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밖에서도 얼핏 확인했지만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식탁은 뒤집힌 채로 한쪽으로 밀려나버렸고, 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로 바닥을 뒹구는가 하면 깨진 그릇과 컵의 파편이 햇빛을 받아 위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부엌 싱크대를 기대고 선 권춘강의 앞으로 세 명의 괴한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피 묻은 칼을 손에 들었다.
“형은 할아버지부터 챙겨요!”
석훈이 고함을 빽 지르며 재빨리 권춘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 저 자식들 칼 들었는데?”
걱정스러운 도윤의 물음에 석훈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칼 정도는 장난이지. 총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형이 끼면 더 불안해요.”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등장에 움찔했던 괴한들이 이내 욕을 하면서 석훈에게 다가섰다. 모두 넥타이 없이 세미 정장을 걸친 이십대에서 삼십대 정도의 남자들. 앞에 선 놈이 석훈의 코앞에 피 묻은 칼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석훈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권춘강의 상태도 심각했다. 도윤은 출혈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그를 바닥에 앉힌 뒤 배부터 살폈다. 왼쪽 복부의 옷이 길게 찢어진 채 뭉클뭉클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도윤은 급한 대로 손수건을 꺼내 상처 위에 대고 꽉 눌렀다. 그 와중에도 권춘강은 그림이 든 통을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세요. 구급차하고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도윤이 휴대폰을 꺼내드는데 권춘강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해. 저놈들 야쿠자야. 프로라고.”
도윤이 무거운 얼굴로 권춘강의 손을 치워내며 등 뒤의 석훈에게 소리쳤다.
“석훈아. 그 자식들 야쿠자란다. 사정 봐 줄 것 없이 그냥 박살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아악’하는 비명과 함께 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뒤를 돌아보자 칼을 들었던 놈이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였다. 휴대폰을 터치하는 도윤의 손이 바빠졌다. 다행히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딸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고베 경찰서입니다.”
“여기 고베 시 중앙구 이쿠타 신사 근처에 있는 XXX번지인데요. 집에 흉기를 든 괴한들이 침입했습니다.”
“흉기를 든 괴한이라고요? 몇 명입니까?”
“세 명인데 강도인 것 같아요. 사람이 칼에 찔려서 출혈이 심합니다. 구급차도 필요해요.”
그가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뒤에서는 계속해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경찰도 목소리가 빨라졌다.
“경찰이 금방 갈 겁니다. 되도록 싸우지 말고 일단 몸을 피하세요.”
“네, 네. 알았으니까 최대한 빨리 출동 바랍니다.”
급하게 경찰의 출동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도윤이 전화를 끊고 권춘강을 바닥에 눕혔을 때쯤 어느새 싸움은 완전히 끝나 있었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석훈의 발밑으로 남자 세 명이 각자 서로 다른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셋 모두 사지 중에 최소한 한두 개 정도는 당분간 기능을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 녀석 아직 실력이 안 녹슬었네.
“할아버지는 어때요? 구급차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석훈이 포박용으로 쓰기 위해 부엌 수납장에서 청 테이프를 찾아 꺼내들면서 물었다.
“일단 지혈 중이다. 다행히 치명상은 아닌 것 같지만 연세가 있으시니까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 해.”
“아, 이 양아치 자식들. 젊은 놈 셋이서 할아버지한테 칼까지 꺼내들고 지랄이야.”
석훈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남자들을 묶으면서도 손바닥으로 놈들의 머리통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도윤이 보기에는 그 녀석들도 처음부터 칼을 빼든 건 아니었을 것이다. 석훈이 남자들을 가로막기 전부터 방안은 이미 난장판이었고, 한 명은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권춘강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다.
‘전직 야쿠자라더니, 이 할아버지도 젊었을 땐 날아다니셨겠네.’
잠시 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도착했다. 권춘강이 들것에 누운 채 구급차에 오르기 직전, 도윤이 재빨리 그의 곁에 다가가 귀에다 속삭였다.
“혹시 경찰이 그림에 대해 묻더라도 한국 정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저희 둘은 한국에서 권춘강 씨 그림을 사려고 온 사람들이고요. 아셨죠?”
권춘강이 도윤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병원으로 실려 간 후, 현장을 정리하던 경찰은 추가로 구급차를 더 불러야 했다. 꽁꽁 묶인 채 쓰러져 있던 세 명이 테이프를 푼 뒤에도 제대로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작 경찰서에 끌려간 것은 괴한들이 아니라 도윤과 석훈이었다. 그들이 경찰차에 몸을 싣기 직전에 때마침 한국 총영사관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고 기겁했다. 도윤이 경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손짓으로 직원을 가까이 오게 했다.
“권춘강 씨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그림을 훔치려고 했어요. 다행히 그림은 뺏기지 않았지만 혹시 경찰들이 방문 이유를 묻거든 기증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마세요.”
“네? 그건 왜…….”
“일본 애들이 그 그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댁은 그냥 권춘강 씨 입국 심사 문제 때문에 방문한 겁니다.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게 낫겠네요.”
다행히 영사관 직원은 말귀를 금방 알아들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늦게까지 경찰서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다행히 병원으로 이송됐던 세 명 가운데 둘이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야쿠자 조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병원에서 이루어진 심문에서 권춘강은 괴한들을 때려눕힌 게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경찰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한 영사관 직원은 도윤과 석훈의 신분만 확인해주고 그냥 돌아갔다.
그날 저녁 늦게, 흉기에 묻은 지문이 괴한들 가운데 한 명의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반면에 현장에서 발견된 피는 모두 권춘강의 것이었다. 괴한들은 처음에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했지만 형사가 현장에서의 감식 결과를 들이대며 윽박지르자 결국은 권춘강을 먼저 공격해서 찔렀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기본적인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형사 반장이 도윤과 석훈을 따로 조용히 불렀다.
“야쿠자들이 전부다 손목과 발목 인대를 심하게 다쳤더군요. 어떤 분이 손을 쓰셨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남은 여행 기간 동안에는 가급적 폭행 사건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쌍방 폭행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석훈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지면서 뭐라 하려는 걸 도윤이 막으며 대신 나섰다.
“강도를 잡은 겁니다. 쌍방폭행이 아니고요. 말을 좀 이상하게 하시는데, 일본에서는 칼을 들고 덤벼드는 강도도 말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러자 형사 반장이 피식 웃었다.
“뭐, 그건 저희가 차차 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고요. 아무튼 요령 있게 손을 쓰기는 하셨더군요. 상대가 야쿠자이기도 하고, 먼저 시비를 걸고 공격했다는 정황이 뚜렷하니까 이번에는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두 분은 이만 가보십시오. 이의 있습니까?”
“이의 없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도윤과 석훈은 미련 없이 경찰서 문을 박차고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오전,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권춘강이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권춘강의 친구인 아오키 씨 외에도 전날 봤던 영사관 직원이 와 있었다.
“환자 병문안 오신 거예요?”
도윤이 뜨악한 표정으로 묻자 영사관 직원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아니라, 위에서 강도 사건 얘기를 듣더니 빨리 문화재 기증 서약서부터 받으라고 재촉해서요. 권춘강 씨가 의식을 잃거나 한 건 아니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진짜. 도윤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권춘강이 침대 옆에서 길쭉한 통을 꺼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 들어있는 통이었다. 그는 그것을 도윤에게 건넸다.
“이거 자네가 가지고 있다가 한국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가게.”
도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영사관 직원한테 기증 서약서를 쓴 게 바로 조금 전인데 벌써 그림을 넘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권춘강 씨. 죄송하지만 그 그림은 저희 영사관을 통해서 기증하는 게…….”
영사관 직원이 다급히 그를 말리려 했지만 권춘강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 손을 통하면 어때서? 어차피 그림을 주기로 했으니까 이게 한국 땅을 무사히 밟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오? 난 다쳐서 누워있는 사람한테까지 서약서를 받겠다고 온 당신보다는 내 목숨을 구해준 젊은 친구들이 더 믿음직해. 싫으면 그 서약서 도로 찢든가.”
도윤은 솔직히 그림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당장 영국으로 가야 하는데 그걸 들고 이동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춘강의 말을 듣는 순간 생각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서울에 가면 저한테 일을 부탁한 조명근 검사라고 있습니다. 그 분한테 꼭 이 그림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냉큼 그림을 받아들자 영사관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내쫓기듯이 병실을 떠났다. 직원이 사라진 뒤에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그림만 받고 입국 금지는 풀어주지 않을까봐 걱정되지 않으세요?”
그러자 권춘강이 피식 웃었다.
“서약서에 그에 관한 조항을 넣었어. 입국 금지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림도 넘기지 않기로. 그러니까 자네도 일단은 그림을 가지고만 있어. 그러다 입국 금지가 풀리면 그 검사인지 판사인지 하는 사람한테 넘겨. 끝내 안 풀어주면 그냥 팔아치우고.”
“그러다 제가 이 그림을 홀라당 먹어치우면 어쩌시려고요?”
도윤의 말에 권춘강이 껄껄대고 웃더니 배가 당기는지 금세 얼굴을 찡그렸다.
“영사관 직원이 뻔히 보는 앞에서 그림을 건넸는데 자네가 먹어치우겠다고? 교도소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그리고 지금 내가 그 그림을 손에 쥐고 있을 처지인가? 야쿠자들은 생각보다 끈질겨. 그놈들이 언제 또 칼 들고 찾아올 줄 알고 미련하게 끼고 있겠나?”
이 양반 확실히 산전수전 다 겪은 티가 나네. 도윤은 싱긋 웃었다.
“이 그림이 일단 한국으로 넘어가면 다시 일본으로 건너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판매할 경우, 그 돈은 확실하게 보내드릴게요. 물론 수수료는 제하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그냥 주기로 했던 그림이야. 알아서 하게.”
권춘강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려다가 석훈을 보고는 씩 웃었다.
“자네 경호원이라고 했나? 내가 보기에는 야쿠자를 했어도 성공했겠어?”
그러자 석훈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영감님이 몰라서 그렇지 제가 마음이 약해요. 나쁜 놈들은 잘 두드려 패는데, 착한 사람한테는 손이 안 나가거든요. 근데 야쿠자를 하면 제 얼굴을 제가 때려야 하잖아요.”
그 말에 권춘강은 다시 소리를 내서 웃으려다가 배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윤과 석훈은 그만 쉬시라며 인사를 드리고는 겸재의 그림이 든 통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 그때, 안에 있던 아오키 씨가 황급히 두 사람을 따라 나왔다.
“이보게, 잠깐 얘기 좀 하세.”
도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언급했다.
“그 그림을 정말로 10억 엔에 팔아줄 수 있겠는가?”
도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대로 감정을 받아 경매에 내놓으면 더 비싸게 팔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 맡겨주시면 확실하게 그 돈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내가 늘그막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밟겠나? 10억 엔만 해도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그냥 자네가 알아서 처분해주게.”
“후회 안 하시겠어요? 가격 차이가 생각보다 클지도 모릅니다.”
“나도 골동품상 하느라 이런저런 거래를 해봐서 알아. 자네 말처럼 그 그림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함부로 주판알을 튕기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주판으로 머리를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춘강이 그놈 꼴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구매자와 다시 연락해보고 조만간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최회장이 끝내 그림을 구매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판 돈을 모조리 투자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결국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게 도윤의 판단이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도윤은 곧바로 석훈을 설득했다. 녀석에게 그림을 가지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석훈이 울상을 지었다.
“민아는 어떻게 하고요? 약속했잖아요? 저 영국에 데리고 가기로.”
“그 점은 미안하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상황이 바뀌었잖아. 이 그림은 당장 한국으로 옮겨야 하는데, 나는 영국하고 네덜란드에 가야 하니까 시간이 안 돼. 지금으로서는 네가 그림을 들고 한국으로 가서 조 검사를 만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민아한테 곧 영국에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는데…….”
“최서라 씨 어제 영국 갔어. 민아 씨도 이제부터는 경호 업무를 봐야하기 때문에 어차피 너하고 데이트할 여유는 별로 없을 거야.”
“에이 씨. 기껏 좋은 일 하고 나만 망한 것 같네.”
결국 석훈은 눈물을 글썽이며 오사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도윤 역시 같은 공항에서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무슨 무역회사 영업 사원도 아니고 지난 몇 달 사이에 본의 아니게 비행기를 참 많이 탄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