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도윤과 석훈이 인테리어 공사 중인 집에 뛰어들었을 때는 인부들이 무너진 벽을 둘러싸고 한창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척 보기에도 낡아빠진 나무 상자에 함부로 발길질을 하면 어떡해? 다 부서져버린 거, 이거 이제 어쩔 거야?”
한 인부의 말에 다른 인부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내가 알고 그랬어? 난 그냥 툭툭 건드렸을 뿐이라고. 그 정도 발길질에 이렇게 박살이 날 줄은 몰랐지. 그리고 일은 같이 해놓고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인부들의 언쟁을 지켜보던 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벽이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부서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다 발길질까지 했어? 덕분에 일이 제대로 풀리게 생겼다. 그는 재빨리 다가가서 몰려 있던 인부들을 물러서게 했다.
“뭡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요?”
도윤이 등장하자 저희들끼리 말다툼을 하던 인부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곳에는 형체가 완전히 뭉개진 길쭉한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원래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에 손바닥 길이의 폭을 지녔던 물건이었는데 지금은 인부들 말마따나 박살이 나서 안에 있던 것들이 밖으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이건 뭡니까? 누가 공사 현장에 이런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도윤이 짐짓 모른 척하고 무릎을 꿇고서는 나무상자의 잔해를 뒤졌다. 상자 안에는 칼집이 없는 칼 한 자루와 둘둘 말린 종이 뭉치가 있었다.
“가만 있자, 이거 무척 낡았네? 누가 가지고 온 게 아닌가? 이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도윤이 칼과 종이 뭉치를 집어 들며 묻자 인부들이 모두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도 모르세요? 이게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지 않습니까?”
도윤이 얼굴을 살짝 굳히자 인부 하나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여기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 해머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벽이 무너지면서 안에서 그게 나왔어요.”
“벽 안에서 이것들이 나왔다는 말입니까? 정말이에요?”
“네. 뭔가 싶어서 발로 톡톡 건드렸을 뿐인데 상자가 박살이 나더라고요. 워낙 낡아서 그런 거지 저희가 일부러 부순 게 아닙니다.”
도윤은 속으로 씩 웃었다. 아주 잘한 짓이다. 이 나무 상자의 재료는 최서라가 이장을 준비 중이던 옛 공동묘지까지 직접 찾아가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못질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삭은 나무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벽이 무너질 때 함께 박살나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모양만 대충 갖춰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부서지기를 바랐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건드린 분은 없습니까? 칼 하고 종이 뭉치가 다예요?”
그가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인부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발로 몇 번 찬 것 외에는 아무도 그걸 건드리지 않았어요. 상자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분이 오신 겁니다. 진짜예요.”
물론 진짜겠지. 애초에 물건을 벽 안에 집어넣은 사람이 그와 석훈이었으니까. 도윤은 그래도 다시 한 번 인부들에게 물건에 손을 대지 않은 게 확실하냐고 다짐을 받은 뒤 전화기를 들었다.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오토 셰퍼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왔다.
“벽에서 옛날 물건이 나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물건은 어디 있어요?”
오토는 벽에서 나온 물건들이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도윤 일행과 인부들을 마치 도둑놈을 보듯 쳐다봤다. 혹시 뭔가 가져가지 않았는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물건은 지금 보시는 게 전부예요. 누군가 벽 속에 숨겼었나 봅니다. 상태로 봐서는 꽤 오래전 물건인 것 같아요. 혹시 값비싼 물건이 아닌지 확인해 보세요.”
도윤은 일부러 ‘값비싼 물건’이라는 부분을 강조해서 말했다. 오토는 도윤의 직업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오키를 대리해서 오스트리아까지 왔으니 막연히 변호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집에서 나온 물건이니까 이건 모두 내겁니다. 그 정도는 아시겠죠?”
오토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짐을 받고자 했다. 도윤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물론입니다. 셰퍼 씨 집에서 나온 물건이니까 그건 셰퍼 씨 겁니다.”
준다고 해도 가질 생각 없다. 도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도윤의 확인을 받은 셰퍼는 그제야 바닥에 놓인 칼과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는 먼저 종이 뭉치를 대충 살펴보더니 금세 한쪽으로 치워놨다. 종이에 라틴어가 잔뜩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 그거 엄청 공을 들여서 준비한 거야. 나름대로 필생의 역작이라고.’
오토가 종이 뭉치를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본 도윤은 속이 쓰렸다. 그 종이 뭉치는 도윤이 현소 화랑 김하선 실장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정성을 다해 만든 물건이었다.
위조 화가로서 이력을 시작한 이후로 김하선은 동서양의 각종 그림과 문서를 위조하는데 나름대로 적잖은 훈련을 받았다. 본래는 현소 화랑으로 들어오는 위작들을 감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이번에는 도윤의 부탁을 받아 오랜만에 갈고 닦은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도윤이 직접 준비했지만, 위조에 쓰인 종이와 잉크는 김하선 실장이 마련한 것들이었다.
종이 뭉치를 대충 치워버린 오토는 손잡이 끝에 구슬이 달린 칼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게 뭐지? 별로 대단한 칼 같지는 않은데? 손잡이에 달린 노란 구슬은 또 뭐야? 여자들이 쓰던 것치고는 좀 큰 것 같은데, 왜 칼에 이런 쓸데없는 장식을 달아놓은 거야?”
야, 인마. 그거 엄청 쓸 데 있는 거야. 도윤은 그가 칼을 살피는 사이에 옆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 뭉치를 슬쩍 들어올렸다. 일부러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종이뭉치를 뒤적거리던 그가 들으란 듯이 ‘오호’ 하는 소리를 냈다. 오토의 고개가 그를 향해 홱 돌아갔다.
“거 남의 물건을 그렇게 함부로…, 내용이 뭔지 알겠소?”
도윤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면서도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라틴어를 공부한 적이 있어서 좀 읽을 줄 아는데, 이거 아무래도 옛날 의학이나 연금술에 관련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귀한 문서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비싼 거요?”
질문이 참 솔직하고 저렴하기도 하지. 도윤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보세요. 전부 손으로 직접 썼죠? 인쇄된 것보다는 손으로 쓴 게 아무래도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다빈치가 쓴 원고는 1억 달러도 넘는다더라고요.”
1억 달러라는 말에 오토의 눈이 홱 돌아갔다. 그는 황급히 다가와 도윤의 손에 들린 종이 문치를 뺏듯이 낚아챘다.
“이, 이게 그렇게 비싼 거라고?”
“어허. 조심하세요. 오래된 종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찢어져요.”
“이게 1억 달러나 나가는 물건이냐고 묻지 않았소?”
“내 말은 다빈치 원고가 그렇다는 거죠. 그게 얼마나 할지는 저도 몰라요. 궁금하면 전문가한테 감정을 받아보시던가요.”
“그럼 이 칼은 얼마나 될 것 같소?”
오토가 이번에는 칼을 내밀며 물었다. 도윤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말했잖아요. 전문가한테 가서 감정을 받아보라고. 감정료를 조금 내야 하겠지만 그래도 알아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일지?”
오토의 마음이 급해진 게 분명했다. 그가 칼과 종이뭉치를 집어든 채 인사도 없이 자기 차로 돌아가려는 걸 도윤이 슬쩍 붙잡았다. 그가 턱짓으로 부서진 나무상자를 가리켰다.
“저 나무상자도 챙겨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보통 땅에 묻혔던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걸 포장하고 있던 용기도 진위 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저런 부서진 나뭇조각이 감정에 필요하다는 거요?”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 인부들한테 그냥 내다버리라고 할게요. 어차피 공사하려면 치워야 하는 물건이니까.”
오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차로 돌아가서 빈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그는 칼과 종이뭉치뿐만 아니라 상자 조각들까지 정성스럽게 손으로 끌어 모아 가방 안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형태를 지니고 있던 조각들이 완전히 부서졌지만 정작 오토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오토가 돌아가자 도윤은 인부들에게 공사 재개를 지시한 뒤 차를 타고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다음 대응 방법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 오토라는 놈이 물건을 가지고 감정가들한테 갈까요?”
석훈의 물음에 도윤이 입맛을 다셨다.
“가야지. 안 가면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잘츠부르크에 있는 주요 언론사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조사해 놨다. 여차하면 언론사마다 전화를 걸어 내부 수리 중이던 옛날 집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나왔다고 제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방법이지만 기자 한두 명만 집으로 찾아가도 욕심 많은 오토는 더 이상 물건들을 깔아뭉개고 있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오토는 점심시간도 채 되기 전에 곧바로 집에서 나와 잘츠부르크 시내로 차를 몰았다. 그가 칼과 종이 뭉치가 든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제법 커다란 옥션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마치 잘 프로그램 된 로봇처럼 그가 원하는 순서를 정확히 밟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 * *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칼입니다. 칼날의 모양과 쇠의 상태도 그렇고, 손잡이를 감싼 가죽 역시 그 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네요. 정확한 연대를 알려면 탄소동위원소 측정을 해야 하지만 일단 눈으로 볼 때는 그렇습니다.”
돋보기까지 들고 칼의 상태를 면밀하게 검사한 감정사의 결론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오토가 내뱉은 말은 도윤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았다.
“비싼 겁니까?”
감정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들 똑같은 질문만 해대는군.
“글쎄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칼이나 갑옷들은 생각보다 흔한 편입니다. 전쟁은 잦고 화승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직전이라서 워낙 많이 제작되었거든요.”
“별로 가치가 없다는 뜻이요?”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그래도 상태가 양호하니까 경매에 올리면 1,000에서 1,500 유로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밖에 안 됩니까?”
실망이 가득한 오토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감정사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 칼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 정도가 시세입니다.”
특별한 의미? 오토가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게 칼과 함께 발견된 문서입니다. 보시다시피 꽤 옛날 거예요. 이런 고문서와 함께 있었던 걸 보면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칼이 아닐까요?”
종이 뭉치를 일별한 감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문서는 제 전공분야가 아니라서 뭐라고 말씀드릴 게 없네요. 우리 옥션에는 고문서 감정가가 없어서 당장 감정해 드리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굳이 문서 감정을 원하시면 따로 전문가를 소개해 드리죠. 감정을 받으시겠습니까?”
내친걸음이었다. 오토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사는 다른 경쟁 옥션이 아닌 잘츠부르크 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소개했다. 오토는 전화를 걸어 그와 약속을 잡자마자 곧바로 차를 몰고 잘츠부르크 대학으로 향했다. 석훈과 함께 그의 뒤를 따르던 도윤은 오토가 잘츠부르크 대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 친구가 찾아가는 사람이 부디 프리츠 호프만 교수였으면 좋겠군. 그럼 내가 두 번 수고할 필요도 없고 딱인데.”
도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토 셰퍼가 소개받은 문서 전문가는 바로 그 호프만 교수였다. 독일 중세사 분야에서는 꽤 이름난 학자였지만 빼어난 문서 해석 능력에 비해 정작 문서 감정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로서의 유명세 때문에 이따금씩 고문서 감정가로 불려 다닌다는 게 문제였다.
“이건! 이걸 어디서 구했습니까?”
지인의 소개로 찾아온 오토 셰펴가 내민 종이뭉치를 받아들 때만 해도 호프만 교수는 다소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상태가 좋은 고문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던 그는 점차 표정을 굳히다가 급기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이 문서가 칼과 함께 발견됐다고 하셨죠? 그 칼도 가지고 계십니까?”
“네. 가방 안에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부탁합니다.”
두 사람 모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오토가 연구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칼에는 흐릿하지만 고대 그리스어로 ‘아조트(Azoth)’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호프만 교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일단 오토가 가져온 물건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칼은 물론이고, 종이 뭉치의 경우에는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겨가며 전체 내용을 담았다. 그는 작업이 모두 끝나자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물건들을 혹시 파실 생각입니까?”
오토가 호프만 교수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만 적당하다면요. 이런 물건들을 제가 가지고 있어봐야 뭐하겠습니까?”
“그럼 제가 사겠습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글쎄요? 어느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호프만 교수가 잠시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문서와 칼을 합해서 십만 유로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비록 문서가 더해졌다고는 하지만 옥션의 감정사가 1000에서 1500유로 정도 될 거라고 감정했던 가격이 잠깐 사이에 백 배 가량 올랐다. 오토 셰퍼는 교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물건들을 챙겨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호프만 교수의 얼굴이 울 것처럼 변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집에 가져가서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감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지갑에서 본래 감정료로 주기로 했던 삼백 유로를 꺼내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교수실을 나왔다. 오토는 등뒤로 문을 닫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됐어. 드디어 횡재를 한 거야.”
당장 칼과 문서를 팔지 않은 건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오토 셰퍼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과묵한 사업가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학자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프만 교수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자신이 발견한 소식을 전했다.
“내가 오늘 파라켈소스의 검을 봤어!”
은밀하게, 하지만 빛보다 빨리 전해진 소식이 몇몇 사람들에게 폭탄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