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다음 날 오전, 도윤은 기약 없는 화가 찾기를 그만 두고 사무실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그럼 도대체 누구를 섭외해야 하지? 막상 기존의 명단에 있던 화가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려고 하자, 그건 또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가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혀를 차고 있을 때,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소더비의 까미유. 번개 같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박사. 잘 지냈어요? 서울 날씨는 어때요? 거기도 이제 봄이죠?”
“네. 아직도 좀 쌀쌀하긴 하지만 뉴욕보다는 따뜻할 거예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까미유 씨는요?”
“나야 이 박사 덕분에 올해 초부터 늘 짜릿하고 흥분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드디어 감정 결과가 나왔어요. 이 박사가 맡긴 다섯 송이 해바라기 말이에요. 그거 네 송이는 진짜인데 한 송이는 가짜래요.”
“하. 하. 하. 웃어줬으니까 됐죠? 솔직히 재미없어요. 한 송이가 가짜는 또 뭐예요?”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뜻이죠. 소더비 감정가들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초빙한 감정가들의 의견도 대부분 일치했어요. 진작이래요.”
“대부분이라고요? 위작이라고 감정한 사람들도 있어요?”
“두 사람이요. 고흐 박물관하고 도쿄의 국립 서양미술관에서 온 감정가들이 위작이 의심된다는 견해를 내놨어요.”
도윤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리 감정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래서 소더비의 결론은 뭐예요? 진작입니까, 위작입니까?”
“우린 당연히 진작이라는 쪽이죠. 내부 감정가들 의견은 만장일치니까요. 며칠 내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고흐의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발견되었다고 정식으로 발표할 거예요.”
“고흐 미술관하고 국립 서양미술관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자기네들 감정 의견을 무시했다고.”
“무시 안 해요. 그 두 곳에서 위작 의견을 냈다는 사실도 발표문에 포함시킬 거예요. 진작으로 감정한 이유와 위작으로 감정한 이유를 양쪽 모두 자세하게 공개해서 발표문을 본 사람들이 각자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고요.”
뭐? 소더비는 도윤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섯 송이 해바라기에 대해 엑스레이 검사와 성분 분석까지 실시했다. 반면에 고흐 미술관과 국립 서양미술관에서 온 감정가들은 보나마나 안목 감정에 의지해서 감정 의견을 냈을 것이다. 도윤은 까미유의 말처럼 발표가 이루어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짐작됐다.
“위작 의견을 낸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시려고요?”
그의 말에 까미유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권위 있는 감정사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짓거리를 했잖아요. 그럼 대가를 받아야죠.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공개되면 여러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직접 진위 여부를 판단할 게 분명해요. 그럴 때마다 그 두 사람들의 감정 결과는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될 거예요.”
까미유는 위작이라고 감정 의견을 낸 두 사람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거침없이 두 사람을 비난하던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슬쩍 낮추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판매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는 거예요? 만약 다섯 송이 해바라기를 위탁한 사람이 이 박사라는 게 알려지면 다시 한 번 크게 화제가 될 거예요. 그럼 그림 값이 현재의 예상보다 더 오를 가능성이 커요.”
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도윤은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선을 지켰다.
“이름이 밝혀지면 곤란한 사정이 있어요.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한 끝에 부탁한 거니까 위탁자의 신분은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흐음. 본인이 정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았어요.”
까미유는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도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전화를 끊고 나자 다소 처졌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왔다. 결과를 낙관할 수는 없지만 까미유는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경매에 붙여질 경우 1억 달러 가까운 낙찰가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험이 많은 그녀이니까 아마 결과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쪽 일은 소더비에게 맡겨두고, 나는 또 내 일을 해야지. 김 실장 아저씨한테 말한 대로 딱 사흘만 더 대학로를 돌아보자.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지.”
도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 *
거리 화가라고 하면 대부분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사실상 전 세계 관광지의 일상적인 풍경이 된 지 오래다. 비가 오지 않는 날 뉴욕 센트럴 파크 남쪽 입구에 가면 수십 명의 거리 화가들이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화가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한국인과 중국인들인데, 대부분은 미술 전공자들이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근처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로마의 라보나 거리와 도쿄의 우에노 공원 등지에서도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팔거나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무명화가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서울에도 거리 화가들이 모이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대학로와 남산이다.
“이 친구, 내가 찾고 있다는 걸 알고 그동안 피해 다녔던 거 아니야?”
뉴욕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어온 이틀 후, 도윤은 대학로에서 그토록 찾던 인물을 드디어 발견했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었다. 그러나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십대 중반의 청년 옆으로 다가가자 한지 위에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초상화가 보였다. 사진에서 보았던 과감한 필선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바로 그 그림이었다.
‘너 도대체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던 거냐?’
한편으로는 반갑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슬그머니 화도 났다. 막판 반전도 아니고, 하루만 더 있으면 미련 없이 포기하려던 참에 딱 등장하는 건 뭐냐? 이럴 거면 사람 고생 시키지 말고 며칠만 더 일찍 나타나든지.
청년은 이젤 대신 캠핑용 테이블을 펼쳐놓고 그 위에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납작한 접이식 합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A4 용지 두 장 크기로 자른 화선지를 펼쳐놓은 상태였다. 화선지 옆으로는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물감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청년의 맞은편에는 미녀와 야수 한 쌍이 나란히 앉았다. 미녀는 예쁜 미소를 유지하느라 볼을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고, 야수는 무료한지 근육이 툭툭 불거진 팔을 비틀다 가끔씩 청년을 노려봤다. 미녀의 요청 때문에 내키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화선지 위에서는 미녀의 미소 띤 얼굴이 빠른 속도로 완성되는 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옆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도윤은 화선지 위를 오가는 붓놀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붓놀림에 거침이 없는 걸로 봐서는 연습을 무지하게 많이 한 솜씨네. 선의 흐름이나 먹의 농담을 조절하는 방식도 제대로 배운 게 틀림없고. 미대 출신인가?’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고 정해진 법칙은 없다. 그러나 서양화든 동양화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개발된 기법이 있게 마련이고, 학생들은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기법들을 익히게 된다. 진정한 화가가 되려면 기존의 기법들을 능숙하게 활용하되,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눈썰미가 대단하네. 대상의 특징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어.’
청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누가 봐도 그럴 듯한 수묵 초상화 한 점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림을 받아든 미녀의 얼굴이 환해진 것으로 보아 마음에 쏙 든 게 분명했다.
“여기 도장은 안 찍어줘요? 동양화에는 원래 그런 거 찍잖아요.”
미녀의 말에 청년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낙관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미녀가 입을 삐죽하더니 그림을 챙기면서 옆에 있는 야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놀려놓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 찍어주지. 동양화 그리는 사람이 낙관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야수가 투덜거렸지만 청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직 낙관을 찍을 만한 솜씨가 못 돼서요. 죄송합니다.”
듣고 있던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보통 거리의 화가들도 초상화를 그린 뒤에는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어준다. 그게 그림을 더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년의 솜씨는 낙관을 찍을 주제가 못 된다고 하기에는 너무 뛰어났다.
“저기…….”
도윤이 청년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그냥 갈 줄 알았던 야수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에이, 기분이다. 나도 한 장 그려줘요. 있는 그대로. 아~주 멋있게.”
이런 젠장. 야수의 갑작스러운 변덕 때문에 도윤은 또 한 장의 초상화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청년은 야수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거침없는 붓놀림이 한 동안 이어지자 야수의 특징을 아주 잘 살려낸 또 한 장의 초상화가 뚝딱 완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림을 받아든 당사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 곰탱이는 뭐야? 아까는 잘 하는 것 같더니 내건 대충 그렸네? 하나도 안 닮았어.”
아냐. 그림을 대충 그린 게 아니라 네가 워낙 대충 생겨서 그래. 거울도 안 보고 사니? 털 빠진 곰 그거 딱 너잖아. 도윤은 야수가 그림 값을 내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며 트집을 잡더니 초상화를 챙기고는 만 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만 원입니다.”
청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자 야수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여기가 무슨 백화점도 아니고 정찰제로 장사하겠다고? 물건이 불량이면 가격을 깎아주는 게 당연하지. 만 원만 받아요. 이것도 그냥 가려다가 주는 거니까.”
“그럼 그림을 돌려주고 그냥 가십시오. 그림 값은 안 받겠습니다.”
야수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맺혔다. 녀석이 챙겼던 초상화를 도로 꺼내더니 청년의 눈앞에 들이대고 부채처럼 흔들어댔다.
“뭐야? 꼴에 자존심이 있다는 거야? 그림을 돌려줘? 그림을 쉽게 그리더니 말도 참 쉽게 하네? 이걸 돌려주면 나는 뭐 하러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건데? 당신 연습하라고 모델 서 줬던 거야? 이야, 그럼 내가 그림 값을 줄 게 아니라 모델료를 받아야겠네?”
딱 보니까 평소에도 남에게 시비를 걸고 깽판을 치는데 이골이 난 녀석이 분명했다. 야수의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휘고 꺾이던 초상화가 결국은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졌다. 순간, 청년의 입술이 위험하게 꿈틀거렸지만 다행히 폭발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초상화하고 돈하고 그냥 다 가지고 가세요.”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앞에 있던 캠핑용 테이블이 옆으로 날아갔다. 야수가 발로 걷어찬 것이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감이 사방으로 튀면서 청년의 옷과 얼굴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도윤에게까지 묻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뭐 그냥 가지고 가? 지금 누굴 거지 취급하는 거야? 그림은 엿같이 그리는 주제에 네가 무슨 진짜 화가라도 되는 줄 알아?”
도윤은 그림 구경하다 졸지에 물감 세례를 받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야수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오른팔을 쭉 뻗어 청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옆에 있는 도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놈이 팔을 흔들자 청년의 고개가 딸랑이 장난감처럼 앞뒤로 춤을 췄다. 이 미친 새끼가!
“이 아저씨, 참 힘 좋네. 아무리 그래도 법치 국가에서 아무데서나 이러면 안 되지.”
도윤이 이를 지그시 깨물면서 야수의 오른쪽 팔목을 쥐었다. 녀석의 손목 전체를 밀면서 손바닥을 이용해 살짝 밑으로 꺾자 청년의 멱살을 잡았던 손이 맥없이 풀렸다. 그러자 야수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넌 또 뭐야, 이 새끼야.”
붕 하는 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다. 아, 이 녀석 손이 하나 더 있었지?
도윤이 몸을 옆으로 틀며 야수의 팔을 쥔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녀석의 왼손이 자신의 오른손과 부딪치며 위로 튕겨 올라갔다.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녀석의 팔을 등 뒤로 꺾으면서 다른 손으로 머리를 잡아 눌렀다. 그 상태에서 몸을 야수의 허리에 바짝 붙이자 놈은 거칠게 발버둥을 치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도윤이 야수의 팔을 더욱 세게 꺾으면서 놈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넌 안 보이겠지만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 중이거든? 네가 먼저 주먹을 휘두르는 거 다 찍혔어.”
야수의 본성은 끝까지 갈 것을 외쳐댔지만 녀석의 좁쌀만 한 이성이 다행히 제 기능을 했다. 놈의 몸부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도윤은 그제야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 녀석의 몸을 밀어서 뒤로 물러서게 했다.
“당신 때문에 옷이 엉망이 됐어. 모르고 한 짓이겠지만 먹물이 옷에 묻으면 잘 안 지워지거든? 액땜 한 셈 칠 테니까 곱게 가라. 아니면 나랑 같이 경찰서까지 가든가.”
어느새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싼 채 구경하고 있었다. 미녀가 사방을 힐끔거리면서 야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녀석도 도윤을 노려보면서 마지못한 듯 자리를 떴다.
“아, 자식들. 힘 좋으면 차라리 노가다를 뛸 것이지, 왜 아무데서나 힘자랑을 해?”
도윤이 손을 탁탁 털면서 뒤를 돌아보자 청년은 이미 주변에 흩어진 물건들을 치우고 있었다. 캠핑용 테이블은 다리가 꺾였고, 물감 그릇 가운데 몇 개도 박살이 난 채 뒹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도윤이 얼른 청년을 도와 흩어진 도구를 수습하면서 물었다. 청년이 입술을 몇 번 씰룩거리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기는요. 나도 순간적으로 열이 받아서 나섰던 것뿐인데요, 뭐.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하죠? 이도윤이라고 합니다.”
도윤이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자 청년이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알아요. 이도윤 박사님이시죠?”
“절 아세요?”
“트루쓰 앤 밸류 재미있게 봤어요. 우승 축하드립니다.”
흠, 유명인이 된 게 이럴 땐 좋은 점도 있네. 도윤이 씩 웃었다.
“제 이름은 이미 아신다고 했고,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오윤수예요.”
“아, 오윤수 씨구나. 상황이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만나서 반가워요.”
도윤이 상대방의 손을 꽉 잡았다. 오윤수라.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