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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89화 (89/300)

89화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콜롬비아라는 나라 전체를 쥐고 흔들다시피 했던 희대의 마약 왕이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지금까지 그와 관련해서 나온 책과 영화, 드라마만 해도 엄청난 수에 달했다. 그 대단한 에스코바르가 하필이면 가드너 미술관 도난 사건의 배후라는 사실이 도윤을 골치 아프게 했다.

“하긴, 은행에 예금하기도 어려운 돈을 그냥 쌓아둘 수도 없고, 그 자도 나름대로 돈 세탁을 할 방법이 필요했겠지.”

마약 사업의 특성상 전성기의 에스코바르는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그 돈을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기업을 인수하거나 세웠고, 심지어 본인 스스로가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자신의 고향인 메데인을 중심으로 아낌없는 자선사업을 해서 잠시나마 큰 칭송을 받은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회사 운영은 그의 돈을 늘려주기는커녕 거꾸로 축내기만 했다. 애초에 주변에 정상적으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인재가 드물기도 했거니와, 양지로 나온 기업체는 세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에스코바르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고, 정계 진출 역시 범국민적인 비난에 직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녀석이 미술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는 거죠? 금괴와 미국 국채도 사들이고.”

석훈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이 가진 현금의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바뀌었다는 거야. 그래서 에스코바르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을 때, 그가 모아둔 많은 재산이 어디로 갔을지 모두 궁금해 했어. 못해도 수십억 달러는 남아 있었을 테니까.”

“역시 마약 왕답네요. 아니 그런데 왜 하필 그 물건들을 전부 폐광에 숨겼대요?”

“안전하고 지키기 쉬우니까. 물건을 콜롬비아 밖으로 반출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은행에다 넣어두기도 싫었을 거야. 당시나 지금이나 콜롬비아 정부도 그다지 깨끗한 편은 아니거든. 은행에 보관했다가는 자칫 송두리째 뺏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마르케스에게서 뺏은 지도에 바로 그 폐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한때 에스코바르의 미술품 구입과 관련한 일을 담당했던 장본인이 바로 마르케스였다.

원래 마르케스는 에스코바르가 미술품을 사 모은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한탕 하려는 목적으로 가드너 미술관을 털었다. 하지만 물건을 에스코바르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충분한 돈을 받지 못했다. 그 점에 불만을 표시했던 공범은 심지어 총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마르케스는 심문 과정에서 그 대목을 언급하다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거래가 끝난 다음에 에스코바르가 제안을 했어. 자기 밑에서 미술품 사 모으는 걸 도우라고. 거절하면 나도 동료처럼 죽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지.”

도윤은 그 얘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마약 왕이 도둑놈을 고용했다고?”

“그래야 다루기 편하니까. 양심적인 감정가를 고용하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잖아. 반면에 나 같은 경우는 대우만 적당히 해주면 경찰에 신고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나 자신이 범죄자였으니까.”

하긴 마약 왕 밑에 미술품에 대해 해박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에스코바르에게 필요한 건 안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도둑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사들인 미술품들이 그 폐광으로 들어갔다는 거지? 장소를 알고 있으면 진즉에 털지 그랬어? 왜 여태까지 참은 거야? 너 원래 도둑이었잖아?”

도윤의 말에 마르케스가 한참 동안 낄낄대고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에스코바르 그 자식이 막판에 경찰의 추격을 받으니까 폐광의 입구를 무너뜨리고 흙을 덮어버리더라고. 겉으로만 봐서는 거기에 광산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말이야.”

“하지만 넌 위치를 알잖아? 지도도 있고.”

“에스코바르가 살아 있을 때는 당연히 놈의 부하들이 거길 지켰지. 그리고 그 놈이 죽은 뒤에는 그 자리에 군부대가 들어섰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 그때 나는 독일에 와 있었고, 소식을 듣고 몰래 찾아갔을 때는 이미 빼낼 방법이 없어졌다고.”

결국 상황이 변화되기만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숨죽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도윤과 석훈에게 붙잡혀서 지도까지 뺏겼다는 얘기였다. 듣고 있던 석훈이 혀를 찼다.

“폐광 속에 묻혀 있으면 그림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겠네. 습기가 찰 텐데.”

도윤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사실 가장 걱정스러운 점이었다. 지하에 묻혀 있으면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겠지만 높은 습기는 그림이나 금속 공예품, 대리석 조각 등 거의 모든 예술품에게 치명적이다. 이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작품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콜롬비아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기도 하거니와 도윤이 신고한다고 한들 콜롬비아 정부가 폐광 속의 미술품을 순순히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현 콜롬비아 정권의 도덕적 수준은 죽은 에스코바르에 비해 딱히 낫다고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일단 잘츠부르크 문제부터 해결하자. 콜롬비아는 천천히 생각하고.”

이틀 뒤, 도윤과 석훈은 모든 준비를 끝낸 뒤 기차를 타고 뮌헨을 떠났다. 그날 오후, 그들은 두 시간 만에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들고 잘츠부르크 역에 내렸다.

* * *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중식당.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별실에 미래 건설 사장 최병준이 혼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별실의 문을 열고 중년의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최병준의 동생이자 미래 전자 사장인 최병호였다. 각자 데리고 온 비서들은 모두 다른 방에 집어넣고 두 사람만 독대하는 자리였다.

“형이 먼저 와 있었네? 난 내가 조금 더 일찍 온 줄 알았는데.”

최병호가 최병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형은 남들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구나 오늘 자신은 약속 시간보다 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도 상대가 먼저 와 있다는 건 긴히 부탁하거나 요구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을보다는 갑의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오다시피 한 최병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회사 일이야?”

최병호가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묻자 최병준이 혀를 쯧쯧 찼다.

“앉자마자 용건부터 묻냐? 너 오기 전에 내가 중식 코스를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올 테니까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최병호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형제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대낮에 한가하게 형제간의 회포를 풀 여유 따위는 없는 처지들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음식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자 최병준이 비로소 용건을 꺼냈다.

“서라가 올해 스물일곱인가? 공부 끝내고 돌아왔으니까 이제 결혼 준비 시켜야지?”

뜬금없는 얘기였다. 설마 용건이 그거였어? 최병호가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걔가 아직 결혼이 급한 나이는 아니잖아? 당장은 일부터 배워는 게 먼저지. 청파 갤러리에 출근하기 시작한 지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어. 업무가 익숙해지면 결혼 문제는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해도 돼. 무엇보다 본인 의사도 중요하고.”

최병준이 혀를 쯧쯧 찼다.

“아빠라는 녀석이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그러니까 걔가 이상한 놈이나 만나고 다니지.”

“이상한 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서라가 요즘 현소 화랑 아들하고 만나는 거 알아?”

대뜸 책망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최병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영국에서 공부할 때 만난 모양이던데? 근데 이상한 놈이라니? 그 친구가 왜 이상한 놈이야? 내가 듣기로는 똑똑한 친구라고 하던데?”

“싸가지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 먹고 살만한 집안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집 하고는 격이 안 맞기도 하고. 너도 알잖아. 재벌가 자식을 노리는 놈팽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최병호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아무래도 그 친구가 형한테 단단히 밉보였나 보네.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일?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이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렇지. 네 말대로 당장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더라도 슬슬 만나는 남자에 대해서는 관리를 해야 할 나이잖아.”

최병준은 그 말과 함께 옆자리에 놓아둔 봉투를 집어 들어 최병호에게 건넸다.

“한대길 의원 알지? 그 양반이 나한테 전화하더라. 자기 아들하고 서라를 연결시켜 줄 수 있겠냐고. 아버지는 여당 실세고 엄마는 한성 옥션 사장이잖아. 그만하면 서라 남편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이력을 좀 뽑아왔다.”

최병호는 서류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씩 웃었다.

“형, 갑자기 왜 그래?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내 딸 결혼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건 도로 집어넣어.”

“그러지 말고 훑어 봐.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손녀사위 보고 싶어 하시는 거 알잖아? 난 아들만 셋이니까 우리 집에 손녀라고는 서라 하나밖에 더 있냐? 다행히 이번에는 쾌차해서 일어나셨지만 언제 어떻게 되실지 누가 알겠어?”

“이 친구에 대해 아버지한테도 벌써 얘기를 드렸다고?”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한 번 말씀드려볼 생각이다.”

최인탁 얘기까지 나오자 최병호도 더 이상 마다하기가 곤란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서류를 꺼내 살펴봤다. 하지만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한치호? 이 친구가 한대길 의원 아들이었다고? 이 친구 나이가… 서라보다 여섯 살이나 많네? 한치호는 업계에서 평이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최병준이 발끈하며 눈을 부릅떴다.

“평이 왜 안 좋아? 대학 졸업하고 유학 갔다 온 뒤로는 일찌감치 실무에 뛰어들어서 착실하게 경험을 쌓고 있다더라. 게다가 외아들이잖아? 누가 뭐래도 나중에 한성 옥션을 물려받을 사람 아니냐? 그 정도면 서라하고도 조건이 잘 맞아.”

최병준이 서류를 다시 집어넣더니 형에게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미안하지만 이 친구는 아니야. 형이 왜 이도윤이라는 친구를 그렇게 싫어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서라 결혼 문제는 그냥 나하고 집사람이 알아서 할게. 오늘 점심 잘 먹었어.”

최병호는 코스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바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문을 나서는 순간 약간이나마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이 한대길과 손을 잡았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한치호 같은 자식을 서라 남편감으로 밀어?

* * *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도윤은 호텔을 잡자마자 곧바로 오토 셰퍼에게 전화했다. 일본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오키 씨의 조카였다. 꽤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당장 호텔로 뛰어오겠다는 그를 말려 다음날 오전에 만나기로 했다.

이튿날, 도윤은 미리 약속한 부동산 사무실에서 오토와 부동산 중개인을 데리고 집주인을 만났다. 어머니가 금발이었는지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오토 셰퍼는 욕심이 많으면서도 얍삽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그는 도윤이 자신과 통화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큰소리부터 쳤다.

“약속을 했으면 제때 지켜야 할 거 아니오? 당신 때문에 내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아시오? 그냥 소송을 걸려다가 억지로 참았어, 내가.”

지랄하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달라는 사람처럼 구는 오토를 보며 도윤은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참자.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어차피 독박을 써야 할 놈이었다.

도윤은 귀찮게 떽떽 거리는 그를 진정시킨 뒤, 각각 독일어와 일본어로 된 두 장의 서약서를 내밀었다.

“꼼꼼하게 읽어보고 사인하세요. 그러면 곧바로 집이 당신 소유가 될 테니까. 계약금이나 중도금 없이 이 자리에서 집값 전부를 치를 거예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토의 입이 딱 닫혔다. 그는 계약서 조항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사인했다. 그림 대금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조항 말고는 모두 그에게 유리한 것들이었다. 트집을 잡고 싶어도 잡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집을 구입하면 그쪽에서 인테리어 공사비용까지 다 대는 겁니다. 확실하죠?”

오토의 말에 도윤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인테리어 비용은 10만 유로를 초과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비용이 들어가면 셰퍼 씨가 추가액수를 부담해야 돼요. 인테리어 업자 선정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언제든 공사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건 좋지만 지나친 간섭은 계약 위반입니다. 아시죠?”

오토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이 그 자리에서 집주인에게 대금을 전액 이체했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관계된 사람 모두가 만족할 만한 훌륭한 거래였다.

집을 구입한 사흘 뒤부터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도윤이 인테리어업자를 미리 섭외해 놓고, 오토가 요구하는 내용이 반영된 공사 계획을 다 논의해 두었기 때문에 크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 이틀 째 되는 날 밤, 도윤과 석훈이 길쭉한 주머니와 도구 가방을 들고 새로 산 집으로 숨어들었다. 다음날 1층 거실과 연결된 방의 벽을 부수고 거실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일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원래 집에 발려져 있던 벽지와 장식이 모두 제거되고 사방에 벽돌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조심스럽게 작업한 끝에 동이 트기 전에 간신히 계획했던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피곤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집 근처에 렌트카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시간, 집 안에서 인부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도윤은 석훈과 함께 차에서 내려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시간을 끌면 인부들이 일을 망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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