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92화 (92/300)

92화

오토 셰퍼가 자기 딴에는 이를 악물고 압둘과 흥정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있는 호텔 건너편에는 흰색 롤스로이드 한 대가 서 있었다.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탄 차였다. 영국에서 이곳까지 차를 끌고 왔을 리는 없으니 잘츠부르크에서 빌린 차였다.

“저긴가?”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말에 옆자리에 앉은 비서가 즉각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오토 셰퍼라는 자가 길쭉한 가방을 들고 호텔로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 이브라힘 왕세제와 만나 가격을 협상하고 있을 겁니다.”

다니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준비는 다 끝난 거지?”

“이브라힘 왕세제가 호텔을 예약하자마자 같은 층의 있는 객실 대부분을 저희가 잡았습니다. 현재 그리넘 대장과 부하들이 우리가 잡은 방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토 셰퍼가 호텔을 떠나면 곧바로 이브라힘이 묵고 있는 방으로 진입하라고 해.”

“이미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다니엘이 이를 뿌득 갈았다.

“건방진 무슬림 같으니. 남의 땅에서 함부로 설치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마.”

다니엘이 라스푸친의 목걸이를 뺏긴 곳은 러시아였고, 지금 이곳은 오스트리아였다. 러시아나 오스트리아가 다니엘의 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은 사실상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서 두 눈 멀쩡하게 뜬 채 평생 갖고자 했던 물건을 탈취 당했으니 그로 인한 원한이 가슴 깊이 사무칠 정도였다.

그렇게 다니엘이 이를 갈며 통쾌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토 셰퍼가 들어간 호텔 로비에서는 도윤과 석훈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토가 자기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의 차를 추적해서 이곳까지 왔다.

“형, 저 차 롤스로이드 아니에요?”

호텔 로비에서 피곤한 표저으로 커피를 마시던 석훈이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도윤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롤스로이드. 그런데 누가 저렇게 비싼 차를 길 한복판에 세워 놨지?”

“저게 그렇게 비싼 차예요?”

“차 한 대 가격이 아마 우리 돈으로 5억이 넘을 걸?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야.”

말을 하던 도윤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에 든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가만,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롤스로이드 성애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롤스로이드 성애자라고요?”

“그래. 자신이 대영제국의 후예라는 걸 코끝에 걸고 다닌다고 들었어.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엄청 강해서 다른 나라에 가서도 가능하면 꼭 롤스로이드를 빌리는 모양이야.”

“그럼 저 차에 지금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타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거야 가서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지. 아무튼 지금쯤 이 근처 어디쯤 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양쪽에 프라켈소스의 검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흘러들어가게 하기 위해 꽤 노력했잖아? 당연히 지금쯤은 잘츠부르크에 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위해 영국의 지인들은 물론이고 나일라 아트 갤러리의 폴리니에게까지 일일이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냈다. 잘츠부르크에서 ‘파라켈소스의 검’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 소식 들었냐고. 누가 먼저 오토 셰퍼를 만나기 위해 올지는 도윤도 알 수 없었는데, 호텔 밖에 서 있는 롤스로이드를 보자 다니엘이 이미 도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호텔 밖에 서 있는 롤스로이드를 쳐다보고 있는데 석훈이 또 다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형. 나왔어요. 오토 셰퍼에요.”

석훈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오토 셰퍼가 로비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호텔에 들어설 때는 어깨에 길쭉한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가방 대신 검고 얇은 단단한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몹시 초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표정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변한 걸 보니 물건을 판 모양이군.”

도윤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오토를 쳐다보자 석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저 가방에 물건 값으로 받은 돈이 들어있을까요?”

“아마도. 이브라힘이 현찰로 대금을 지급한 모양이네.”

“저 가방이 200유로짜리 지폐로 가득 찼으면 최소한 백만 유로는 되겠는데요?”

“누가 샀을까? 만약 밖에 있는 롤스로이드 안에 다니엘이 타고 있다면 물건은 이브라힘 왕세제에게 넘어갔다는 뜻인가?”

“다니엘이 사람을 시켜서 물건을 인도받았을지도 모르죠. 자기는 밖에서 기다리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제삼자가 거액을 주고 칼과 문서를 샀든가.”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기다리다 보면 구입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물건을 산 사람은 오토 셰퍼가 들고 들어갔던 가방을 가지고 다시 이 로비를 지나갈 테니까.

* * *

오토가 들어간 스위트 룸의 거실에서 이브라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거래는 그를 대신해서 비서실장인 압둘이 주도하고 있었다. 오토가 백만 유로를 요구하자 압둘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거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검은색의 얇고 딱딱한 가방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압둘이 씩 웃었다.

“열어보십시오.”

이게 뭔가 싶어 압둘의 눈치를 보던 오토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끌어당겼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리자 200유로짜리 지폐 다발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게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거액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압둘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150만 유로입니다. 제 생각에 이 정도면 충분한 대가가 될 것 같군요.”

“이, 이걸 모두 저에게 주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백만 유로를 요구했는데…….”

“이브라힘 왕세제께서는 오토 씨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으십니다. 물건의 가격은 파는 사람이 정하기도 하지만 사는 사람의 관심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죠. 여기에 사인을 해 주시면 이 돈은 지금 이 순간부터 오토 씨의 것입니다.”

압둘은 그 말과 함께 오토의 앞에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호프만 교수가 찍었던 칼과 문서의 사진까지 첨부된 독일어 매매 서류였다. 오토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돈다발에 질려 더 이상 욕심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서류에 사인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서류 내용을 검토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조항은 보이지 않았다.

“거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토가 사인을 하자 곧바로 서류를 챙긴 압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다. 가방을 옆구리에 낀 오토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은 뒤 아무런 말도 없이 도망치듯이 방을 나섰다. 그의 가슴 속에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가방 안의 돈을 꺼내 일일이 세어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그제야 거실 한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며 이브라힘 왕세제가 나타났다. 그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내내 침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거실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거래가 순조롭게 끝나 다행이군.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면 서로 곤란했을 텐데.”

흡족해 하는 왕세제를 향해 압둘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보물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돌멩이가 되는 거지요. 욕심은 많지만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저도 가방 하나로 끝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껄껄대고 웃었다. 사실 압둘이 준비한 현금 가방은 오토에게 준 것 말고도 두 개가 더 있었다. 상대가 계속 버티면 가방 세 개를 모두 줄 각오까지 하고 온 자리였는데, 뜻밖에도 오토의 그릇은 가방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칠 만큼 작았다.

소파에 앉은 이브라힘은 가방을 열어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엄밀히 따지면 칼보다는 문서가 더 귀중한 자료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오직 파라켈소스의 검에 쏠려 있었다. 한참 동안 황홀한 눈빛으로 칼을 들여다보던 이브라힘이 경호원을 불렀다.

“톱을 가져와.”

그 말에 압둘이 흠칫했다.

“지금 바로 현자의 돌을 꺼내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이걸 150만 유로나 주고 샀겠어.”

“죄송하지만 사우디로 돌아가신 다음에 물건을 확인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브라힘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랬다가 이게 가짜면? 그럼 다시 그 오토 셰퍼라는 자를 잡기 위해 잘츠부르크까지 날아올 생각인가? 물건을 샀으면 그 자리에서 확인을 해야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브라힘이 손을 뻗자 경호원이 쇠파이프를 자를 때 쓰는 실톱을 가져왔다. 톱을 받아든 이브라힘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열망이 이글거렸다. 물건을 그 자리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도저히 사우디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가 톱으로 칼 손잡이에 달린 노란 구슬을 자르려는 찰나, 객실 문에서 짤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찰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얼굴에 복면을 한 괴한들이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들고 실내에 난입했다.

“모두 동작을 멈추고 두 손을 들어. 빨리!”

이브라힘과 압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들이 미처 상대의 협박에 반응하기도 전에 경호원들 가운데 몇몇이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괴한들의 권총에서 불꽃이 일어나면서 경호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제야 이브라힘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만! 다들 저항하지 말고 멈춰.”

한 눈에 봐도 방안으로 난입한 괴한들의 수는 십여 명이 넘었다. 그에 반해 방안에 있는 이브라힘의 일당은 본인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전부였다. 중과부적이었다.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이브라힘이 소리치자 그나마 총알을 피한 경호원들이 이를 악물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괴한들이 재빨리 경호원들을 쓰러트리고 두 팔을 등 뒤로 돌린 다음 수갑을 채웠다. 그들은 칼을 꺼내 경호원들의 옷을 속옷만 남기고 모조리 잘라낸 다음 그들의 두 발목마저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압둘이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지르자 괴한들의 리더인 그리넘이 천천히 다가왔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난 그의 눈과 입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이브라힘 왕세제와 압둘마저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수갑을 채우고 테이프로 다리를 묶었다. 두 사람 모두 생전 처음 당해보는 치욕이었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그리넘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압둘의 뺨을 좌우로 번갈아가며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압둘의 얼굴이 퉁퉁 부으면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제야 따귀를 멈춘 그리넘이 한손으로 그의 턱을 받쳐 들었다.

“알라는 병신이고 그리스도만 위대하시다. 이 좃같은 무슬림 새끼들아. 이번에는 우리도 물건만 갖고 사라지겠지만 너희들이야말로 다음번에는 조심해야 될 거야. 또 다시 걸리면 왕세제고 뭐고 이마에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그리넘은 그나마 멀쩡한 몰골을 유지하고 있는 이브라힘 왕세제를 힐끗 쳐다본 다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칼과 문서를 가방 안에 집어넣고 방을 떠났다. 방안에 남겨진 이들은 이튿날 호텔 직원들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속옷 바람으로 묶여 있어야만 했다. 로스차일드와 사우디 왕가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날이었다.

* * *

호텔 로비에서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던 석훈이 다급하게 도윤을 불렀다.

“형, 저기. 아무래도 저놈들이 오토하고 거래한 놈들 같은데요?”

이브라힘 왕세제를 습격했던 그리넘 일당은 곧바로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떠났다. 하지만 오토 셰퍼의 가방을 짊어진 그들의 모습이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석훈의 눈에 걸렸다.

“따라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석훈의 손을 도윤이 잡았다.

“기다려. 저놈들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저 가방을 얻은 것 같지가 않아.”

“정상적이지 않다고요? 그럼 물건을 뺏기라도 했다는 말이에요?”

도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목 위의 머리카락을 봐. 물기가 있지? 목도 땀으로 번들거리고. 지금 가을이야. 그런데 저 자들은 고작 호텔에서 나오면서 왜 하나같이 저렇게 땀을 흘리고 있을까?”

“설마 단체로 호텔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고 나오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여유가 있었으면 운동 후에 샤워를 했겠지. 머리도 말렸을 거고.”

“복면을 쓰고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는 뜻이네요?”

위장을 하거나 복면을 쓴 채 훈련을 한 경험은 두 사람 모두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인 도윤과 석훈은 그들이 호텔을 나가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호텔 밖에 서 있던 흰색 롤스로이드가 시동을 걸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떠난 놈들은 롤스로이드 주인하고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만약 그 차에 다니엘이 타고 있다면, 물건을 산 건 이브라힘 왕세제 쪽일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다니엘은 그 자가 손에 넣은 물건을 빼앗았고요?”

“모든 게 짐작일 뿐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야.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자.”

도윤과 석훈은 다시금 차를 몰고 오랜 만에 빌려놓았던 집으로 돌아왔다. 물건을 누가 가져갔든 바보가 아니라면 분명히 다시 오토 셰퍼에게 돌아올 것이다. 다만 적어도 그게 오늘은 아닐 거라는 점은 분명했다. 두 사람은 모처럼 편한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