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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65화 (65/300)

65화

이탈리아 로마. 창밖으로 멀리 성 베드로 성당의 둥근 돔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한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무려 열한 명의 남녀가 모였다. 한쪽에서 세 명씩 동원한 여섯 명의 경호원들이 모두 방 밖으로 물러나자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상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클립스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요트였는데 참 아깝게 됐어요.”

그의 말에 이브라힘 왕세제가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나마타 보험에서 적절히 보상을 해 준 덕분에 금전적인 손실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다시 구할 수 있는 배가 아니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자기 손으로 폭파시켜놓고 안타깝기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다니엘은 요트를 가라앉힌 장본인이 바로 이브라힘 왕세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새 요트는 안 구하십니까?”

“요즘 국내 사정이 적잖게 어렵습니다. 이런 시기에 왕세제가 모범을 보여야지요. 당분간 바다 구경은 삼갈 생각입니다.”

그러셔? 다니엘은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나마타 보험은 이래저래 타격이 컸겠습니다. 혼자서 보상금을 모두 부담한데다 팔려고 내놨던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위작으로 밝혀졌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도쿄에 있는 국립 서양 미술관이 사들였다고는 하지만 처음 구매 가격의 절반 이하로 팔렸으니 손해가 막심하겠어요.”

이브라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이 왜 자꾸 거북한 화제를 입에 올리는 거야?

“그동안 고흐의 해바라기를 전시하면서 거둬들인 입장료 수익만 해도 그림 값을 훨씬 뛰어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손해라고는 할 시기는 지났지요. 그나저나 물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이브라힘이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을 밝히자 빙그레 미소를 지은 다니엘이 옆에 있던 비서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비서가 테이블 위에 정육면체 상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가 뚜껑을 열자 금은과 보석으로 치장된 정밀한 세공품, 파베르제의 달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이브라힘의 눈에 짙은 탐욕의 빛이 잠깐 맺혔다가 사라졌다.

“매뉴얼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이브라힘을 수행하던 압둘 비서실장이 품에서 오래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가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치자 다니엘이 고개를 숙여 내용을 살폈다.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잠시 후, 허리를 편 다니엘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달걀을 통째로 뜨거운 물속에 담가야 할 줄은 몰랐군요. 이러니 온갖 시도를 해도 꿈쩍도 안할 수밖에요. 그나저나 달걀을 열 준비는 해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압둘의 옆에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리 준비한 커다란 가방을 열더니 안에서 몇 가지 장치를 꺼내 조립했다. 실험실에서 쓰는 커다란 전기 중탕기였다. 그가 중탕기의 유리 수조에 물을 붓고 전기 스위치를 올리자, 잠시 후 수조 안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직접 넣으시겠습니까?”

압둘의 말에 다니엘의 지시를 받은 그의 비서가 파베르제의 달걀을 들어 수조 안에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두터운 장갑을 손에 낀 그가 다시 달걀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열어보죠.”

이번에는 다니엘이 직접 손에 장갑을 끼고 매뉴얼에 적힌 대로 달걀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잠시 후,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달걀이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그 안에는 도윤이 예전에 보았던 납작한 금속 원통이 들어있었다.

“드디어 달걀이 속을 드러냈군요. 평범한 금속 통이라. 이것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왕세제께서 직접 열어보시겠습니까?”

이브라힘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가 통을 들어 잡아당기자 가볍게 뚜껑이 열렸다. 다니엘의 말마따나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애를 썼던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수월하게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뚜껑이 열리는 순간 실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어?”

압둘은 경망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내용물은 웬만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이, 이게 뭡니까?”

무서운 얼굴로 통에서 나온 물건을 노려보는 이브라힘을 대신해서 압둘이 이를 갈며 물었다. 그러나 마치 밀랍을 덧씌운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는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다니엘이 손을 뻗어 통에서 나온 물건을 집어 들었다. 비스킷처럼 생긴 초콜릿 과자. 비닐로 포장된 그것은 20세기 초의 러시아 황실에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절대로 아니었다.

“로스차일드 씨. 지금 우리를 농락하는 겁니까? 이게 무슨 질 낮은 장난입니까?”

압둘이 다시 한 번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다니엘이 정색을 했다.

“진정하세요. 황당하기는 그쪽보다 내가 더 심하니까. 지금 우리가 고작 당신들을 놀리고 싶어서 로마까지 이 달걀을 들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럼 뭡니까? 달걀 안에서 상표까지 인쇄된 과자가 나왔다는 건 당신들이 이미 달걀을 열어봤다는 뜻이 아닙니까?”

다니엘이 얼굴을 차갑게 굳히더니 코웃음을 쳤다.

“만약 내가 혼자서 달걀을 열 수 있었다면 도대체 뭣 때문에 당신들을 여기까지 불렀겠소? 안에서 나온 물건에 대한 권리를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까지 감수하면서.”

압둘이 다시 한 번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이브라힘이 팔을 들어 그를 말렸다.

“로스차일드 씨의 말이 맞아.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야. 바보는 더더욱 아니고.”

이브라힘이 다니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굽니까? 누가 이 달걀을 연 겁니까? 당신도 모르게, 그리고 당신보다 먼저.”

그러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다니엘이 이를 뿌득 갈았다.

“드레스너, 이 개 자식이…….”

“드레스너? 런던 크리스티의 제임스 드레스너 말이오?”

“그렇소. 이 초콜릿 과자의 상표나 상태로 볼 때 적어도 수십 년 전의 물건은 아닙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파베르제의 달걀은 계속 런던 크리스티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죠.”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달걀이 크리스티에 있는 동안 개봉됐다는 뜻이오?”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 직원이 혼자서 달걀을 독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을 테니까 현재로서는 드레스너 사장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드레스너 사장이 범인이라……. 그 친구가 도대체 무슨 재주로……. 그럼 지난 몇 년 동안 달걀이 크리스티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이브라힘의 말에 다니엘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내가 이 달걀을 손에 넣기 전에 이도윤 박사라는 젊은 친구에게 잠깐 빌려준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매뉴얼도 없는 그가 단 하루 만에 이걸 여는데 성공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이브라힘이 잠깐 압둘을 쳐다봤다. 이도윤? 그 이름이라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고, 그 자신도 열심히 시청했던 ‘트루쓰 앤 밸류’의 우승자였으니까.

이브라힘은 다니엘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천재적인 안목을 지닌 미술사 박사라고 해도 단 하루 만에 달걀을 비밀을 풀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라스푸친의 목걸이는 진즉에 햇빛을 보았을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크리스티의 드레스너 사장이 우리보다 먼저 파베르제의 달걀을 열어보았다고 합시다. 그럼 그 자는 어떻게 달걀을 열었을까요? 매뉴얼도 없이?”

그 말에 다니엘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솔직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연히 방법을 발견했을지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브라힘이 코웃음을 쳤다.

“이 달걀을 끓는 물에 빠트리려면 최소한 커다란 솥이 필요합니다. 드레스너 정도 되는 사람이 고가의 금은 세공품을 주방으로 들고 갔을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랬다고 쳐도 마침 거기에 커다란 솥이 있었고, 게다가 우연히 빠트리기까지 했다고요? 정말로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니엘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브라힘의 말마따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정확한 사정을 알아내려면 드레스너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이브라힘이 압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런던 크리스티의 드레스너 사장을 잡아서 심문하라고 해.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압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려고 하자 다니엘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잠깐만요. 드레스너는 유명인사입니다. 런던 한복판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가는…….”

그러자 이브라힘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다니엘을 쳐다보는 이브라힘의 눈이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씨. 당신 가문이 영국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더 이상은 우리 일을 방해하려 들지 마시오. 그때는 정말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다니엘의 눈에도 독기가 서렸다. 그러자 이브라힘이 다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달걀에서 초콜릿 과자가 나오는 순간, 당신과 나의 연대는 끝난 거요. 화가 나지만 오늘은 이만 참고 물러나겠소. 다음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로 주의합시다.”

이브라힘은 그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방 안에 벌려놨던 장비를 수습한 압둘과 비서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방안에 남아 있던 다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드레스너를 너희들이 잡아서 심문하겠다고? 런던 한복판에서? 웃기고 있네.”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이제는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의 싸움이었다.

* * *

도윤은 현소 화랑이 있는 인사동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김하선이 지목한 공동 전시회장 몇 군데를 돌았다. 창의적이고 신선한 작품들이 많아 나름대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 그림들을 가지고 기획 전시를 하려면 마케팅에 엄청 신경을 써야 하겠는데?”

그게 문제였다. 화랑은 그림을 예술품으로 보는 동시에 상품으로도 간주한다. 하지만 잘 팔리는 상품이 언제나 좋은 물건은 아닌 것처럼 훌륭한 예술품이 늘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다. 화랑은 좋은 예술품을 좋은 상품으로 만드는 곳이다.

화랑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반 회사들처럼 열심히 판촉하고 인맥까지 동원해야 한다. 비평가와 기자들을 만나 로비하는 건 일상이다. 그렇게 해도 매년 새롭게 주목받는 신인이 한두 명 있을까말까 한 게 현실이다. 그림을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보고 콘서트에 참석하느라 일 년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쓰는 사람들도 화랑에서 비슷한 가격의 그림 한 점을 사는 데는 깜짝 놀랄 정도로 인색하다.

도윤이 둘러본 전시회에 걸린 그림들은 대체로 괜찮았다. 신안으로 보면 희미하기는 하지만 빛이 흘러나오는 것들도 심심치 않게 존재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참신한 작품, 사서 걸어놓으면 벽면의 품격이 확 살겠다는 느낌이 와 닿는 작품이 좀처럼 없었다. 이런 그림들로 기획전을 하면 마케팅을 하는데 배 이상으로 힘이 든다.

그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드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다. 그가 김하선이 적어준 리스트에 있는 두 번째 전시회에 갔을 때였다.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도윤이 한 작품 앞에서 멈춰서서 잠시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미소를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머릿결에서 윤기가 나는 것으로 보아 입 주위를 무성하게 뒤덮은 수염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일부러 기른 게 분명해 보이는 남자였다.

“아, 예. 괜찮네요.”

그의 대답이 다소 건성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점이 괜찮아 보이던가요?”

“네?”

“제 그림의 어떤 점이 괜찮아 보였는지 물었습니다. 저 그림, 제가 그린 거거든요.”

도윤은 약간 당황했다. 뭐야 화가 본인이었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에 익다. 김하선이 준 파일에서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가만, 이름이 뭐였지?

“아, 네. 그랬군요. 독창적이고 신선하네요. 동양화가 분명한데도 얼핏 보면 서양화 같은 느낌이 들도록 묘사한 점이 특이합니다.”

도윤은 말을 하면서도 그림 옆에 붙어 있는 표지를 얼른 살폈다. 심상우. 풍경의 기억.

심상우? 아, 그 사람이구나. 도윤의 머릿속으로 김하선의 파일에 적혀 있던 상대방의 이력이 주르륵 흘러갔다. 개화예고 졸업생. 고등학교 때 전국 규모의 고교 미전에서 수상하고 서울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 동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침. 군대는 면제됐고, 석사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서 3년간 유학. 파일에 있던 화가들 중에 이력이 가장 빵빵했다.

‘뭐야. 안경도 안 썼고, 몸도 멀쩡해 보이는데 왜 군대가 면제됐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심상우의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고작 그것뿐입니까? 단순한 감정가가 아니라 미술사 박사까지 받은 분의 평치고는 너무 밋밋하네요, 이도윤 박사님.”

도윤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뭐야. 이 사람 말하는 게 왜 이렇게 도전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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