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3. 현자의 돌>
도윤과 석훈이 끊은 것은 뮌헨 행 비행기 표였다. 최서라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오윤수의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로는 현소 화랑 일을 젖혀두고 자꾸 밖으로만 떠돌고 있었다. 자신에게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는 부모님께는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올해 전시 스케줄은 연말까지 모두 확정됐어. 네가 없어도 화랑은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세준의 말이었다. 잘못 들으면 네가 필요 없다는 소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도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죄송했다.
뮌헨은 독일 프로축구 리그의 포식자라고 불리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연고지다. 도윤이 뮌헨으로 간다는 얘기를 들은 구한샘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왕 거기까지 갔으면 꼭 바이에른 뮌헨 홈경기를 보고 오세요. 안 그러면 비행기 값의 절반은 무의미하게 날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도윤은 독일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구한샘과 미리 통화를 했는지 석훈이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약속했다.
“놀러가는 게 아니니까 뮌헨에서는 시간이 빡빡할 거야. 하지만 만약에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경기 직관을 한 번 생각해 보지. 물론 표도 있어야 하고.”
뮌헨에서 필요한 준비를 갖추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축구 덕후를 자처하는 석훈을 달래기 위해서 일단 그렇게 말을 해두었다.
출국하는 날, 뜻밖에도 최서라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머리는 나빠도 눈치는 좋은 석훈이 녀석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준 덕분에 둘이 잠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치료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최 회장의 치료가 끝난 뒤에 곧장 출국 준비를 서둘렀기 때문에 최서라와는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도윤과 마주앉자마자 감사 인사부터 꺼냈다.
“치료는 의사들이 했지요. 제가 해드린 건 안마뿐입니다.”
도윤의 의중을 눈치 챈 최서라도 빙긋이 웃기만 하고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오고간 뒤에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저를 도와주세요. 도윤 씨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는 몹시 미안해하면서, 하지만 확실히 결심이 선 표정으로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도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대답하자 최서라가 조금 놀란 모양이다.
“아직 뭘 도와달라고 애기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뭘 부탁하시든 전적으로 도와드릴게요. 저희 부모님을 죽여 달라고 하지만 않으시면 돼요.”
아마 길고 어렵게 이야기해야 하는 부탁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도윤의 말을 듣는 순간 잔뜩 긴장되어 있던 최서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나갔다.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도윤의 손을 부여잡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한참 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가 비로소 손을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예쁜 방하나 뿐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방을 갖고 싶으면 집을 몽땅 사라고 하더라고요. 방이 엄청나게 많은 집인데.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요.”
“그거야 집을 설계한 사람 탓이지요. 돌아가서 할아버지를 한 대 쥐어박으세요.”
최서라가 풋 하고 웃었다. 도윤이 말을 이었다.
“집을 지키려면 도둑을 막아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집주인이 방범에 관심이 없으면 저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요. 그건 아시죠?”
“최소한 제 방에서 쫓겨나지는 않도록 할 거예요. 저도 그 정도 힘과 각오는 있어요.”
도윤이 손을 뻗어 최서라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가 아무런 저항 없이 딸려와 품에 안겼다. 따뜻한 느낌과 향기로운 냄새.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서라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을 하늘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 *
“후우~. 살았다. 탈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비행기는 통조림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뮌헨 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면서 석훈이 진저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통조림이라니?”
“일단 안에 들어가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밀봉 상태가 유지되잖아요. 그게 통조림이지 뭡니까?”
“네가 통조림 내용물이라면 아무도 뚜껑을 따려고 하지 않을 거야.”
석훈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무시하고 잽싸게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미리 계약해 둔 집으로 향했다. 뮌헨에 있는 동안은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호텔을 잡지 않고 집을 한 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주인을 만나 열쇠를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한 가운데에 짐 꾸러미들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이걸 위해 집주인에게 임대료를 미리 주고 물건을 받아놔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본래는 훨씬 전에 이 집으로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인탁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달 이상 집세를 더 지불하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다행히 침대와 주방용품, 인터넷과 TV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당장 생활하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다음날,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이곳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사들이는데 거의 하루를 소비한 도윤은 준비가 갖추어지자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최서라가 보내준 칼과 가죽들, 그리고 자신이 한국에서 만들어 가져간 송진 구슬들을 다듬었다. 그가 가장 신경을 써서 손을 본 것은 칼 손잡이를 감쌀 가죽이었다.
도윤이 작업을 하는 동안은 별로 할 일이 없어진 석훈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뮌헨에서 구입한 전자 장비들을 설치했다. 그동안 공부한 것도 있고, 길지는 않지만 일 년 넘게 현장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석훈은 나름대로 그럴 듯한 전자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다.
감시 시스템을 완료한 석훈이 무료했던가 보다. 녀석은 한동안 도윤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근데 칼도 위조해요? 그건 그냥 쇳덩어리잖아요. 옛날 쇠나 요즘 쇠나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냥 녹이 좀 많이 슬고 적게 스는 것 말고 다를 게 있어요?”
한창 작업에 몰두해 있던 도윤이 옆에 두었던 16세기 칼 하나를 들어 석훈에게 건넸다.
“이거 맛을 한 번 봐봐.”
석훈이 칼을 받아들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형 미쳤어요? 저더러 쇠 맛을 보라고요? 씹어 먹으라는 뜻이에요?”
“네 이빨이 무슨 티타늄 합금이냐? 혀를 살짝 대 보라고. 거기 칼 한가운데에.”
고개를 갸웃한 석훈이 혀끝을 칼에 살짝 대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맛은 무슨……. 이거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그냥 차갑기만 하네.”
“그게 정상이야. 오래 된 쇠에서는 아무 맛도 안 나니까. 하지만 오래된 것처럼 위조한 쇠에서는 역한 맛이 나. 인공적으로 녹을 만들기 위해 산화제를 쓰거든. 아무리 잘 닦아내도 혀를 대 보면 약품을 썼는지 안 썼는지 알 수가 있어.”
그리고 쇠나 청동도 오래 되면 골다공증에 걸린 뼈처럼 금속 구조의 일부에 탄소화가 진행된다. 손으로 들어보면 같은 부피의 쇠보다 약간 가벼워진다는 뜻이다. 그밖에도 오래된 금속 공예품의 진위를 판별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도윤은 그런 번거로움을 모두 뛰어넘기로 했다. 그걸 위해 애초에 16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칼을 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유물이나 골동품은 오래된 것일수록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신라나 가야 시대 토기가 조선시대 백자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게 그 증거다. 유물의 시세는 희귀성과 예술성, 보존의 완벽성 등에 기초해서 정해지지 단지 오래됐다고 저절로 비싸지는 게 아니다. 이번에 사들인 칼들도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비싼 게 아니었다.
도윤이 가장 공을 들인 건 오래된 가죽을 잘라서 정해진 방법에 따라 손잡이에 감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송진 구슬을 칼 손잡이의 고리에 맞게 정성껏 갈아서 부착하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아교조차도 예전에 만들어진 것을 녹여서 사용했고, 송진 역시 오래된 것을 구하느라 상당히 고생했었다.
석훈은 도윤이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수다스러웠던 입을 닫고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지냈다. 녀석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뮌헨에 도착한 지 사흘째가 되었을 때 그럴 듯한 16세기 칼 세 자루가 완성되었다. 도윤은 욕조 가득히 소금물을 풀고 칼 세 자루를 통째로 담갔다.
“이대로 한 사흘 나뒀다가 소금기를 빼고 적당히 손을 보면 될 거야.”
도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훈이 노트북을 켜더니 화면 하나를 띄웠다.
“형, 내일 저녁에 바이에른 뮌헨 홈경기가 있어요. 보러 갑시다.”
관심이 온통 그리로 가 있었구나. 며칠 동안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석훈의 눈을 보면서 도윤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일정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티켓 사이트를 확인한 석훈의 비명과 도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뭐야! 라운지 좌석 말고는 완전히 매진이라고?”
석훈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아, 저 빌어먹을 자식. 바이에른 뮌헨 홈구장의 라운지 좌석 표는 한 장에 백만 원이 넘었다.
* * *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는 훌륭했다. 국가 대표 경기만 챙기는 평범한 축구 팬인 도윤이 보기에도 선수들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무엇보다 독일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축구를 좋아하나 싶을 정도로 열광적인 관중들의 응원이 경기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석훈의 반응은 비교적 무덤덤한 도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형, 저기 9번 선수가 작년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에요. 이야, 저기서 저렇게 페인트를 쓰네. 보세요. 수비하는 선수들이 막 나자빠지잖아요. 저게 왜 그러냐 하면…….”
시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분데스리가에 대한 지식을 줄줄이 읊어대던 석훈은 경기가 시작되자 혼자서 캐스터와 해설자 역할을 도맡았다. 몸이 유난히 건강하니까 주둥아리에서도 정력이 넘치는구나. 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 자식 경기에 집중이 안 되잖아.
속으로 한숨을 내쉰 도윤은 잠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주변을 돌아봤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죄다 남의 나라 선수들의 경기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경기 때마다 이렇게 비싼 좌석을 이용하는 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지가 더 궁금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던 도윤의 고개가 어느 한 순간 딱 멈춰 섰다.
오십대 중반에서 육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원래 짙은 갈색이었을 머리카락은 절반이 흰색으로 변했고, 그 점은 정성들여 손질한 게 분명한 콧수염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에 비해 몸이 퉁퉁해진 것은 나이 탓일 거고, 명품 손목시계와 구두는 못 보는 사이에 돈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울로 마르케스. 저 자가 어떻게 독일에?
파울로 마르케스는 가드너 미술관에 침입했던 2인조 강도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도윤이 트루쓰 앤 밸류에 출연했을 때, 케이티 패럴의 오빠인 앤드류 패럴이 잠깐 보여줬던 자료에 의하면 놈은 콜롬비아 출신의 전과자였다. 문제는 그동안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외모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도윤도 그 자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야, 석훈아. 조용히 해봐.”
도윤이 한창 ‘제쳐, 제쳐’를 외치고 있는 석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요? 뭐 바닥에 흘렸어요?”
도윤이 고개를 숙인 채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석훈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도윤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오른쪽 좌석을 슬쩍 가리켰다.
“우리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남자 보이지?”
“누구요? 멕시코 사람처럼 생긴 콧수염 기른 아저씨 말이에요?”
“그래. 저 사람 얼굴 좀 잘 기억해 놔라.”
도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석훈이 고개만 살짝 틀어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왜요? 저 사람이 누군데요?”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잘 들어. 이따 전반전 끝나면 여기 앉은 사람들 전부 라운지로 나갈 거 아냐. 이 줄에 앉은 사람들 전용 라운지 있잖아.”
“그러겠죠. 여긴 라운지 좌석이니까.”
“그때 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콜라 한 잔 들고 가다가 살짝 엎질러 봐.”
“저더러 축구 경기 구경하러 왔다가 멱살 잡히라고요?”
“네가 설마 배나온 아저씨한테 맞겠냐?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일단 그렇게만 해줘.”
석훈은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많은 녀석이기는 한데 이럴 때는 확실히 부탁하기가 편하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일이 닥치면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하고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녀석이었다.
잠시 후, 전반전이 끝나자 관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도윤과 석훈은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어차피 라운지 좌석에는 전용 라운지가 따로 있어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라운지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몇 가지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문제의 남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도윤이 눈짓을 하자 카운터에서 콜라 한 잔을 받아든 석훈이 일부러 남자 근처로 접근했다. 놈이 앉은 자리 근처를 지나던 석훈이 갑자기 엇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녀석이 들고 있던 컵에서 콜라가 반 이상 넘치면서 남자의 옷 위에 쏟아졌다.
“이 새끼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석훈에게 눈을 부라리며 욕을 했다. 스페인어였다. 보통 사람들은 급하거나 화가 나면 순간적으로 입에서 모국어가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도윤이 얼른 다가가며 독일어로 소리쳤다.
“이봐, 파울로. 무슨 일이야?”
순간 남자의 표정이 움찔하면서 딱딱하게 경직되는 게 보였다. 맞는군. 도윤은 짐짓 굉장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옷에 묻은 콜라를 직접 털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남자의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우리 파울로가 큰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옷이 더럽혀졌으니 세탁비를 물어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손 치워요. 에이 참. 이 친구 이름이 파울로요?”
파울로 마르케스는 도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더니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석훈을 가리켰다. 발음이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제법 능숙한 독일어였다.
“네. 팔로 츄이입니다. 저희 둘 다 중국 무역회사 직원이에요. 모처럼 보너스 받아서 경기 구경하러 왔는데 큰 실례를 범했네요. 세탁비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지금은 카드 밖에 없어서 그런데 전화번호나 명함을 주시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팔로? 파울로? 마르케스는 발음이 헷갈리는지 몇 번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더니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그냥 가시오. 에이, 뮌헨도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터키 놈들만 해도 성가셔죽겠는데 이젠 아시아인들까지 돌아다니고 난리야.”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었지만 도윤은 신경 쓰지 않고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다 물러났다. 백인이 다수인 나라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유색인종들이 아시아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뮌헨의 경우에는 심지어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이란 청년이 다른 무슬림들을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면서 총기를 난사한 적도 있었다.
잠시 후, 후반전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면서 라운지가 텅 비었다. 그제야 석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형, 도대체 아까 그 자식이 누군데 그래요? 아는 놈이에요?”
“그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자.”
“나가다니요? 아직 후반전이 남았잖아요? 우리 천 유로도 넘게 내고 들어왔다고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이거 좀 가지고 있어.”
도윤이 폼에서 지갑 하나를 꺼내서 석훈에게 주었다. 무심코 지갑을 열어본 녀석은 깜짝 놀랐다. 지갑 안에 방금 전 보았던 남자의 신분증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신분증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학위까지 기재하게 되어 있다.
“형 소매치기를 한 거예요? 클라인 에스테반이 도대체 누구예요?”
“클라인 에스테반이 아니야. 놈의 이름은 파울로 마르케스야.”
몇 십 년이 지나는 사이에 콜롬비아의 절도범이 독일 시민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도윤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찾아온 기회를 버릴 수는 없지.”
다니엘 로스차일드를 엿 먹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일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반면에 파울로 마르케스는 이번에 놓치면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