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도윤은 아오키 씨가 차를 따를 때쯤 되어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저 해바라기 그림말이에요. 조금 전에 가짜라고 하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전기 포트를 한쪽으로 치우던 아오키 씨가 씩 웃었다.
“왜? 진짜 같아?”
“아닌 거 같으세요?”
“아닌 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아니야. 이 사람 감정가라고 하더니 그림 볼 줄 모르네?”
그는 커피포트를 제자리에 갖다놓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윤을 쳐다봤다.
“어이 춘강이. 이 젊은이가 자네 그림을 진짜라고 했다면서? 그거 믿어도 되는 거야?”
권춘강이 짐짓 눈을 부라리면서 친구를 타박했다.
“당연하지. 한국 정부가 내 그림을 확인하겠다고 특별히 보낸 분이야. 아무나 보냈겠어?”
“그래? 아, 그러고 보니까 한국화를 감정하러 왔다고 했지? 그럼 서양화는 잘 모르겠군.”
저기, 꼭 그런 건 아니거든요. 도윤은 속이 답답해졌다.
“저기, 어르신. 제가 사실은 서양화도 좀 볼 줄…….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 그림이 왜 가짜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진짜 같아서요.”
아오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당연히 가짜지 그럼 진짜겠어? 내가 작은 골동품 가게나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고흐의 그림이 얼마나 비싼지는 알아. 저게 진짜였으면 우리 아버지가 벌써 팔아치웠겠지. 그럼 평생 이 조그만 가게를 지키고 계실 필요도 없었을 테고.”
“선친께서도 저 그림이 가짜라고 하셨나요?”
“아니. 그런 말을 뭐 하러 해? 딱 봐도 가짠데. 별 얘기 없으셨어.”
“하지만 아까 팔 물건이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나름대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 그림은 팔지 말라고 하셨대. 뭐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물건이셨나 보지. 누구한테나 그런 게 한두 개쯤은 있잖아.”
“추억이 담긴 물건이요?”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혹시 알아? 우리 할아버지가 은근히 사모하던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일지도. 그러고 보면 그 양반도 은근히 낭만적이셨나 봐. 하하하하.”
영감님 할아버지가 아니라 영감님이 낭만적이신 것 같은데요. 그때 귀머거리나 다름없이 멀뚱멀뚱 앉아있던 석훈이 도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형. 왜 자꾸 저 그림을 가리키는 거예요? 저 해바라기 혹시 진짜예요? 내가 살까요?”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하시네.”
“에이. 안 팔기는? 물건이라는 게 가격만 맞으면 다 팔게 돼 있어요. 기다려보세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석훈은 호언장담을 하며 권춘강 씨에게 통역을 부탁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아오키 씨는 일언지하에 녀석의 부탁을 거절했다. 통역을 하던 권춘강 씨가 중간에 은근히 권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저게 1억 엔씩 하는 진짜 고흐의 그림이었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했을지도 몰라. 그럼 당장 가게 접고 노후를 편하게 즐길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잖아?”
“너, 이 가게 접을 생각도 있는 거야?”
권춘강이 깜짝 놀라서 묻자 아오키 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도 알잖아. 내가 이 가게에 큰 미련이 있어서 여태까지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무튼 당신들한테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저게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야. 이제 와서 돈 몇 푼 벌자고 넘길 수는 없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마침 찻잔도 다 비운 마당에 축객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도윤은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아, 진짜 갈등되네.
1억 엔? 소더비 경매에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팔리기만 하면 거액이 들어온다. 그걸 생각하면 한화로 12억이 채 되지 않는 돈쯤은 얼마든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아오키 씨가 가지고 있는 해바라기는 최소한 그보다 백배쯤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으니까.
‘INB에서 받은 ’트루쓰 앤 밸류‘ 우승 상금으로는 어림도 없어. 하지만 눈 딱 감고 집에다 지원을 요청하면 1억 엔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실상 노인네 등쳐먹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제 값을 주고 구매하자니 아무리 현소 갤러리가 내실이 튼튼한 화랑이라고는 해도 당장 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장만하는 건 무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도윤이 결국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저기, 어르신.”
도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오키 씨를 불렀다.
“제가 사실은 서양화에도 안목이 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 그림은 아무래도 고흐의 진작이 맞는 것 같아요. 혹시 가격을 맞춰드리면 진짜로 파실 생각이 있습니까?”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느꼈나보다. 아오키 씨가 움찔하더니 되물었다.
“가격을 맞춰준다고? 도대체 얼마를 생각하기에 그렇게 무게를 잡는 거야?”
“천만 달러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본 돈으로는 아마 10억 엔이 조금 넘을 겁니다.”
아오키 씨는 물론이고 옆에서 듣고 있던 권춘강마저도 입을 떡 벌렸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아오키 씨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얼마라고?”
“10억 엔이요. 솔직히 제대로 감정을 받아 경매에 내놓으면 그보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격을 조금 낮춰주시면 경매까지 안 가고 빨리 파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제가 믿을 만한 구매자에게 다리를 놔 드리겠습니다.”
아오키가 도윤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이 젊은이가 지금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게 또 무슨 신종 사기 수법은 아닐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실내가 적막해진 가운데 영문을 모르는 석훈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떼굴떼굴 굴리고 있었다.
“글쎄. 워낙 갑작스러운 얘기라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한참 만에 입을 뗀 아오키 씨가 주저하며 뱉은 말이었다. 그의 태도가 완강한 거부에서 조심스러운 망설임으로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도윤이 살짝 발을 뺐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결심이 서면 연락주세요.”
도윤은 현소 갤러리 직함이 적힌 명함을 꺼내 아오키 씨에게 건넸다.
“82를 먼저 누르고 거기 적힌 번호대로 전화를 주시면 됩니다. 해외 요금이 붙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다른 일 때문에 사실 고베에 오래 머무를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대답을 주실 수 있을까요?”
아오키 씨가 권춘강을 쳐다보자 그가 네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 모레까지라고? 알았어. 나도 여기저기 물어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지. 연락이 없으면 그냥 안 파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자네 볼 일 봐.”
“알겠습니다. 그럼 저 그림 사진을 몇 장만 찍어 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제가 아는 고객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의사를 물어봐야 해서요.”
“그거야 얼마든지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도윤은 다시 스마트 폰을 꺼내서 해바라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런 뒤에야 정중히 인사하고 아오키 씨의 집을 물러나왔다. 권춘강 씨와도 헤어지자 석훈이 득달같이 물었다.
“형, 왜 그래요? 저 그림 진짜 고흐의 해바라기가 맞아요?”
녀석, 지금까지 입이 간질거리는 걸 참느라 고생했겠네.
“진짜 맞아. 나도 저 그림이 2차 세계 대전 때 불에 타서 없어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멀쩡한 모습으로 저 양반 집에 걸려 있는지 모르겠다.”
“황당하네. 형이 그림을 잘못 봤을 리는 없고. 근데 저거 원래 불에 탔다고 알려졌어요?”
“응. 어디서 어떻게 불에 탔는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기는 한데, 지금의 아시야 시에 있던 야마모토의 집에 걸려 있다가 고베 대공습 때 불에 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
“야마모토? 그건 또 누구에요?”
도윤은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 자식, 왜 이렇게 갑자기 그림에 관심이 많아졌어?
메이지 시대의 사업가였던 야마모토 코야타는 원래부터 고흐 애호가였다. 그는 1920년에 파리에서 친구에게 1만 엔을 주고 고흐의 다섯 송이 해바라기를 샀다. 하지만 그림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던 그는 1945년, 오사카와 고베 일대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그가 가지고 있던 고흐의 그림도 그때 함께 불에 탔을 것이라고 추측됐다. 그 뒤로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까.
“저 그림이 진작일 경우에 실제 가격은 그럼 얼마 정도 되는 거예요? 아까 말한 천만 달러? 아니면 그 이상 갈 수도 있어요?”
도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천만 달러도 너무 싸게 부른 거긴 했다. 양심이 찔릴 정도로. 하지만 공식적으로 진작임이 입증되지 않은 그림이다. 그런 그림을 자신의 말만 믿고 사게 하려면 그 가격도 너무 높게 부른 것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미래그룹의 최인탁 회장에게 나마타 갤러리가 아니라 아오키 씨의 해바라기를 사라고 권할 생각이었다.
“해바라기 얘기는 그만 하고 일단 호텔로 돌아가자. 아직 할 일 많아. 권춘강 씨 그림 감정한 것에 대해서 보고서도 작성해야 돼.”
그는 석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거지?
* * *
도윤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한 감정 결과 보고서부터 작성했다. 완성한 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조명근이 전화를 걸어왔다.
“진짜 겸재의 그림이 맞아? 확실하게 감정한 거 맞지?”
“일본까지 와서 대충 감정했을까? 못 믿겠으면 직접 와서 자기 눈으로 보든가?”
“내가 가서 봐봤자 뭘 아냐? 알았다. 수고했어. 위에도 그렇게 보고할게.”
“권춘강 씨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 그림 기증하면 정말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그거야 위에서 결정할 일이니까 내가 대답할 사항이 아니지.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겠냐? 네 말대로라면 시세가 10억이 넘을지도 모르는 국보급 문화재인데.”
“알았어. 근데 이왕이면 절차를 빨리 밟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양반 하는 거보니까 그림을 대충 간수하더라고. 도둑이라도 들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가 날아가는 거잖아.”
“알았다. 고베에 우리 영사관이 있으니까 거기 직원한테 연락해 둘게.”
전화를 끊은 도윤은 다시 청파 갤러리의 최수아 관장에게 연락했다. 돈을 대는 사람이 최인탁 회장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림에 관한 얘기는 최관장과 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그의 설명을 들은 최수아 관장은 짐작대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도쿄의 나마타 갤러리에 있는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는 위작이고, 오히려 고베에서 이미 없어진 줄 알았던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나타났다는 거죠?”
“네. 그런데 고베의 그림은 진작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만약 그림을 매입하시면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정밀 감정을 다시 의뢰하셔야 될 겁니다.”
“이 박사가 진작이라고 했으니까 틀림없겠죠. 나는 이 박사를 믿어요.”
“말씀은 고마운데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니까요. 잘 아시겠지만 그런 그림을 매입할 때는 공신력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알았어요. 그나저나 도쿄의 해바라기는 어쩌죠? 회장님한테 매입하지 말라고 할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기 전과는 얘기가 너무 많이 바뀌어 회장님이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네. 이 박사도 여기에 있을 때는 런던 크리스티와 고흐 박물관의 권위를 믿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도 일단 런던 크리스티와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네덜란드의 고흐 박물관에 들를 예정입니다.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진작임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다 거기서 나왔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그 서류들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 한 번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어떻게 나오실지 장담할 순 없지만 회장님한테는 제가 잘 얘기해 볼게요. 그나저나 비행기 타고 다니느라 고생하겠네요. 수고하세요.”
도윤이 자발적으로 두 곳을 방문하겠다고 나서자 최수아 관장의 목소리에서 호의가 배어나왔다. 사실 도윤의 입장에서 볼 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다. 청파 갤러리와 미래 그룹은 앞으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곳이었으니까.
다음날 아침, 고베 주재 한국 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그림을 확인하고 기증 서약서를 받기 위해 직원들이 권춘강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저희 직원들로서는 그림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서약서를 작성하는 현장에서 다시 한 번만 겸재의 그림을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장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도윤은 영사관 측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권춘강의 집 앞에서 직원들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이 일을 담당한 책임자가 누구야? 생각보다 공무원들의 움직임이 신속했다.
도윤과 석훈은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권춘강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초인종을 눌러야하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 안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대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문에 귀를 대자 뭔가 안에서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어코 ‘억’하는 비명까지 났다. 싸움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집 옆으로 돌아가자 부엌을 통해 거실의 모습이 보였다. 물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집안 꼴이 완전 엉망이었다.
“형, 잠깐 물러나세요.”
석훈이 녀석이 어느새 장갑을 꺼내 손에 끼더니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를 구해 와서 창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녀석이 창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다.
“뭐 하는 놈들이야!”
석훈이 버럭 고함을 지르는 순간, 도윤도 뒤따라 창문을 타고 넘었다. 그때 권춘강이 한 손에 그림이 든 길쭉한 통을 든 채, 배를 움켜쥐고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질질 끌리는 그의 발 아래로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이 길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