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5월 중순, 현소 화랑 전시실에서 드디어 오윤수의 데뷔전이 열렸다. 청파 갤러리의 최수아 관장과 한강 신문의 우재경 부장이 이세준과 서연희 부부를 비롯한 현소 화랑 관계자, 그리고 전시회의 주인공인 오윤수와 나란히 서서 테이프를 끊었다. 미리 당부를 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윤수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눈물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는 눈치였다.
본격적인 전시회에 앞서 초대된 손님들에게 간단한 음식과 다과를 대접하는 조그만 연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음료수 잔을 들고 서로 인사하며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도윤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오윤수의 그림 세계’라는 제목으로 짧은 강연을 했다.
“오윤수 화백의 그림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양적 미학 정신에 입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또는 어떤 게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라는 것이 과연 그토록 선명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대상의 형체를 무너뜨리고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그의 그림을 보는 동안 ……….”
도윤의 강연은 다분히 미학적인 비평의 성격을 띠었고, 별로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부러 그런 식의 단어와 표현들을 선택했다. 화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자칫 그의 그림을 여물지 않은 초보 화가의 미숙한 도전쯤으로 치부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의 강연은 주로 전시회에 참석한 몇몇 미술 비평가나 신문기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화랑 측에서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나중에 어딘가에 글을 쓸 때 알아서 격을 맞춰달라는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앞으로 오윤수의 그림을 평할 때 참고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향과 키워드를 던져준 것이다.
인사말을 겸한 짧은 강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림을 둘러보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날만큼은 도윤과 김하선은 물론이고 이세준과 서연희까지 나서서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각자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부른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전시회 첫날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조명근도 윤다솔 과장과 함께 참석했다. 그는 윤 과장의 팔짱을 낀 채 그림을 감상하다 한쪽에 서 있는 도윤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 친구 어디서 찾았어? 정말 대학로에서 주은 거야?”
명색이 대한민국 검사라는 양반이 표현 참 저렴하기도 하지.
“줍다니! 대학로에서 발견했어요. 채석장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은 거라고요.”
“글쎄? 다이아몬드까지는 모르겠고, 최소한 돌덩이가 아닌 것 같기는 하네.”
“돌덩이로 얻어맞을 소리 하지 말고 왔으면 그림이나 하나 사요. 장래가 유망한 화가니까. 이런 기회에 투자해야 형도 나중에 떡값 안 받고 검사 생활할 수 있을 거 아녜요.”
“야, 그런 거 없어도 떡값 같은 건 안 받아. 이 자식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리고 검사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림을 사냐?”
얼씨구, 그러셔? 떡값 안 받는 건 인정해줄 수 있지만 돈이 없는 건 잘 모르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를 치던 조명근의 목소리가 금세 작아졌다.
“근데 도윤아. 이 그림들 가운데 어떤 게 오를 것 같아? 가격 말이야.”
“돈 없다면서요?”
“에이, 그래도 여기까지 온 성의가 있지. 그러지 말고 값이 확 오를 거 하나만 찍어줘.”
“찍긴 뭘 찍어요? 카지노에 온 줄 아나? 여기 있는 거 다 크게 오를 테니까 아무거나 골라요. 안 좋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걸 보려고 애쓰지 말고.”
“야, 인간 이도윤 요즘 매스컴 좀 타더니 말을 막 한다? 내가 검찰청 독수리야. 매의 눈으로 범인들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하면 견적이 딱 나온다는 거 아냐? 이놈은 3년, 저놈은 5년. 그리고 저 분은 무죄.”
“독수리가 웬 매의 눈? 아무튼 형은 범인 관상이나 연구하시고, 그림 보는 건 그냥 나한테 맡겨요. 정말 농담으로 하는 얘기 아니니까 마음에 드는 그림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요. 뭘 골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알았다. 내가 네 얼굴을 봐서 골프채를 팔아서라도 오늘 하나 사갈게. 대신 다음에도 어려운 일 있으면 잘 부탁한다? 저번에 겸재 정선 그림 건은 고마웠어. 차장님도 대신 인사 전해 달라 그랬는데 내가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다. 파이팅!”
파이팅은 무슨? 보나마나 조명근은 자신이 아닌 윤다솔 과장이 선택한 그림을 살 게 분명했다.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오윤수의 그림이 팔리는 것이다.
전시회 첫날, 도윤은 거의 자리에 앉을 여유가 없었다. 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림들을 설명해주고 돌아서면 어느새 또 눈에 익은 사람이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곤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첫날 전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다리가 뻐근해진 도윤에게 직원이 찾아와 조용히 말했다.
“팀장님. 벌써 전시된 그림의 삼분의 이가 팔렸어요.”
“정말이요?”
“네. 신인의 데뷔 전시회 성적이 이 정도라면 대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대박이라고 할 수 있겠는 게 아니라 그냥 대박이었다. 앞으로도 전시회가 며칠 더 남았으니까 이 정도면 완판을 기대해도 좋을 만한 반응이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려고 전시장을 둘러봤지만 오윤수의 모습이 영 보이지 않았다.
“오 화백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안 보이네?”
“글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직원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현소 화랑 건물을 샅샅이 뒤진 끝에 전시장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구 계단에 혼자 앉아 있는 오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뭐야? 우는 거야? 자식 같은 그림이 남의 손에 넘어가니까 막 서럽고 그래?”
도윤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자 오윤수가 화들짝 놀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냥 모든 게 감사하고 꿈만 같고 그래서…….”
도윤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다른 일도 아니고 창작이고 예술이잖아. 재능이 있어도 노력을 안 했으면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았겠지. 재능도 없이 노력만 했으면 세상을 원망하게 됐을 테고. 넌 두 가지를 다 갖췄으니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돼.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언젠가는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거야. 어차피 올 게 지금 왔다고 생각해.”
오윤수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요? 하지만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평생 초상화만 그리면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언제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고요. 형을 만나지 않았으면 영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형은 제 은인이에요.”
“그렇게 생각해? 그럼 앞으로도 열심히 그려서 우리 화랑에 전시해. 내가 보기에 넌 앞으로 더 성장할 녀석이거든. 나도 네 덕에 돈 좀 벌어보자.”
“네. 그럴게요. 꼭 그럴게요.”
“약속이다? 그럼 이제 그만 궁상떨고 전시장으로 돌아가자. 손님들이 화가 어디 있냐고 자꾸 묻잖아. 네 전시회니까 네가 주인 노릇을 해야지. 어깨 펴고.”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서려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나저나 너 이번 전시회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고시원에서 그만 나오는 게 낫지 않아? 친구 화실에 빌붙지 말고 네 작업실도 하나 만들고.”
“그거야 그림이 잘 팔린 다음에나 생각해야죠. 형이 준 돈 덕분에 당분간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이 됐으니까 그 문제는 아직 급하지 않아요. 천천히 할게요.”
“천천히는 무슨? 네 그림 벌써 삼분의 이나 팔렸어. 아마 전시회 끝날 때쯤이면 거의 다 팔릴 거다. 어디서 어떻게 살지 지금부터 생각해 둬.”
“정말이요?”
오윤수는 도윤이 조금 전에 직원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도윤이 씩 웃었다.
“고시원은 무조건 나와. 작업실도 알아보고. 아참, 그리고 작업실은 꼭 한국에 만들 필요 없어. 네가 원하면 뉴욕, 파리. 런던 어디든 내가 알아볼 테니까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
“외국에다 작업실을 낸다고요?”
“큰 화가가 되려면 크게 놀아야지. 외국물을 먹어야 그림이 더 잘 그려지는 건 아니지만 화가는 늘 벽을 깨고 나가는 사람이잖아. 환경을 바꾸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김환기가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걸작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질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에 자신을 부딪쳐보는 게 틀을 깨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오윤수처럼 젊은 화가에게는. 도윤은 그가 지금보다 더 큰 화가가 되길 바랐다.
* * *
드레스너 사장에 대한 심문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르보 회장과 다니엘 로스차일드는 금쪽같은 시간을 아낌없이 낭비하며 이틀에 걸쳐 드레스너에게 무려 세 번에 걸쳐 자백제를 투여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질 때까지 심문을 계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쓸모 있는 정보는 전혀 얻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드레스너가 달걀을 열지 않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놈이 그걸 열었을까요?”
드레스너를 직접 심문했던 르보 회장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억지로 참고 있다 뿐이지 속이 좋지 않기는 다니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소파에 쓰러져 있는 드레스너를 힐끗 쳐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걀에서 나온 초콜릿 과자는 15년 전에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겁니다. 크리스티에서 파브리제의 달걀을 사들인 게 삼 년 전이었으니까, 그 직전부터 15년 전까지 달걀을 소유했던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의 말을 들은 르보가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에 달걀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세 명이오. 그 가운데 한 명은 이미 죽었으니까 남은 건 둘이지. 하지만 그들은 드레스너처럼 함부로 붙잡아서 심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둘 다 재력과 명망을 함께 갖춘 유명인사들이란 말이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어요.”
그건 다니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조사 범위를 단지 그 두 사람에게로 좁힐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무리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쉬운 것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설사 그 둘 중 한 명이 달걀을 열어 목걸이를 꺼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걸 가지고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라스푸친의 목걸이가 비록 은 세공품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그다지 값비싼 물건이 아니오.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나왔으니 나름대로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이미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르보가 화가 나는지 옆에 있던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애매하고. 이번 일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한동안 씩씩대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 이도윤이라는 친구는 어떻습니까? 그 친구도 조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도윤도 달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르보의 말에 다니엘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작 하루 동안 잠깐 빌렸을 뿐이에요. 아시겠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매뉴얼도 없이 하루 만에 달걀을 여는 방법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겠다는 거요? 나는 쓸 만한 수족 하나를 저렇게 병신으로 만들어버렸소. 그깟 젊은 놈 하나 더 병신으로 만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르보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친구에게도 자백제를 놓자는 겁니까? 어떻게요? 런던으로 불러들여서? 아니면 한국에서? 별로 가능성도 없는 무리수는 그만 둡시다. 말썽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말썽? 그래봤자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나 알아주는 젊은 놈 아닙니까? 말썽이 일어나면 얼마나 크게 일어나겠소? 당신이나 나나 솔직히 그런 놈 하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나는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
“그만 두시오!”
다니엘의 목소리가 막 높아지려는 찰나, 르보가 그의 말을 사정없이 잘랐다. 다니엘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살기가 짙게 어려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사람을 은밀하게 지워버린 적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런 적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겠소? 내가 달걀의 예전 소유자들을 조사하지. 당신은 그 젊은 놈을 맡으시오.”
“꼭 그래야 하겠소?”
“싫으면 여기서 물러나도 상관없소. 단, 그럴 경우 당신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번 일에서 영원히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시오. 턱을 놀리기 싫으면 밥도 굶어야지. 안 그렇소?”
다니엘은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 프랑스 변태 새끼가!
“알겠소. 그 친구는 내가 맡아서 처리하지요.”
결국 그는 한 발 물러섰다. 달걀의 전 소유주를 심문하는 것보다는 한국의 젊은 감정가를 처리하는 게 훨씬 낫기는 했다.
“방법이 있겠소? 죽이라는 게 아니오. 사실을 확인하고 정보를 얻어내라는 거지.”
“상해에 크리스티 지점이 있지요? 거기 지사장이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6월 초에 거기서 경매가 있는 걸로 알고 있소. 이도윤을 그곳으로 불러들여서 처리할 테니까 르보 회장께서 지사장에게 미리 말이나 전해주세요.”
“어떻게 하시려고? 무슨 말을 전하라는 거요?”
“감정사를 불러들일 명분이 뭐가 있겠소? 미술품을 감정해달라고 할 수밖에.”
그것으로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이 끝났다. 다시 한 번 소파에 쓰러져 있는 드레스너 사장을 쳐다본 다니엘은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고 보자, 이 미친 새끼. 감히 날 노려봐? 언젠가는 그 눈깔을 파내주마.’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스위트룸의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