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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66화 (66/300)

66화

“저를 아십니까?”

도윤의 물음에 임상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으로 떼돈을 벌고, 나마타의 해바라기가 위작이라는 글을 발표해서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분이 아닙니까? TV 뉴스에 얼굴까지 소개된 천재를 명색이 화가라는 사람이 몰라봐서야 말이 안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말은 분명히 칭찬인데 임상우의 입가에 맺힌 비틀린 미소는 명백히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윤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라는 말은 과분합니다. 그저 그림을 감정하고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게 직업일 뿐인데, 어쩌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세상의 이목을 끈 거죠.”

“그런가요? 저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게 직업일 뿐인데 어쩌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세상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네요. 솔직히 부럽습니다. 화가도 아닌 감정가가 그 나이에 벌써 그렇게 유명 인사가 되다니.”

이 자식이 말장난을! 게다가 화가도 아닌 감정가? 상대가 선택한 단어들이 묘하게 비위를 건드렸다. 한 마디 쏘아붙일까 하다가 도윤은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남의 그림을 평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세상의 주목을 받아봤자 뭐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자기 그림을 그리는 게 진짜로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이지요. 그리고 일찍 핀 꽃이 일찍 지는 법입니다. 임 화백께서는 아직 젊고 실력도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저보다 더 유명해지실 거예요. 그림 잘 봤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도윤은 그만 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임상우는 그를 쉽게 보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냥 가시게요? 그러지 말고 이왕 오셨으니 제대로 한 번 평을 해주시죠? 독창적이니 신선하다느니 하는 애매모호한 인사치레 말고요. 서양화 같은 느낌이 나는 한국화라는 얘기는 제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얘기 아닙니까?”

뻔한 얘기? 도윤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면서 슬며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다시 등을 돌린 뒤 임상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전면에 있는 산의 모습은 서양의 유화처럼 색을 과감하게, 그리고 겹겹이 사용했네요. 일일이 점을 찍어 산 전체의 모습을 묘사한 건 점묘법을 차용한 거겠죠?”

도윤이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시작하자 임상우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매단 채 고개를 까닥였다. 그 모습이 마치 어디 계속 재주를 부려보라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산 뒤의 빈 공간을 커다란 여백으로 남겨둔 것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그 뒤에 단색 먹으로 단순하게 추상화시킨 섬들을 배치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착각할 이유가 없지요. 먹의 농담을 조절해서 섬의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한 것은 전형적인 동양화 기법입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서양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동양화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거기까지 말한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임상우를 쳐다봤다.

“잘 그린 그림입니다. 뉴욕에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어색하지 않게 잘 섞으셨네요. 아마 화가가 많은 연습을 통해 각각의 기법을 잘 소화한 덕분이겠지요. 그게 이 그림의 가장 뛰어난 점입니다.”

“동서양의 기법을 잘 소화해서 섞은 게 제 그림의 가장 뛰어난 점이라고요?”

“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원래부터 그걸 보여주려고 그린 게 아니었습니까?”

“다른 건 느껴지는 게 없고요?”

“글쎄요? 방금 말씀 드린 것만 해도 웬만큼 뛰어난 화가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그 밖에는 흠, 특이한 방식으로 잘 그린 풍경화라는 정도?”

임상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도윤을 노려봤다.

“이 박사는 굉장히 무례한 말을 태연하게 지껄이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제 그림에서 잔재주 말고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셨다…, 그게 본인의 예술적 감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혹시 안 드십니까?”

도윤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임상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제 예술적 감성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저 자신이 늘 통감하고 있지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이 그림에서 마땅히 느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있다면 임 화백께서 본인 입으로 직접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림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정신적 향기나 감정의 깊이 같은 게 안 느껴지십니까?”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본인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부끄럽냐? 이미 상대가 먼저 무례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쪽도 더 이상 굳이 예의를 지키려고 애쓸 이유가 없겠지? 도윤의 입가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미소가 맺혔다.

“설마 저 그림에서 화가의 정신적인 세계나 감정의 깊이 같은 것을 느껴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럼 처음부터 머리와 가슴을 연마하셨어야죠. 손가락만 고생시키지 말고. 애초에 화가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그림으로 드러나겠습니까?”

화가는 붓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을 대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 자신의 정신을 투영시키고, 대상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느낄 줄 알아야한다. 그래야 세상과 소통하고 남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당장 입에서 나오는 말만 들어봐도 임상우는 그저 솜씨 좋은 환쟁이일 뿐이었다.

도윤은 말을 마친 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번에는 임상우도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씩씩거릴 뿐 그를 잡지 않았다. 자식, 한 번 잡아보지. 그럼 진짜 말로 얻어맞는 게 얼마나 아픈지 제대로 가르쳐 줬을 텐데.

* * *

사흘에 걸쳐 김하선이 지목해준 전시회를 모두 둘러본 도윤은 다시 며칠 동안 전시회 일정이 없는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했다. 그들 대부분이 도윤의 얼굴을 알아보는 바람에 섣부른 감상이나 평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얘기만 할 수도 없으니 그건 또 그것대로 고역이었다.

“어때? 며칠 다녀보니까 눈에 쏙 들어오는 그림이 있던가?”

거의 일주일 만에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온 도윤에게 김하선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얼굴에 맺힌 미소를 본 도윤은 김하선이 일의 결과를 대충 짐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들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거다 싶은 작품이 없더라고요. 스킬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데 주장들이 약해요. 있지도 않은 독창성을 쥐어짜내려 들거나, 반대로 자기 혼자만 딴 세상에서 놀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팔릴 그림을 그릴지만 생각하는 화가들도 많고.”

“그래서 실망스러워?”

“솔직히 약간은요. 게다가 제가 못마땅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네가 못마땅해? 왜?”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하나. 제가 매스컴 좀 타더니 우쭐해서 남의 그림을 함부로 평하려 들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처음부터 저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네가 내 그림을 알아? 나이도 어린 자식이.’ 그게 자존심인지, 자만심인지…….”

김하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면서 속 좀 끓였나 보구나. 하지만 그런 사람한테도 계속 기회를 줘야 해. 그래야 자극이 되고, 자극이 멈추지 않아야 껍질을 깨고 나오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니까. 아직 젊은 친구들이잖아. 천재만 좋은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니까 계속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그건 저도 아는데 도대체 언제까지요. 제가 그냥 미술사 전공자이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화랑은 자선 기관이 아니잖아요. 예술가를 키우는 것도 좋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계속 공간을 빌려줄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그래서 우리도 신진 화가들을 초대하는 기획전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열잖아. 그렇다고 묘목을 키우지 않고 계속 이미 익은 열매만 따먹다가는 언젠가는 과수원 전체가 황폐해지고 말거야. 그럼 뭘 심어도 자라지 않아.”

맞는 말이다. 그리고 잘 알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화가들 탓만 할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집에다 몇 백만 원짜리 벽지를 바르면서도 정작 그 위에 십만 원짜리 그림 한 점을 걸려고 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화가들이 예술 혼을 불태울 수 있을까? 아무리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그걸 사주지 않으면 화가들은 굶어야 한다.

도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본 김하선이 씩 웃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캔버스 전체에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도윤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잡아채면서 물었다. 뒤늦게 예의 없이 굴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지만 김하선은 그저 씩 웃으며 사진을 더 넘겨보라는 손짓을 했다. 도윤이 이어지는 사진들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붓으로 한지에 그린 게 분명한 초상화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모두 수묵이나 수묵 담채로 빠르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나도 누가 그린 건지는 몰라. 아는 친구가 작년 가을에 대학로에서 봤다면서 찍어서 보낸 사진들이야. 한 번 직접 찾아가볼래?”

“대학로요? 대학로 어딘데요?”

“대학로 중간쯤에 길에다 이젤 세워놓고 즉석 초상화 그려주는 거리 화가들 있잖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야.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서른은 넘지 않았을 거래.”

“매일 나온다고 하던가요?”

“그것까지는 나도 몰라. 나한테 사진을 보내준 친구도 대학로를 지나다가 우연히 봤다니까. 한국화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이야 가끔씩 있지만, 뭐라고 할까, 필선에 힘이 있고 상투적이 느낌이 들지 않아. 게다가 거기 구름처럼 묘사된 그림은 진짜 재미있지 않아?”

“그러게요. 이건 뭡니까? 그냥 보기에는 캔버스에 먹물을 뿌린 것 같은데요?”

“캔버스가 아니라 광목천이었대. 광목천에다 어떻게 그런 모양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 진짜 그림이 아마 그거인가 봐. 초상화 그리면서 한쪽에 따로 치워둔 걸 친구가 굳이 보자고 해서 얼른 사진을 찍었다고 하더라고.”

도윤은 김하선의 휴대폰에 있던 사진들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전송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소지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로라고 하셨죠?”

“정말 가 볼 거야?”

“눈으로 직접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서요. 다녀오겠습니다.”

도윤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보내려던 계획을 접고 곧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기 전이었다. 김하선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윤은 그대로 새로 산 차를 몰고 대학로로 향했다.

* * *

도윤은 대학로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를 몰고 온 걸 후회했다. 그는 방통대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커피 하나를 사서 손에 들고 대학로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세 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도 한지에 수묵화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하루 종일 주차비만 날리고 돌아가겠네.”

이미 3월도 중순이 넘어 날이 슬슬 풀리고 있었지만, 거리에는 아직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길옆에 이젤을 걸어놓고 손님들을 기다리는 화가들 자체가 너무 적었다. 마찬가지로 추위를 무릅쓰고 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초상화를 부탁하는 인내심 많은 손님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저기, 혹시 여기 먹으로 한지에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는 안 나오나요? 나이가 이십대 중후반 정도 되는데.”

나중에는 그림을 그려주기 위해 앉아 있는 화가들을 일일이 찾아가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간혹 누군지 알겠다는 사람 역시 올해 들어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대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자리를 딴 데로 옮겼나?

결국 도윤은 그날 오후 네 시가 넘어서 아무런 소득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늘은 만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점심시간 때만 잠깐 나가서 살펴보면 돼. 나올 거면 보통 그 전에 나타날 테니까. 두 시가 넘어도 모습이 안 보이면 그날은 거기 안 온다는 얘기야.”

지친 모습으로 사무실로 돌아온 도윤을 본 김하선이 미안한 얼굴로 한 말이었다. 진즉에 좀 말씀을 해 주실 것이지. 생각해보니 사무실을 나갈 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 얘기를 하려던 거였구나.

다음날부터는 그냥 지하철을 이용했다. 11시 조금 너머 대학로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핀 뒤, 거리 화가들이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책을 읽었다. 점심을 먹고 두 시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그래도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근처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 사람 거리 화가를 아예 때려 친 거 아냐? 덕분에 교양만 팍팍 쌓이는 기분이네.”

주말도 없이 매일같이 대학로를 배회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 사이에 봄기운이 완연해지자 거리 화가들의 수가 전보다 많이 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윤이 찾는 수묵화 초상화가는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남산에도 올라가 봤지만 오랜만에 케이블카를 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보다 못한 김하선이 먼저 포기를 권했다.

“이번 전시회는 아무래도 그 친구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시 기획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만 다른 화가를 알아보자. 더 이상 화가 선정을 미루다가는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질 거야.”

도윤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김하선의 말이 맞다. 어차피 실력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의문의 화가에게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딱 사흘만 더 찾아볼게요. 그래도 안 나타나면 그때는 진짜 포기하겠습니다.”

그게 도윤이 스스로의 미련에게 허가해준 마지막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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