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최 회장의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환자 보호자들을 위한 작은 휴게실이 있었다. 도윤과 최병준 사장은 그곳에서 마주앉았다. 셋째 아들인 최호석은 병실에 남아 있고, 최진석이 아버지를 따라와서 옆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는커녕 싸늘한 냉기만이 감도는 을씨년스러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최병준이었다.
“현소 화랑 이세준 대표의 아들이라고 들었네.”
“네. 작은 구멍가게 집 아들입니다.”
최진석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전날 자신이 한 얘기를 비꼬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최병준이 아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서라하고는 사귀는 사이인가?”
“아직 그런 얘기까지 할 사이는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요.”
“솔직하군. 그래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건가?”
“공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일부러 내 아버님 병실까지 찾아와서 안마를 하겠다고 수선을 떠는 것 말일세.”
눈치를 보니 최 회장의 병세에 차도가 있는 게 도윤의 안마 덕분이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건 그것대로 일단 다행이었다.
“오늘은 제가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라 최수아 관장님께서 부르신 겁니다. 최 회장님도 먼저 저를 찾으셨고요. 수선을 떤다고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최병준의 얼굴에 냉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알아봤더니 어린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에다 TV 쇼에 나가서 큰돈을 벌었다고?”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덕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계산이 빠르지.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다 보면 자기 손아귀에는 들어가지도 않을 물건을 탐내기도 하고. TV 쇼 경품을 팔아서 천억이나 벌었다고 들었네. 그 정도면 평생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겠나?”
도윤은 일부러 무표정을 가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기까지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저한테 무슨 좋지 않은 의도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최병준이 차갑게 웃었다. 웃음이 저렇게 서늘한 느낌을 줄 수도 있구나. 도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최병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소 화랑을 조금 더 키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내가 최 관장에게 얘기하지. 도와줄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겠네. 하지만 병실을 드나드는 건 그만하게. 자꾸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기웃거리면 자네에게도, 서라에게도 모두 불편한 일이 생길 테니까.”
최병준은 그 말을 끝으로 휴게실을 떠났다. 도윤은 휴게실에 혼자 남아 한참 동안 허탈하게 웃었다. 이 사람들, 고래 등에 타고 있다고 자기들도 고래인 줄 아는가 보구나.
그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최호석 한 명만 병실을 지키고 있을 뿐, 최병준과 최진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서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큰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어요? 혹시 불쾌한 말을 들은 건 아니에요?”
도윤은 일부러 쾌활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회장님께서 잠이 드셨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별 문제 없으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와서 안마를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최호석이 당장 도끼눈을 떴지만 최수아 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그런데 이 박사도 바쁠 텐데 그래도 되겠어?”
“잠깐 들러서 안마하는 건데요, 뭐. 그 핑계 대고 서라 씨도 자주 만나면 저야 일거양득이죠. 여기 올 때마다 서라 씨하고 같이 와도 되죠?”
“그럼. 꼭 같이 붙어서 와. 그리고 올 때 전화 해. 나도 되도록 시간 맞춰 들를 테니까.”
최수아 관장은 도윤의 등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최서라가 얼른 그를 따라 나왔다.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그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윤이 괜찮다고 얘기하려는데 최서라가 먼저 말을 이었다.
“큰아버지가 언짢은 얘기를 했다면 모두 저 때문일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저한테서 조금 떨어져 계시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곁에 더 가까이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도윤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당찬 각오가 엿보였다. 머리가 좋은 아가씨니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휴게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지 대충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청파 갤러리 쟁탈전에 불이 붙겠군. 도윤은 씩 웃으면서 은근슬쩍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하면 모를까, 가까이 있어달라면 저야 바라는 바죠. 언제든지 전화하세요. 바람처럼 달려올 테니까.”
최수아는 병원 주차장까지 도윤을 배웅했다. 힘든 일과 언짢은 일, 그리고 기분 좋은 일이 같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생긴 날이었다.
* * *
최인탁 회장을 완치 시키는데 한 달이 소요되었다. 일주일에 2회씩 병원을 들락거리며 안마를 하는 동시에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은 어린 주승이까지 살피다 보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씩 치료를 끝낼 때마다 기운이 쭉 빠져서 그날은 꼼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간에 주승이가 먼저 완치되면서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은혜를, 이 은혜를…, 제가 평생 갚을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승이가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던 날, 아이 손을 잡고 도윤의 집까지 찾아온 주승이 엄마는 거의 통곡을 하듯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약속을 지키라는 전화와 이메일이 매일같이 날아올 무렵, 드디어 최 회장이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혈종이 모두 사라지고 혈압까지 정상으로 내려왔다는 걸 확인한 주치의는 현대 의학의 기적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 도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이 양반아, 그냥 기적이면 기적이지 현대 의학은 무슨.
중풍 환자의 마비가 풀리고 언어 기능마저 정상을 되찾은 건 확실히 기적이라고 할 만 했다. 최병준과 최진석 부자는 화가 났기 때문에, 그리고 최수아와 최서라는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낌새를 챘기 때문에 양쪽 다 도윤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쪽은 눈치가 없어서, 그리고 다른 한쪽은 눈치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최 회장이 퇴원하던 날, 도윤은 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도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차를 몰고 청파 갤러리로 향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였기 때문에 정문을 지키는 경비를 통과하자 1층 로비에는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비롯한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있었다. 도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관장실로 올라갔다.
관장실에는 최인탁 회장과 최수아 관장 둘만 있었다. 최 관장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고, 도윤이 최 회장과 마주앉자 그녀는 두 사람에게 차를 한 잔씩 따라주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미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관장실에 둘만 남자 최 회장이 먼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되겠군. 자네 덕분에 늙은 생명이 좀 더 늘어났어. 나이가 들면 체념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살아난 게 이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체념이 아니라 욕심만 더 많아졌나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덕분이라니요? 제가 아니라 병원 의사 선생님들이 애쓰신 덕분이죠. 완쾌를 축하드립니다.”
도윤의 말에 최 회장이 알듯 말듯 한 미소를 머금었다.
“몸을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뒤부터 계속 생각했네. 자네는 왜 나를 치료해 주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을 해주고서 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걸까. 그 두 가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최 회장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길로 도윤을 쳐다봤다.
“자네는 천재라는 소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영민한 젊은이야. 나는 비록 천재가 아니지만 사업을 크게 일으킨 덕분에 그런 친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지. 머리 좋은 친구들은 말이야, 결코 값싼 동정심이나 정의감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아. 언제나 명확한 손익 계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이 확보되는 쪽으로 움직이지.”
최 회장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는 소리가 넓은 관장실 안에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자, 이제 말해보게. 내가 가진 두 가지 의문에 대한 자네의 대답은 뭔가?”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제가 머리는 남들보다 조금 좋은 편인 게 사실이지만 기적 운운하시는 말은 무슨 얘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런 걸 궁금해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의 의문 아닙니까? 제 의문이 아니라. 그럼 스스로 답을 찾아보시지요.”
최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벌 회장이 좋은 게 뭔지 아나? 나는 어려운 질문을 찾아내기만 하면 돼. 답은 자네처럼 똑똑한 친구들에게 맡기는 게 낫지. 내 안 좋은 머리로 답까지 찾아내려고 하면 오히려 회사가 삐걱거려. 그러니 똑똑한 자네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게. 혹시 아나? 대답이 마음에 들면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줄 지. 아, 돈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선문답을 할 시간이군. 최 회장이 어떻게 어르고 달래든 자신에게 치료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실직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가 해드린 건 안마밖에 없으니까 그 얘기를 하죠. 서라 씨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라고요. 저 솔직히 서라 씨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니까 뭐라도 해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안마라도 열심히 한 겁니다. 그게 전부예요.”
“그 아이를 사랑하나?”
“단도직입적이시네요. 아직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척 좋아합니다. 결혼하고 싶으냐고요? 그런 건 회장님 말고 나중에 서라씨에게 직접 말할게요.”
“젊은 친구가 과감하지 못하군.”
“제가 과감했으면 좋으시겠어요?”
“나쁠 건 없겠지.”
“적어도 서라 씨 문제로 회장님 눈치를 볼 필요는 없겠네요. 감사합니다.”
최 회장이 피식 웃더니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두 가지 질문을 서라 그 녀석을 내세워서 하나로 퉁 치려는 걸 보니까 오늘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어렵겠군. 알았네. 나중에 꼭 원하는 게 있으면 한 가지만 말하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미래그룹 회장의 약속이었다. 도윤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최 회장을 붙잡았다.
“갑자기 불려 와서 난감한 질문을 받았으니까 결례가 안 된다면 저도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왜 청파 갤러리를 세우셨습니까?”
최 회장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문화 사업에 흥미를 느껴서라고 말하면 실망할 텐가?”
“만족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청파 갤러리를 그룹 지주 회사로 키우실 겁니까?”
최 회장의 입에서 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소리를 죽여 잠시 큭큭대더니 웃음을 멈추고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날이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밤하늘에 탐스러운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그건 늙은 내가 젊은 날의 내게 준 선물이야.”
이 양반도 선문답을 하기로 작정했나? 도윤이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자 최 회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보다 당장 해야 되는 일에 더 열심히 매달려야 했네. 어떻게 사느냐, 어떤 인간이 될 것이냐 하는 생각은 모두 사치였지. 그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조차 힘에 겨웠으니까. 다행히 나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되는 일에 더 재주가 좋았어. 덕분에 재벌 그룹 회장까지 됐으니까.”
최 회장은 과거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런 신파를 늘어놓는지 궁금해질 무렵,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더니 도윤에게 물었다.
“자네는 청파 갤러리를 누가 책임지는 게 좋을 것 같나? 수아, 그 아이 다음에 말이야.”
체제 변환이 가문 내력인가? 도윤은 어이가 없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갤러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맡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연로하신 회장님 못지않게 젊은 회장님을 잘 챙겨줄 거 아닙니까?”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최 회장이 소리를 내어 껄껄대고 웃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가 서라를 도와주겠나?”
“물론이죠. 갤러리 쪽 일은 어차피 제 전공이잖아요? 성심성의를 다해 돕겠습니다.”
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듣던 대로 맹랑한 친구야. 자네는 오늘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나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괘씸한 말장난이 마음에 들어. 역시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저는 지금까지 머리로 사람을 기쁘게 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건 오히려 이쪽이었죠.”
도윤이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 말에 최 회장이 씩 웃었다.
“현소 화랑 이세준 대표가 부럽군. 자식을 아주 잘 키웠어.”
그 말을 끝으로 최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 회장이 관장실을 나서자 최수아 관장이 재빨리 전화를 했다. 그러자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얼른 뛰어와 그를 부축했다. 최 관장도 그들을 따라가면서 손가락으로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서울에 머물면서 최서라와 데이트라도 진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최 회장이 퇴원한 지 이틀 뒤, 그간 틈틈이 준비했던 모든 것을 챙긴 도윤은 석훈과 함께 독일로 갔다. 잘츠부르크로 가기 전에 거기서 먼저 준비를 마쳐야 할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