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62화 (62/300)

62화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호텔로 직행해서 샤워만 간단히 한 뒤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니 미래 그룹 회장 비서실이었다.

거듭된 여행과 시차로 인해 머리가 띵하고 목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창밖에는 아직 짙은 어둠이 깔린 상태. 서울은 지금 몇 시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최인탁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바라기 때문에 영국으로 갔다는 얘기 들었네. 지금 어디인가?”

심지어 영국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어? 거긴 아직 새벽이잖아!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영국에 갔던 일은 이미 끝냈고 어젯밤 늦게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습니다.”

“저런. 벌써 거기까지 갔군. 되도록 그 전에 통화했으면 했는데.”

잠이 번쩍 깼다. 그 전에 통화하려고 했다고? 뭐지?

“괜찮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지금 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마타 보험의 해바라기 말이야. 그거 안 사기로 결정했네. 그 그림이 위작이라는 자네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렇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그 그림을 굉장히 원하셨던 걸로 아는데…….”

“사실 나는 아직 개인적으로 미련이 좀 남아 있긴 하네, 그런데 수아, 아니 최 관장이 극구 말리더라고. 서라한테서도 전화가 왔고. 조금만 일찍 전화했으면 자네가 암스테르담까지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하게 됐네.”

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전화하시지.

“나마타 보험의 해바라기가 위작이라는 건 제 주관적인 감정 의견일 뿐입니다. 정말 제 말만 듣고 포기하셔도 괜찮겠습니까?”

“겸손하군. 그 주관이 누구의 주관인지가 문제겠지. 게다가 그 그림에 큰손들이 많이 덤벼들 모양이야. 우리가 마지노선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가격이 더 올라갈 거 같아. 나도 계속 고민했는데 이번에는 자네 의견을 받아들여서 물러서는 게 좋을 것 같아.”

큰손들? 순간적으로 도쿄에서 만났던 크리스틴 리히터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마타 보험에서 예상보다 가격을 세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군.

“고베에 있는 다섯 송이 해바라기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매하실 건가요?”

“아니야. 그것도 썩 내키지는 않아. 공식적인 감정 절차를 통해서 진작이라는 게 입증되었다면 모를까, 미안하지만 그 경우에는 자네 말만 믿고 천만 달러를 던지기가 어렵네. 개인을 상대로 한 거래라 외환 관리법도 걱정되고, 잘못하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댈 우려가 있어.”

도윤은 최 회장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마타 해바라기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포기하고, 고베 해바라기는 반대로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국 판단의 근거가 도윤의 감정 의견에만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베의 해바라기는 다른 사람에게 구매 의사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내 물건이 아닌 걸 가지고 미련을 부리는 것도 우습지. 그렇게 하게.”

“그럼 이것으로 제가 청파 갤러리에서 받은 의뢰는 완전히 종료되는 거군요.”

“그래. 자네는 그만 서울로 돌아와도 좋아. 도착하면 연락하게. 내가 밥 한 끼 살 테니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먼동이 트면서 창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그럴 수는 없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 * *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도윤은 미술관 개관 시간인 아홉 시가 조금 넘어 고흐 미술관에 도착했다. 사무실을 찾아간 그는 정중히 테오와 관련된 자료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담당 직원에 의해 단박에 거절당했다.

“죄송합니다. 공적 사유나 연구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외부인에 의한 자료 열람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직원의 태도는 암스테르담의 겨울 날씨보다 더 차갑고 무뚝뚝했다. 그럼 여기서 돈과 시간만 날리고 돌아가야 해?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미술관에서 물러나온 도윤은 곧바로 뉴욕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곳은 이미 오후였다. 다행히 뉴욕 소더비의 까미유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이 박사님! 그렇지 않아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어제 드디어 마크 로스코 그림에 대한 재감정이 끝났어요. 오래 기다리셨죠?”

“그거 잘 됐군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어땠을 거 같아요?”

이 양반이! 목소리나 말투로 볼 때 진작으로 결론이 나온 게 분명했다. 도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까미유가 까르르 웃더니 먼저 사실을 털어놓았다.

“진작으로 결론이 났어요. 그래서 두 주 후에 있을 정기 경매에 올리기로 했어요.”

“경매 시작가는 얼마로 하실 건데요?”

“더 논의를 해봐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1200만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낙찰가는 그보다 훨씬 높을 거예요. 최소 1500에서 2000?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와우! 도윤은 속으로 놀라는 한편, ‘트루쓰 앤 밸류’에 나왔던 다섯 번째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크 로스코는 고흐와는 달리 레플리카를 만든 적이 없다. 따라서 자신의 그림이 진작이라는 얘기는 그 그림이 곧 가짜라는 뜻이다.

‘지금쯤 그 소장자는 속이 무척 쓰리겠군. 괜히 미안하네.’

아무리 부자라도 몇 백만 달러를 가만히 앉아서 날린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쯤 괜히 작품을 대여해줬다고 후회하고 있을 게 뻔했다.

“경매가 어떻게 진행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그나저나 제가 전화를 드린 건 그 일과는 별개로 몇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예요.”

도윤의 말에 까미유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변했다.

“무슨 일인데요? 어디서 또 흥미진진한 그림이라도 발견한 거예요?”

이 아줌마 흥미진진한 거 되게 좋아하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로스코의 그림이 팔릴 경우, 수수료를 제한 수익금을 미국에 있는 제 계좌로 넣어주세요. 그 돈으로 다른 그림을 살 생각이거든요. 계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 돈을 다른 그림에 투자하시려고요? 하긴 그렇게 하는 게 세금을 절약하는데 도움이 되긴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떤 그림을 살 건데요?”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고, 아무튼 나중에 그림을 사면 뉴욕으로 보낼 생각이거든요. 그럼 소더비에서 그걸 감정해서 다시 경매에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까미유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잠깐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조금 전보다 훨씬 무겁고 침작해진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어떤 그림이든 저희가 경매에 올릴 건 기본적으로 자체 감정을 해요. 이 박사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외부 전문가들한테 의뢰해서 공개적인 감정을 해달라는 뜻인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아니 됐어요. 어차피 어떤 그림이든 이곳으로 보내면 정체를 알 수 있겠죠. 그걸 경매에 올릴지 어떨지는 그림을 보고나서 판단할게요.”

“아마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단, 제가 그림을 구입할 때까지는 이 얘기가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면 안 돼요. 만약 소더비에서 섣불리 제가 노리는 그림에 욕심을 내면 저하고는 인연 끝이에요. 그 그림도 크리스티나 다른 경매 회사에 맡길 거고.”

“와우, 그거 무서운 협박이네요? 그 말을 들으니까 어떤 그림인지 더 궁금해져요.”

“까미유씨!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알았어요. 하지만 그림을 공개 감정에 붙였는데 위작으로 판명될 경우, 감정료는 이 박사가 부담해야 돼요. 진작이면 당연히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겠지만.”

“소더비는 분명히 아까워하지 않고 감정료를 부담하게 될 거예요.”

“오케이. 로스코의 그림을 팔면 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갖게 될 텐데, 그만한 돈으로 사려는 그림이 도대체 뭘까? 되도록 빨리 그림을 보게 되기를 기다릴게요.”

까미유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도윤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요.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한 가지 더요? 뭔데요?”

“제가 요즘 고흐의 해바라기에 관해서 준비하고 있는 간단한 글이 하나 있거든요. 논문까지는 아니고 그냥 소고나 칼럼 정도예요. 그걸 소더비에서 간행하는 소더비 리뷰에 실어줄 수 있을까요? 외부인사 기고문 형식으로 말이에요.”

“소더비 리뷰요? 글쎄요? 그거야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기는 한데……. 명색이 하버드 출신 미술사 박사에다 ‘트루쓰 앤 밸류’ 우승자의 글이잖아요. 그런데 그건 소더비 소식지 같은 거라서 학술적인 성격은 별로 없어요. 원고료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원고료는 상관없어요. 그냥 실어만 주면 되니까. 원고는 언제까지 보내드리면 될까요?”

“리뷰 편집부에 연락을 해서 알아봐야 하겠지만 아마 일주일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거기에 글을 실을 거예요? 소더비 직원이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이 박사라면 굳이 거기가 아니라 정식 학술지에 글을 싣는 게 더 낫지 않아요?”

“말씀드렸잖아요. 정식 논문이 아니라 간단한 아티클이라고. 근데 그 글을 완성하려면 자료가 하나 필요해요.”

“자료요? 어떤 자료요?”

“저 지금 암스테르담에 있거든요. 고흐 미술관에서 해바라기에 관한 서류를 확인하고 싶은데, 여기 직원이 공적인 이유나 연구 목적이 아니면 자료를 보여줄 수 없다고 하네요. 소더비 리뷰 편집부에서 이쪽으로 자료 열람 협조 공문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까미유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일본의 나마타 보험에서 고흐의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를 시장에 내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박사님 지금 그 작품에 대한 감정 의뢰를 받은 거예요?”

하여튼 다들 귀신이라니까.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확히는 의뢰를 받았었다고 해야 맞아요. 그 건은 이미 끝냈거든요. 고흐 박물관에 있는 서류를 확인하려는 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에요.”

“감정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요? 그거 진작이에요, 위작이에요?”

“그 점은 소더비 리뷰에 실을 제 글에서 언급할 거예요. 궁금하면 되도록 빨리 협조 공문을 보내주세요. 그럼 제 글도 그만큼 빨리 완성될 테니까.”

“오늘 저녁, 아니 늦어도 거기 시간으로 내일 아침까지는 보내도록 할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네. 소더비에서도 그 그림을 노리고 있나?

* * *

다음날 오전, 도윤은 고흐 박물관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자료실에 들어갔다. 어제 통화를 마치자마자 까미유는 신속하게 움직였고, 소더비 리뷰 편집부는 그날이 가기도 전에 고흐 박물관 측에 자료 협조 공문을 보냈다. 소더비 리뷰 자체는 학술지가 아니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소더비라는 이름이 고흐 박물관의 자료실 문을 열게 만들었다.

“자료 열람 시간은 두 시간입니다. 자료가 손상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 주세요.”

직원은 고흐와 그 동생 테오와 관련된 자료가 잔뜩 비치되어 있는 열람실에 그를 데려다 놓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도윤이 자료를 열람하는 동안 그를 감시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서가 사이의 테이블에 필요한 자료들을 하나씩 옮겨놓고 빠른 속도로 살피기 시작했다.

고흐는 생전에 동생 테오에게 7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테오 역시 700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양의 편지를 썼다. 아무리 속독에 뛰어난 도윤이라고 해도 두 시간 동안 그걸 모두 살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고흐가 아니라 동생 테오의 편지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심지어 그걸 다 살피지도 않았다.

테오의 편지를 확인한 그는 요한나 리스트도 꼼꼼히 검토했다. 테오의 부인 요한나가 남편이 죽은 뒤에 물려받은 작품의 목록을 작성한 게 바로 요한나 리스트였다. 그 뒤에는 테오의 아들인 빈센트 빌렘 반 고흐가 작성한 기록들까지 살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자료실을 지키던 직원이 의자 위에서 불편하게 몸을 꿈틀거릴 때, 잿빛 머리카락이 많이 섞인 금발의 노신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관장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직원을 손짓으로 만류한 노신사가 도윤에게 다가왔다.

“이도윤 박사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린 도윤에게 노신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이곳의 관장인 얀 페르베이라고 합니다. 미술관에 오셨다는 얘기를 조금 전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시간이 괜찮으면 저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저를 아십니까?”

도윤의 물음에 페르베이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트루쓰 앤 밸류’를 감명 깊게 봤습니다. 소더비의 까미유 씨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요. 유명하신 분이 일부러 방문하셨으니 차 한 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누렸으면 합니다. 제가 욕심을 부린 건가요?”

도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차피 제한된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닙니다. 관장님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이지요.”

도윤이 일어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재빨리 다가와서 그가 보던 자료들을 치웠다. 입맛을 다시며 등을 돌리는데 페르베이 관장이 지나가듯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마타 보험이 가지고 있는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도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마타 보험에서 소장 작품들을 대거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이 보고 계시는 서류를 얼핏 보니까 우리 미술관이 그 작품이 진작임을 입증하는데 참고했던 자료들이 있더군요. 혹시 누군가에게 감정 의뢰를 받으셨습니까?”

“의뢰를 받기는 했는데 그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됐습니다.”

하여튼 다들 머리는 좋다니까. 어차피 잘 됐다. 그 자료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사실 고흐 미술관 관장이야말로 자료에 대해 묻기에 가장 적절한 질문 상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