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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57화 (57/300)

57화

“이도윤 박사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도윤이 떠난 뒤에 미하엘 그로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크리스틴이 비서를 돌아보며 풋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뭐야? 내가 이 박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불편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크리스틴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관심이 있지. 아버지가 다음 영입 대상에 올려놓고 저울질하고 있는 남자니까.”

“회장님이 말입니까?”

그로스가 눈을 크게 뜨자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왜 이 박사한테 관심을 갖는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하지만 분명히 특별한 점이 있을 거야. 아빠는 평범한 사람들한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특별하기에 그러시는 건지 궁금하긴 하네…….”

크리스틴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그것 때문일 거야.

어릴 때 리히터 회장이 서재에서 무언가에 대해 손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열 살에 불과하던 크리스틴은 아무 생각 없이 서재에 들어갔다가 두 사람이 반복적으로 내뱉던 단어를 귀에 담았다. 링커. 당시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간 뒤에 아버지 서재에서 고서를 뒤적이다 어릴 적 이상할 정도로 귀에 박혔던 그 단어를 다시 만났다. 링커, 커넥터, 키웅가, 카팔라, 무칼라나, 오허스(耦合師). 뜻밖에도 그 이상한 단어는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크리스틴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며 자신이 보았던 단어의 정체를 조사했다. 왠지 아빠에게는 직접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링커가 뭔지, 아니면 누군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유물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줄 수 있다니. 말 그대로 신화나 전설에 불과한 소리잖아. 근데 아빠는 그 이야기를 정말로 믿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리히터 회장은 크리스틴이 아는 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애초에 현실과 신화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드라이바인을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리히터 회장은 어떤 유물에는 특별한 힘이 내재되어 있다는 걸 정말로 믿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링커라는 자의 도움을 받으면 그 힘을 사람에게 옮길 수 있다는 것까지. 솔직히 크리스틴의 입장에서는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황당한 얘기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아버지가 세계 각국의 미술품을 수집하는 걸 틈틈이 도왔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경매에도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토마스 리히터가 갑자기 미국의 한 TV 쇼 프로그램에 갑자기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트루쓰 앤 밸류’였다.

‘트루쓰 앤 밸류의 최종 우승자 이도윤 박사. 아빠는 분명히 그 사람에게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그런 이 박사를 일본에서 만날 줄이야.’

리히터 회장은 도윤과 함께 결승전에 올라갔던 리치오 폴리니라는 이탈리아 남자에게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다. 하지만 관심의 정도가 도윤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낮았다.

“정말로 아우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마 거기까지일 거야. 그만 해도 무척 희귀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무덤까지 함께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 거기서 출토된 유물을 감정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결승전이 있던 날, 리히터 회장은 TV를 보면서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아마 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가던 딸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날 이후 크리스틴은 계속 궁금했다.

도대체 아빠는 어떤 무덤에 들어가려는 것일까? 거긴 왜 들어가시려는 거지? 혹시 무덤이란 단지 위험한 일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빠는 이도윤 박사를 무덤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시기가 오면 분명히 그 사람에게 접근할 거야.”

그렇다면 크리스틴은 이도윤 박사 옆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녀도 무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테니까. 크리스틴은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하는 것보다도 더 끈질기게 관심을 갖는 문제가 무엇인지 꼭 알고 싶었다.

* * *

“런던에 가겠다고요?”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석훈은 도윤이 갑자기 런던에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뜬금없이 도깨비나 홍길동 흉내를 내고 싶어졌나? 갑자기 웬 런던?

“나마타 보험에 고흐의 그림을 판 곳이 런던 크리스티야. 그곳에 가서 확인할 게 있어.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해바라기도 다시 볼 필요가 있고. 나마타 보험의 해바라기는 그걸 보고 베꼈다는 모작 논란이 예전부터 있었거든. 그런 뒤에는 네덜란드에도 가야 해. 거기 고흐 박물관이 있거든.”

돈을 삼천만원이나 받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적당히 이유를 둘러대고 여기서 끝낼 수도 있었다. 최소한 최서라가 적극 추천해서 맡게 된 일만 아니었어도……. 그때 석훈이 손을 휘휘 내저어 도윤의 말을 막았다.

“잠깐만요. 아, 갑자기 숨이 막히네. 고베는 어쩌고요? 거기도 들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물론 고베 먼저 가야지. 거기서 그림을 감정한 다음에 오사카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거야. 미안하지만 넌 오사카에서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무슨 소리! 석훈이 갑자기 도윤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형. 아니 형님!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립니까? 나도 런던에 데리고 가 주세요.”

도윤이 석훈의 손을 탁 뿌리치더니 뜨악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지랄이야?

“네가 런던에 가서 뭐하게?”

“뭐하긴! 거기 민아가 있잖아요. 나도 런던 가서 오랜만에 민아 얼굴 좀 봅시다.”

“갑자기 민아 씨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내가 놀러가는 거 같아?”

“형. 나도 장난으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진짜 저도 좀 런던에 데리고 가 주세요. 제발!”

“얼씨구? 너희들 서로 안 본지 한 달밖에 안 됐잖아. 근데 뭘 은하수를 두고 헤어진 견우직녀처럼 애달픈 표정을 짓고 난리야?”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요. 반년이 넘게 아침마다 인사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한 달 넘게 얼굴도 못 보고 지내니까 요즘엔 밤에 잠이 잘 안 와요.”

“너 상사병 걸렸냐? 안 어울리게?”

“에이 씨, 안 어울리기는 개……. 아니, 그게 아니고 잠깐 말이 헛 나왔어요. 상사병이든 뭐든 이번에 형이 나 런던에 데리고만 가주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네? 우리 부모님이나 민아한테 해코지 하라는 것만 아니면 정말 무슨 말이든 다 듣겠다니까요.”

도윤은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인간 안석훈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

“데리고 가 달라는 걸 보니까 비행기 표하고 호텔 비용을 모조리 나한테 대라는 소리네?”

“2월 달에 소더비 경매 끝나면 엄청 큰돈이 들어온다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그리고 청파 갤러리에서도 삼천만원 받았다면서요.”

“청파에선 아직 천만 원밖에 못 받았어. 나머지는 일 끝내고 가서 보고해야 나오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남는 돈도 없게 생겼어. 그리고 소더비 경매는 아직 재감정 결과도 안 나왔어. 위작이라고 판명되거나 경매에 올라가도 유찰되면 어떡할 건데?”

“유찰 같은 소리……. 아이고, 왜 말이 자꾸 헛나오냐. 아무튼 결국 받는다는 거잖아요. 나도 돈 있으면 정말 내 돈 내고 비행기 타고 싶어요. 하지만 형도 내 사정 잘 알잖아요. 인간적으로 진짜 딱 한 번만 부탁할게요. 내가 무릎 꿇을까요? 응? 무릎 꿇어요?”

어이구, 이 자식아. 그날 오후, 두 사람은 호텔에서 나와서 곧바로 고베 행 신칸센을 탔다. 이미 체크인 한 호텔비가 아깝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동경에서 헛되이 하루를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정이 늘어나자 마음이 바빴다.

“그냥 내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나중에 갚아. 알았지?”

결국 도윤은 석훈을 런던까지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왕 런던까지 동행하게 됐으니 네덜란드 행은 덤이다. 이래저래 돈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솔직히 평소에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놈도 아니고, 저 곰 같은 녀석이 오죽하면 저러랴 싶기도 했다.

고베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 시간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도윤은 먼저 권춘강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에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전직 야쿠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형. 먼저 오사카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표부터 예약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거 직항은 하루에 하나밖에 없던데.”

조민아를 만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얼굴에 화색이 가득한 석훈은 고베에서의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머릿속에 런던만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알아봤는데 아직 좌석에 여유 있어. 그리고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지, 일단 고베에서의 일부터 처리해야 할 거 아냐. 그림의 진위만 감정하면 되는 일이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비행기 표 예약은 그거 끝나고 나서 하자.”

그 때만 해도 도윤은 정말 고베에서의 일이 간단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 * *

권춘강은 나이에 비해 몸이 단단해 보이기는 했지만 키가 크거나 덩치가 우람한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거의 백발로 변해서 그런지 첫 인상도 그저 꼬장꼬장한 노인네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생각보다 평범한 모습이어서 도윤과 석훈은 조금 의외였다.

“왜? 야쿠자라니까 얼굴에 칼자국도 나 있고 그럴 줄 알았나?”

얼굴을 읽혔나 보다. 직접 현관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한 권춘강이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며 피식 웃었다. 도윤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근데 솔직히 예상했던 것과는 인상이 너무 다르시기는 하네요. 저희는 뭐랄까, 눈빛이 살벌하고 몸에 문신 같은 게 잔뜩 있는 분일 줄 알았거든요.”

“문신 있어. 등하고 가슴에만 해서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왜? 보여줘?”

“아이고, 괜찮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어른한테 초면에 옷을 까보라고 하겠습니까?”

권춘강이 그 말에 껄껄 웃더니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부엌에 딸린 작은 식탁을 놓고 세 사람이 마주앉았다.

권춘강의 집은 어디를 가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현대식 단층 주택이었다. 전직 야쿠자라고 해서 일본 전통 가옥 같은 곳에서 살 줄 알았더니 그의 집에는 다다미 한 장 깔려있지 않았다. 집주인이 직접 차를 끓여 두 사람에게 권했다.

“혼자 사십니까? 다른 가족은 안 보이네요?”

도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권춘강이 씁쓸하게 웃었다.

“젊었을 때 혼인 신고도 안 하고 함께 살던 아가씨가 하나 있었지. 그런데 애를 낳기도 전에 병이 들어 죽어버렸어. 그 뒤로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혼자 살아. 야쿠자 주제에 처자식이 딸려봤자 좋을 게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말을 할 때 권춘강의 얼굴 위로 문득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여자였을까? 도윤이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을 속으로 삼키는 순간, 석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말이 아주 능숙하시네요? 전 일본어만 쓰실 줄 알았는데.”

권춘강이 석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왜? 일본 땅에 살면서도 핏줄을 잊지 않은 갸륵한 재일교포처럼 보여서 그래?”

“아뇨. 꼭 그래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일본에서 사신 분치고는 우리말을 너무 편하게 쓰시는 것 같아서요.”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요?”

“일본에서 살면 다 일본어를 잘 할 것 같지? 대부분 그렇기는 한데 우리 어머니는 아니었어. 집밖에도 잘 못나갈 정도로 소심하셨거든. 그래서 아버지도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는 조선말만 썼어. 한 십 년 전부터는 한국 드라마를 재밌게 보기도 했고.”

“한국에 돌아가셔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전혀 없으시겠어요.”

석훈의 말에 권춘강이 자기 앞에 놓인 차를 술을 마시는 것처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도윤을 쳐다봤다.

“근데 내 개인사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그림 보러 온 거 아냐?”

도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볼 수 있겠습니까?”

“기다려봐. 가지고 올 테니까.”

권춘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약간 어색했다. 그제야 도윤과 석훈은 그의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 다쳤나 보구나.’

두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권춘강이 옷장 안에서 국기를 넣는데 쓰이는 것 같은 길쭉한 통을 찾아서 들고 나왔다. 그가 통에서 돌돌 말려 있던 그림을 꺼내서 식탁 위에 쫙 펼치자 가로 1미터 40cm, 세로 80cm 가량의 수묵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이와 비단으로 배접을 한 그림은 정선의 작품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인왕제색도’와 비슷한 크기였다.

‘겸재의 진작이 확실하네.’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 한눈에 감정을 마친 도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일본에 사는 전직 야쿠자가 겸재의 그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림에서는 좋은 작품을 대할 때마다 도윤을 매료시키곤 했던 은은한 빛이 사방을 밝히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멀리 흐릿한 안개에 잠겨 있는 도성의 모습을 대담한 필법으로 그려낸 수묵화에서는 겸재가 말년에 다다른 원숙한 기량이 거침없이 발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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