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69화 (69/300)

69화

화랑의 빈 전시실 하나가 온통 오윤수의 그림으로 가득 찼다. 그의 그림 가운데는 표구가 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림의 특성보다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도윤은 표구가 안 된 그림들은 일단 집게를 이용해서 벽에 걸었다.

“보시기에 어떠세요?”

가져온 그림들을 모두 걸거나 펼쳐놓은 도윤이 김하선에게 물었다. 그는 꽤 공을 들여서 전시실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독창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일단 상업성은 있어 보이네. 그림에서 자기주장도 확실하게 느껴지고. 결국 관건은 얼마나 홍보를 잘 하느냐의 문제가 될 텐데…, 이 친구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나?”

“네. 미대 중퇴에 군대 갔다 왔대요. 대학을 중퇴했다지만 그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려서 그런지 스킬은 이미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다듬어졌어요. 자기 그림에 대한 생각은 한창 성장 중인 거 같고.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친구예요.”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그거 좋네. 여러모로 이번 기획전의 성격에 어울리는 그림들이야. 근데 몇 작품은 전시 기획할 때 골머리 좀 썩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 전시실에는 중간에 기둥이 없으니까 일부러 원통을 몇 개 설치해야 할 거예요. 천장에서 바닥까지 쥐어짠 빨래처럼 늘어뜨려야 하는 작품도 있고.”

“그거야 우리가 고생을 좀 하면 되고. 전시를 하게 되면 장르는 뭐로 소개할 거야? 현대 한국화? 아니면 현대 미술?”

“그냥 현대 미술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국화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이상하게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게다가 먹과 붓을 사용했다 뿐이지 이 친구 그림을 굳이 한국화라는 장르에 구속시킬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그건 그렇지. 어차피 현대 미술은 소재나 도구의 제약을 벗어난 지가 한참 됐으니까.”

나이가 적다고는 하지만 어떤 그림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은 아무래도 도윤이 김하선에 비해 뛰어났다. 반면에 그 그림이 한국이라는 특정 미술 시장에서 통할지의 여부는 역시 김하선의 판단을 따르는 게 좋았다. 두 사람이 모두 오윤수의 그림을 전시회에 초대하는데 동의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부터 너한테 맡긴 일이다. 김 실장도 동의했다니까 최선을 다해서 진행시켜 봐. 초대한 화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세준은 전시실에 와서 오윤수의 그림을 한 바퀴 쓱 둘러보더니 그렇게 간단한 코멘트만 남기고 사라졌다. 도윤이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김하선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마음에 드신다는 뜻이다. 대표님 말씀대로 이대로 진행시키면 돼.”

누구보다 아들의 능력을 잘 아는 이세준이었기에 처음부터 이번 전시회를 믿고 맡길 작정이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역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좋은 화가를 발굴했다. 전시회를 성공시키기 위한 일의 절반을 무사히 완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시실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세준이 화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한 것은 어설픈 화랑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 미리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었다. 옆에 김하선이 있으니까 알아서 잘 챙기겠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한 마디 덧붙인 것에 불과했다.

“정말입니까? 정말 제 그림으로 전시회를 하기로 결정했다고요?”

전화를 받은 오윤수는 내내 무표정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격했다. 전국의 미대에서 서양화나 동양화를 전공한 졸업생들이 일 년에도 수백 명씩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전업 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순수 미술을 전공했어도 졸업 후에는 대부분 화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졸업도 하지 못한 주제에 초상화를 그려가면서까지 끝내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오윤수는 사실 무모하다는 평을 들어 마땅했다. 누구보다도 오윤수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오기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 말고는 따로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다.

그런데 아직 이십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에 벌써 자기 이름으로, 그것도 제법 큰 화랑에서 초대전을 열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꿈만 같았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돈으로 공간을 빌리는 이른바 대관전을 열기도 한다. 하지만 오윤수에게 그런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는 대학로에서 로또를 맞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냥 현대 미술로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산수나 화조를 그리는 건 제 성향과 맞지 않았거든요.”

오윤수는 전시회의 장르를 현대 미술로 하자는 도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건 전시 계획을 짜는 한편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것이었다.

도윤은 도윤대로 이번 일이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아트 딜러, 혹은 미술상들은 원래 신진 화가를 발굴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게 가장 핵심적인 존재 이유라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미술상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상업적 투자이기도 했다.

“내가 한국의 볼라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건 도윤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의 롤모델은 인디아나 존스가 아니라 20세기 초의 전설적인 아트 딜러 앙부르아즈 볼라르였다. 르노와르, 세잔느, 피카소의 그림에 어떤 여자보다도 더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자, 그들을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훌륭한 화가 뒤에는 훌륭한 딜러가 있다. 도윤은 그 훌륭한 딜러가 되고 싶었다.

* * *

본격적인 전시회 준비에 들어가자 오윤수는 초상화 그리는 일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거의 매일 같이 현소 화랑으로 나와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일일이 의견을 제시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직접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간당간당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시회 준비로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던 어느 날, 도윤이 오윤수를 조용히 따로 부르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그림 값이지.”

오윤수는 도윤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 그가 먼저 형이라고 부를 테니 말을 놓아달라고 부탁해서 도윤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봉투를 받아든 오윤수는 어리둥절했다.

“그림 값이라뇨? 그림은 아직 전시도 안했는데 무슨 그림 값을 줍니까?”

“전시는 안했어도 이미 팔린 게 있어. 저기 ‘구경꾼’하고 ‘도시 유감’ 두 점.”

“벌써요? 누가 샀는데요?”

“나.”

도윤이 씩 웃었다. 그가 쥐어준 봉투를 슬쩍 열어본 오윤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이게 다 얼마입니까?”

“천만 원. 구경꾼은 사백만 원, 도시 유감은 육백만 원이야. 우리나라는 아직 그림 값을 호당 얼마로 계산하잖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관례가 그러니까 일단은 따라야지. 이번 전시회에서 네 그림은 호당 10만원으로 가격을 매겼으면 싶다.”

“호당 10만원이라고요?”

“왜? 적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얘기해. 그림 값은 화가하고 화랑이 상의해서 정하는 거니까. 더 올릴까?”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흑.”

오윤수는 가슴이 북받쳤는지 말을 맺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도대체 자신이 전생에 무슨 선행을 쌓았기에 이런 행운이 찾아왔을까. 머릿속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달리는 지하철 창문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데뷔하는 신인 화가들의 그림은 호당 6만원에서 8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 대학원생들의 그림은 그보다 더 싸다.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중견 화가가 호당 30만 원가량을 받고, 유명 화가가 되면 호당 몇 백만 원이 우스울 정도로 가격이 뛴다.

하지만 오윤수는 대학원생은커녕 미대도 졸업하지 못한 길거리 초상화 화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보통 신인 화가의 전시회에서는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화가의 지인들이 돈을 내서 그림을 사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도윤은 이제 막 데뷔하는 오윤수의 그림을 호당 10만원으로 계산해서 사주었다. 그건 지인의 격려금이 아니라 화랑의 투자라고 봐야 옳은 돈이었다. 이 화가의 그림은 다른 것들도 그 가격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는 화랑 측의 공식적인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제 그림은 하나도 안 팔릴지도 모르는데…….”

모르는 게 아니라 아마 한 점이나 팔리면 다행일 것이다. 누가 생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 화가의 그림을 단지 예술적 가치만 보고 사겠는가? 오윤수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엉킨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적선한 게 아니라 투자한 거니까. 지금은 저 그림들이 몇 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십 년이 지나지 않아서 열배 백배로 뛸 거야. 네가 아니라 내 눈을 믿고 투자한 거니까 괜히 고마워할 필요 없어.”

도윤이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젓자 오윤수가 말없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설사 눈앞의 젊은 천재가 자신을 벗겨먹으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 * *

전시회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홍보 관련 문제 때문에 외부에 나갔다 들어오던 도윤은 전시장 한 가운데에 아름드리 기둥 두 개가 새로 들어선 것을 발견했다. 기둥 하나에는 이미 뺑 둘러 그림이 그려진 광목천이 감겨 있었고, 나머지 하나에도 오윤수가 직접 달라붙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천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건 모양이 이상하다? 전에 봤던 게 아닌데?”

도윤이 다가가며 묻자 오윤수가 잠시 작업을 멈추더니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 이건 친구 화실에 두었던 걸 가져온 거예요. 저번에 형한테 준 것보다는 이걸 전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김 실장님한테는 허락을 받았어요.”

“그래? 근데 그건 통짜 그림이 아니네? 광목천을 비스듬히 겹쳐 감아야지만 의도했던 모양이 나오는 거야?”

“네. 아나모포시스(Anamorphosis)라고 아시죠? 왜곡그림 말이에요.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만든 거예요. 긴 천에 그린 그림을 기둥 주위에 뺑뺑 돌려 감아야 비로소 전체 모양이 나오도록 그려봤어요.”

안다.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나온 천에 있는 문양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니까.

“그럼 이것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거나 오목 거울 같은데 비춰봐야 하는 거야?”

“아니요. 그렇게 하려면 처음부터 거울을 놓거나 정확히 비율을 계산해서 그렸어야죠. 이건 그냥 기둥 주위에 잘 감기만 하면 모양이 나오도록 만든 거예요.”

“그래? 재미있기는 한데, 이건 일반인들이 사서 집에 가져다놓기는 좀 그렇겠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한 거야?”

“아, 별건 아니고요. 일종의 생활 미술 같은 거예요.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이용해서 거기에 맞는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어봤어요.”

오윤수는 광목천에 먹물을 들였다가 그걸 다시 빨아서 말리는 작업을 자주 반복했다. 그러자니 광목천을 말릴 만한 넓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마침 고시원 뒷산에 커다란 정자가 있었다. 쉬는 날이면 작업한 천을 들고 올라가 그곳 난간에 널어놓고 말리고는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자의 기둥에 천을 감아서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오브제들을 창작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런 거죠. 언젠가는 그 정자에 제가 그린 그림들을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하지만 도윤은 오윤수의 말을 들으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다른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생활미술이라고? 주변에 있는 오브제를 활용해?’

그는 김하선과 오윤수에게 전시회 준비를 부탁한 뒤 자기 책상으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에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나왔던 천으로 만든 그림사진을 띄운 그는 한참 동안 그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이 물건의 원래 주인은 알렉세이 황태자잖아. 그 양반은 몸이 약해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만 했었지? 그럼 그림의 비밀을 풀기위해 힘들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을 거야.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가 그걸 몰랐을 리도 없고.’

도윤은 인터넷으로 에르미타주 미술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 미술관인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원래 제정 러시아의 겨울 황궁이었다. 몸이 불편한 알렉세이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 일가가 볼셰비키 혁명군에 의해 끌려 나갔던 바로 그 장소. 도윤은 황태자의 침실로 쓰였던 방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아니야 이건. 미술관으로 개조하면서 방이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잖아.”

한 시간이 넘게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졌지만 끝내 제정 러시아 시절의 황태자 방을 찍은 사진은 발견하지 못했다. 황궁 내부 모습을 찍은 사진이 몇 장 있기는 했지만 모두 황태자의 침실과는 무관했다. 결국 도윤은 몇몇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혹시 20세기 초반의 황궁 내부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답장이 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예상과는 달리 하버드에 다닐 때 함께 공부했던 동창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뒤늦게 도윤의 ‘트루쓰 앤 밸류’ 우승을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소더비 리뷰에 실린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소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최근 연구와 관련해서 어렵게 얻은 것이라며 몇 장의 사진 파일을 첨부했다.

파일을 내려 받아 모니터로 띄운 도윤은 사진들을 검토하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랬군.

모니터에는 어린 알렉세이 황태자가 자신의 침실에서 일가족 몇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자 이번에는 황태자가 평소에 타고 다니던 휠체어 사진이 나왔다. 도윤은 예전에 휴대폰으로 찍었던 파베르제의 천 그림 사진을 띄워서 휠체어와 비교했다. 짐작이 맞았다.

“그 천은 원래 황태자가 타던 휠체어 양쪽 손잡이에 걸쳐서 묶으면 제 모양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진 거였어. 그건 몸이 약한 황태자라고 해도 휠체어에 앉은 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 그리고 일단 그림이 완성되면 황태자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단번에 그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게 고안된 거야.”

파일을 다시 앞으로 돌려 황태자의 침실 사진을 꼼꼼히 확인한 도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그림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다소 복잡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드디어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풀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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