이 박사가 수고를 좀 해 주세요. 서라가 이 박사라면 그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백퍼센트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을 거라고 몇 번이나 강조를 하더라고요. 저희는 이 박사를 믿기로 했어요.”
최 관장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최 회장이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최 관장은 몰라도 저 할아버지는 나를 완전히 믿지 않는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의뢰를 맡기로 하죠. 대신 감정료는 삼천만 원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도윤은 일부러 세게 질렀다. 보통 그림 한 점 감정하고 받는 돈은 진위 감정의 경우 백만 원을 넘기지 못한다. 물론 가치 감정까지 겸할 때는 감정료가 그림의 가격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림의 시세가 20억 원 이상이라는 감정 결과가 나와야 오백만 원 정도를 더 받는다. 그런데 도윤은 한꺼번에 삼천만 원을 부른 것이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감정가가 너무 큰 액수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최 회장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특별한 부탁을 할 때는 공식적인 감정료보다 더 주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고 본 것이다.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닌가?”
이 양반, 한국에서 한 손가락으로 꼽힐 만한 재벌 기업 총수가 쪼잔하기는.
“일본까지 다녀와야 하는 출장 감정 아닙니까? 게다가 요즘 제 몸값이 조금 올라서요.”
“아무리 몸값이 비싸졌기로서니, 게다가 일본이 어디 미국쯤 되는 먼 나라도 아니고…….”
최 회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순간 최수아 관장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조카딸이 눈앞의 청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최서라가 그토록 열심히 도윤을 추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평생 돈 아쉬운 줄 모르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도윤의 배포가 돈을 밝히는 태도라기보다는 귀엽게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비서실에 계좌를 알려주시면 오늘 중으로 천만 원이 송금될 거예요. 나머지는 감정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림을 제대로 감정하려면 되도록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나마타 갤러리 측에 연락해서 양해를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내놓은 그림들에 대해서는 열흘 뒤부터 공개적인 프리뷰에 들어갈 거예요. 하지만 미리 구매 의사를 밝힌 VIP들에게는 그전에도 개별 감정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어요. 나마타 측에는 제가 연락을 해 놓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서 준비가 되는 대로 곧장 일본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도윤은 두 사람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관장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최 회장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거, 젊은 친구가 생각보다 돈을 밝히네? 일본에 며칠 잠깐 다녀오는 걸로 삼천만 원이나 달라고 하다니. 요즘 좀 유명해졌다고 너무 콧대가 올라간 거 아니야?”
최수아 관장이 웃으면서 최 회장을 달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라가 적극 추천한 감정가잖아요. 얼마 전에 ‘트루쓰 앤 밸류’라고 전 세계 감정가들을 모아놓고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도 우승했대요.”
“에잉, 쯧쯧. 요즘 젊은 녀석들은 너무 맹랑해. 고학 이인하 선생 후손이라고 했나?”
“네. 알아보니까 고학 선생님 못지않을 정도로 감정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에서 활약한 덕분에 감정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모양이에요.”
“감정의 신은 무슨? 고학 선생이야 생전에 신안을 지녔다고 할 만큼 뛰어난 수집가셨는데 어떻게 거기다 갖다 대? 후손이라고 했으니까 그 양반 반만큼이라도 해 주면 좋겠군.”
“조태석 교수님도 믿을만한 청년이라고 했어요. 그분이 웬만해서는 그런 얘기 안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저도 다 알아보고 부른 거니까 일단 믿고 맡겨보세요.”
최 회장은 계속 혀를 차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최수아 관장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젊은이가 잘해 줘야 서라 입지도 올라갈 텐데……. 잘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