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나마타 보험의 본사 건물은 도쿄의 중심가인 시부야 한가운데에 있었다. 도윤과 석훈은 미리 예약해 두었던 호텔에 짐을 푼 뒤 곧바로 나마타 보험으로 향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가지고 있는 나마타 갤러리가 본사 건물 내에 있기 때문이다.
“형, 시간도 그런데 점심부터 먹고 가죠?”
석훈이 배가 고프다며 칭얼댔지만 도윤은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종놈이 말이 많구나. 배는 일을 끝낸 뒤에 채워도 늦지 않다.”
“에이 씨 진짜.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굶으면서 일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굶긴 왜 굶어? 나마타 보험이 여기서 멀지 않아. 감정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일부터 끝내고 먹어도 충분해.”
“어? 그거 최소한 삼십분 이상 걸리는 거 아니었어요? 형 방송에 나가면 늘 그랬잖아요.”
“그땐 시세 감정도 해야 하고 그림 자체가 감정하기 까다로운 것들만 나왔었잖아. 여기서는 고흐의 해바라기 하나만 감정하면 되니까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야.”
실제로 도윤은 길어야 한 시간 안에 일이 끝나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나마타 갤러리에 도착하자 상황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미래 그룹에서 사전에 연락을 해둔 덕에 두 사람이 나마타 보험 건물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자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갤러리 직원이 로비까지 직접 내려왔다.
“연락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두 사람은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곧바로 갤러리가 있는 27층으로 이동했다. 이미 폐관 절차를 밟고 있는 터라 갤러리 내에는 일반 손님이 하나도 없고 직원이나 구매 희망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만 전시된 작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저희 갤러리의 자랑인 작품들이죠.”
직원이 가리킨 곳에는 세 점의 유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원래는 그림 전체를 유리벽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제거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다시 유리벽을 씌운 상태였다. 가운데 있는 제일 큰 그림이 문제의 해바라기였고, 그 왼쪽에는 세잔의 정물화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폴 고갱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도윤은 직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한 뒤 그림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그림을 살피기 시작하자 두 사람을 안내했던 직원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아마 손님들의 감상, 혹은 감정을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따로 받은 듯했다.
“이게 그렇게 비싼 그림이에요? 1억 달러쯤 한다면서요?”
도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고흐의 해바라기를 살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석훈이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는 그림에서 한 발 물러나서 양쪽에 있는 세잔과 고갱의 그림까지 모두 살피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해바라기는 1987년도에 나마타 보험이 4000만 달러에 낙찰 받았어. 런던 크리스티 경매였는데, 당시만 해도 구매자가 일본 사람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크게 화제가 됐었지. 지금은 시세가 두 배 이상 올랐다는 얘기가 있으니까 다시 경매에 나오면 최소한 8000만 달러는 가볍게 넘길 거야. 1억 달러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어.”
석훈이 입을 떡 벌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 참 웃기네. 아니 기껏해야 꽃 그림인데 이런 걸 무슨 천억이나 주고 사요?”
“해바라기뿐만이 아니야. 양옆에 있는 세잔과 고갱의 그림도 경매에 나오면 천만 달러를 가볍게 넘길걸?”
“아니 사람들이 미친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큰돈을 내면서까지 이런 그림들을 사려고 하는 거예요. 정말 이해 안 되네.”
“기껏해야 돌멩이나 손목시계에 불과한 것에도 수십억씩 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야. 비싸봤자 휴대폰 액정 시계보다도 정확하지 않은 건데. 내 손에 돈이 있고, 난 그 돈을 주고라도 저걸 사고 싶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어?”
“수십억씩 하는 돌멩이요? 그렇게 비싼 돌멩이도 있어요?”
“다이아몬드. 비싼 건 몇 천 억씩 하는 것도 있어.”
석훈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녀석의 그런 눈빛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도윤이 심각한 얼굴로 한참 동안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불렀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살 때 받은 서류들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상했던 요구인지 직원이 제꺽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서류를 보려면 사무실로 가셔야 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막 돌아서려는 직원을 도윤이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리고 저 그림이 고흐 동생 테오의 소유였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가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직원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서류는 저희 게 아니라 네덜란드에 있는 고흐 미술관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복사본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원하신다면 그거라도 보여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따라오시죠.”
도윤이 앞장서는 직원을 따라가자 석훈이 재빨리 옆에 와서 붙었다. 그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조금 전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벌써 감정이 끝났어요?”
“그림은 다 봤어. 서류를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사무실로 가는 중이다.”
“이야. 역시 빠르기는 빠르네. 근데 보니까 어때요? 저거 진짜 맞아요?”
도윤은 석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다시 물으려다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느낌이 이상했는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에서 직원으로부터 서류철을 넘겨받은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안에 든 서류를 한 장씩 넘겨보며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서류에 대한 확인이 모두 끝난 뒤에도 그의 찌푸려진 이마는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그가 서류 가운데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직원에게 물었다.
“네덜란드의 고흐 박물관에서 보내온 이 테오 관련 서류 말입니다. 나마타 갤러리에서 원본을 확인했습니까?”
“네. 저희 관장님이 책임 큐레이터와 함께 네덜란드까지 가서 원본을 확인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가령 유럽의 다른 고흐 전문가들도 그 서류를 확인했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네덜란드의 고흐 박물관이라면 고흐 관련 연구로는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곳이 아닙니까? 그곳에서 내용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린 서류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도윤의 질문이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나보다. 뒤로 갈수록 직원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도윤은 고소를 삼키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도윤은 직원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그가 해바라기 그림이 걸려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윤 박사님?”
도윤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늘씬한 체형에 붉은 색이 살짝 깃든 금발과 녹색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 미인이었다. 여자의 옆에는 깔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삼십대 남자가 서 있었는데, 각진 턱과 잿빛 눈동자로 인해 차갑고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와, 저 여자 죽인다. 영화배우인가? 윽.”
푼수처럼 중얼거리는 석훈의 옆구리를 쥐어박은 도윤이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저를 아십니까?”
여자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눈과 입술만 살짝 움직였는데도 얼굴 전체에서 화사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당연히 알지요. 얼마 전에 ‘트루쓰 앤 밸류’에서 우승하신 천재 감정가 아니신가요? 사람들이 감정의 신이라고 부르던데. 저도 쇼를 보고 굉장히 감탄했어요. 팬이에요.”
내가 연예인이냐? 팬은 무슨. 도윤이 어색한 웃음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감정의 신이라니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저는 크리스틴 리히터라고 해요. 독일 케퍼 자동차 해외사업부에서 일하고 있어요.”
해외사업부에서 일한다더니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옆을 힐끗 봤지만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남자는 서로 인사할 생각이 없는지 차가운 눈빛으로 도윤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도윤도 품에서 명함을 한 장만 꺼내서 여자에게 건넸다.
“한국의 현소 갤러리 팀장으로 있는 이도윤입니다. 이쪽은 저희 직원인 안석훈이고요.”
“내가 왜 현소 갤러리 직원인데요?”
석훈이 옆에서 투덜대다가 또 다시 옆구리를 한 방 얻어맞았다. 눈치 없는 자식. 그럼 현직 백수라고 소개할까? 크리스틴이 우아한 미소와 함께 명함을 받아들었다.
“현소 갤러리는 처음 듣는데 대단한 갤러리인 모양이네요. 이 박사님 같은 분을 일개 팀장으로 부리는 걸 보니까.”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곳입니다. 한국에서는 나름 오래된 갤러리죠.”
그제야 크리스틴이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업을 잇는 거군요. 사실은 저도 그래요. 그런데 현소 갤러리에서도 저 작품에 관심이 있나요?”
크리스틴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가리켰다. 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현소 갤러리가 아니라 다른 분이 해바라기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는 단순히 감정을 의뢰받아 왔을 뿐입니다.”
“실례지만 어떤 분의 의뢰를 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서 있던 잿빛 눈동자의 남자가 갑자기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 자식 뭐야? 도윤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야말로 실례지만 뉘신지?”
“미하엘 그로스입니다. 리히터 전무님의 비서를 맡고 있습니다.”
전무? Executive Director면 전무로 번역하는 게 맞나? 도윤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로 향했다. 해외사업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더니 비서까지 두고 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직책이 높은 모양이다. 근데 이 자식은 명함도 안 주고 입으로만…….
순간, 문득 도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성이 리히터라고? 갑자기 그녀가 자신도 가업을 잇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어, 그럼 혹시?
“저기, 그럼 혹시 드라이바인 그룹의 회장인 토마스 리히터 씨께서…….”
“제 아빠예요. 고흐의 해바라기가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를 들으시더니 저한테 당장 일본으로 가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도 미술품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도윤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물은 것과는 달리 크리스틴은 거리낌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하, 역시 그랬구나. 그녀가 일한다는 케퍼 자동차는 드라이바인 그룹 산하의 주력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그룹의 회장인 토마스 리히터는 세계 20대 부자를 꼽을 때마다 반드시 거론되는 거부이자 미술 시장의 대표적인 큰손으로 유명했다.
도윤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로스가 계속해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친구 되게 부담스럽네.
“죄송합니다. 의뢰인께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으셔서…….”
도윤은 일단 최인탁 회장이 의뢰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경매 시장에서 응찰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로스도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기만 할 뿐,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그때 크리스틴이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몸에서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런데 이 박사님이 보시기에는 어떻던가요? 저 그림이 진짜가 맞는 거 같으세요?”
잠깐만. 그렇게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오면 곤란하지. 도윤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조금 전에 도착했거든요. 오늘은 잠깐 둘러보려고 왔을 뿐이에요.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결론을 내려야죠.”
도윤은 슬쩍 발을 뺐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한 발 더 다가왔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 잔 같이 하시겠어요? 이왕 만난 김에 이 박사님 의견을 좀 듣고 싶은 게 있는데.”
“죄송합니다. 미인의 청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오늘은 사정이 여의치 않네요. 나중에 적당한 기회가 있기를 바라지요. 그럼 이만.”
그는 크리스틴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러자 석훈이 뒤를 힐끔거리면서도 재빨리 그를 따라 나왔다.
“근데 형. 정말로 아직 감정을 못 끝냈어요? 왜 그래요? 평소답지 않게.”
석훈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도윤이 목소리를 낮추어 녀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잔소리 말고 일단 나와. 저 그림 위작이야.”
“네? 위작이요? 가짜란 말이에요.”
석훈이 펄쩍 뛰었다. 도윤이 얼른 손바닥으로 녀석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에서는 아무런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관객들이 그 앞에서 무엇을 느끼든지, 그림 자체에는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의외의 상황에 도윤도 답답했다. 설마 여러 감정가들의 확인을 거쳐 수천만 달러에 팔린 그림이 위작일 것이라고는 그 역시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아, 이거 골치 아프네.’
그림이 위작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 ‘그거 딱 보니까 가짜던데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최인탁 회장과 최수아 관장에게 저 해바라기가 왜 위작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난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고흐의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액자라도 만질 수 있으면 어떤 잔류 기억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겠는데, 주변을 온통 유리벽으로 막아놨으니 현재로선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최수아 관장에게 미리 부탁을 해놨는데도 이 정도라면 저 유리를 제거해서 공개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프리뷰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니 따지기도 곤란하고……. 난감하네.’
아무리 VIP 고객을 대리한다고 해도 뜬금없이 엑스선 촬영이나 성분 분석을 하자고 요구하는 건 더욱 무리였다.
“그럼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아참. 고베에 들를 일이 있다고 했지. 그럼 당장 호텔 예약 취소하고 고베 가는 기차표 끊어요? 아니, 그보다 일단 밥부터 먹는 게 어때요?”
그놈의 밥 타령은. 그리고 제발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얘기해! 그렇잖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석훈이 녀석이 옆에서 자꾸 칭얼대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