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오토 셰퍼가 칼을 팔아치운 다음날, 도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공사 중인 집으로 불러냈다. 인테리어와 관련해서 작업 지시 내용과 실제 공사 상황이 다르니 직접 와서 확인을 해 달라는 게 이유였다. 오토는 혹시 무슨 손해라도 보지 않을까 싶어서 냉큼 다가왔다. 그리고 도윤에게 몹시 짜증을 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지시한 대로 잘 하고 있는데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요?”
“에이, 그래도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돌아간 뒤에 오토 씨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 가서 다시 이곳으로 올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지요.”
도윤은 억지로 그를 끌고 다니면서 누가 봐도 사소한 사항에 불과한 것들을 일일이 지적하며 의견을 물었다. 얼핏 보면 오토가 시공업자고 도윤이 집주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그렇게 공연히 실랑이를 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석훈은 오토의 집 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는 오토의 거실과 부엌, 침실 등을 돌아다니며 미리 사두었던 소형 무선 카메라들을 설치했다. 동작 감지와 원격 송신 기능이 달려 있어서 누군가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면 집 밖에서 곧바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배터리 수명이 사흘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는 게 도윤의 예상이었다.
석훈은 작업을 끝내고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오토는 도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로 날 부르지 마시오.”
오토는 마구 짜증을 내며 집으로 돌아갔다. 도윤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속으로는 쓴 웃음을 지었다. 투덜대지 마라. 그게 다 네가 죽는 걸 막아주려고 하는 거니까.
“형은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칼을 가져갔을 거라고 보는 거죠?”
작업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석훈이 물었다. 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아니, 거의 확실해.”
오토 셰퍼에게서 칼과 문서를 산 사람들이 이브라힘 왕세제 일행이라는 건 분명했다. 오토가 칼을 판 다음날, 잘츠부르크 지역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아랍인들이 객실에서 속옷만 입은 채 꽁꽁 묶여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피해자들의 정확한 신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도윤은 그들이 이브라힘 왕세제 일행일 거라고 짐작했다. 중동에도 최근 예술품 수집 붐이 일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많이 건설되고 있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지금 이 시기의 잘츠부르크는 파라켈소스의 검 이외에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검 하나만을 위해 잘츠부르크까지 날아올 중동 사람은 이브라힘 왕세제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롤스로이드가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설사 상관이 있다고 해도 차에 다니엘이 타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요.”
석훈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
“확실한 증거요? 뭔데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온 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날 납치했던 놈이었거든.”
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으로 도윤의 몸에 총알을 박아 넣은 놈. 도윤은 아직 그 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호텔 로비에서 분명히 그리넘의 얼굴을 보았다. 녀석이 누구의 부하인지를 생각하면 당시 롤스로이드에 타고 있었던 인물은 다니엘 로스차일드일 가능성이 컸다. 녀석이 이번에도 물건을 챙기기 위해 직접 잘츠부르크까지 날아왔다는 뜻이었다.
“정말 돌아올까요? 그 다니엘이라는 놈 말이에요?”
석훈은 그 점에 대해 약간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확신했다.
“다니엘은 런던으로 돌아가자마자 실력 있는 감정가를 불러 자기가 손에 넣은 물건을 감정하게 할 거야. 그럼 그게 가짜라는 게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야.”
“그렇게 쉽게요? 하지만 잘츠부르크에서는 다들 속아 넘어갔잖아요?”
“그거야 이곳 감정가들의 실력이 최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지. 내가 그만큼 잘 위조했기도 하고. 하지만 진짜 감정가들의 눈까지 속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만약 다니엘이 그 검이 가짜라는 걸 끝까지 눈치 채지 못하면요? 오토 집에 설치한 카메라는 배터리 수명이 고작 이틀이라고요. 그때까지 다니엘이 오지 않으면 다시 또 몰래 들어가서 배터리를 일일이 바꿔줘야 해요.”
“일주일만 기다려보자. 그때까지 다니엘이 오지 않으면 그 놈도 속았다는 뜻이야.”
“그럼 계획이 틀어지는 거 아니요?”
석훈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었다.
“그래봤자 오토가 별 탈 없이 무사한 걸로 끝나는 것뿐이지 계획 자체가 틀어지는 건 아니야. 일이 어떻게 풀리든 이브라힘이 당하고 그냥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 자는 다니엘이 진짜 파라켈소스의 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거든.”
“이브라힘이 다니엘을 칠 거라는 뜻이죠?”
“그래. 문제는 아무리 다니엘을 괴롭혀도 이브라힘은 영원히 파라켈소스의 검을 얻을 수 없다는 거지. 애초부터 그런 건 없었으니까. 이건 한 번 붙여놓기만 하면 어느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는 절대로 멈출 수 없는 싸움이야.”
“다니엘이 사실은 나도 속았다고 하면서 검을 가져가라고 내놓으면요?”
도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석훈을 쳐다봤다.
“너 같으면 그런 말을 믿겠냐? 총까지 들고 와서 물건을 뺏어간 놈인데? 당연히 그럴 듯한 위조품을 만들어서 자길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거 보면 형은 참 좋은 머리를 사악한데 더 잘 쓰는 거 같아요.”
“이 자식이! 내 머리는 대부분 건전한데 쓰여. 저 놈들이 가만있는 나를 건드렸을 뿐이지. 그렇다고 같은 머리를 복수를 할 때만 바보로 만들 수는 없잖아?”
두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석훈이 오토의 집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이틀 째 되던 날, 다니엘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 * *
그날 밤, 오토는 자신의 침실에서 기분 좋게 취한 채로 누워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100만 유로짜리 집 한 채와 150만 유로라는 현금이 생겼다. 이게 모두 정체도 모르는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한 덕분이었다. 아무리 억지라도 일단 통하면 성공인 거지. 하지만 그의 푸근한 만족감은 갑자기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누구냐?”
오토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침대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억센 손이 입을 막더니 이마 위로 차가운 총구가 와 닿았다. 오토의 몸이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처럼 덜컥 멈췄다.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그게 네 목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이 될 테니까.”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의 입을 막고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겨누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뒤로 서너 명의 다른 괴한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오토는 곧바로 저항을 포기했다. 잠시 후, 그는 팔이 뒤로 꺾인 채로 묶여서 거실까지 끌려 내려왔다.
괴한들은 거실 창문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린 뒤, 오토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반백의 노신사가 살기 어린 눈빛을 하고서는 그의 앞에 다른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아주 재미있는 장난을 쳤더군.”
장난? 무슨 장난? 오토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떼굴떼굴 굴리고 있는데 반백의 노신사,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그리넘이 재빨리 가방 안에서 파라켈소스의 검과 종이 뭉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다니엘이 그것들을 오토의 눈앞에 들이댔다.
“검과 문서는 아주 잘 만들었어. 우리 감정사들조차 끝까지 진작인지 위작인지 가려내기 힘들어했을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이 송진 구슬이야.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몰라서 조금 고생했어. 알고 보니 동아시아에서 옛날부터 사용하던 환약이더군. 이건 몇 백 년 전 것을 구하지 못했던 모양이지?”
오토는 다니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내민 송진 구슬이 반으로 쪼개져 있는 모양으로 볼 때 안에서 뭔가를 꺼낸 게 분명했다.
“안에 들어있던 게 뭔지 저는 모릅니다.”
오토는 간신히 그 말만을 할 수 있었다. 다니엘의 입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모른다?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 현자의 돌은 어디 있지?”
“현자의 돌이 뭡니까? 저는 모르는 물건입니다.”
다니엘이 큭큭 대며 웃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진짜는 어디 있지? 내 손에 들린 가짜 말고 진짜 파라켈소스의 검 말이야. 어디 있어?”
“모릅니다. 제가 얻은 건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게 전부예요. 저희 집을 수리하다가 벽이 무너지면서 나온 겁니다. 그때 나온 물건들은 그것뿐이라고요. 정말입니다.”
짜악
다니엘이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오토의 뺨을 갈겼다. 그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리엄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자식의 입에서 십 년 전에 먹은 저녁 식사 메뉴까지 다 나오도록 만들어.”
그리넘은 대뜸 오토의 입에 수건을 집어넣더니 그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답답하게 억눌린 오토의 비명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처절하지만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조차 넘지 못하는 절규였다.
* * *
“형. 어떻게 할 거요? 그냥 보고만 있기는 좀 그렇지 않아요?”
오토가 거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시각, 도윤과 석훈은 태블릿으로 전송된 몰래카메라 화면을 통해 그 모습을 생생히 보고 있었다. 석훈의 손에는 장전된 HK416이 들려 있었다. 만약 저들이 오토에게 총을 겨눌 경우 곧바로 위협사격을 해서 놈들의 행동을 저지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넘은 총을 쏘기보다는 오토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이브라힘이 다니엘을 쫓아오지는 않은 모양이네.”
도윤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브라힘이 런던에서부터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뒤를 쫓는 것이었다. 파라켈소스의 검을 뺏긴 그가 그대로 가만있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 그들 사이에 총격전이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잘츠부르크 경찰에 신고해서 놈들을 현장에서 체포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총은 만약을 대비한 보호 수단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브라힘의 대응은 예상보다 기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잘 보고 있어. 만약 놈들이 총을 꺼내들면 곧바로 위협사격을 해.”
석훈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린 뒤 곧바로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나면서 비명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강도가 든 것 같은데 빨리 경찰을 출동시켜주세요.”
도윤은 경찰에게 오토의 집 주소를 불러준 뒤 얼른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멀리서 경잘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켜 현장을 떠났다. 모니터를 통해 다니엘 일행이 당황하면서 급히 집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쉽지 않아요? 형 몸에 총알을 박아 넣은 놈들이잖아요. 나 같으면 다 쏴죽이고 싶을 것 같은데.”
석훈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번이라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자가 될 수는 없잖아.”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조만간 저놈들 사이에서는 피바람이 불거야. 도윤은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브라힘과 다니엘이라면 절대로 좋은 말로 협상해서 사태를 수습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특히 자신의 형제들까지 잔인하게 숙청한 이브라힘이라면 살인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도윤이 맡은 일은 폭탄이 아니라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후, 도윤과 잘츠부르크 공항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석훈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윤이 들고 있는 신문에는 간밤에 오토 셰퍼라는 사람이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폭행당했다는 짧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네. 이백오십만 유로짜리 상처를 입은 셈이니까 오토 셰퍼도 크게 억울해 할 필요는 없을 거야.”
도윤의 말에 석훈이 혀를 찼다.
“남의 불행을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다니엘이 오토를 포기할까요? 런던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날아온 걸 보면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던데.”
“화가 났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겠지. 혹시 진짜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을 테고. 하지만 지금쯤이면 그 양반도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걸 깨달았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오토는 그 정도로 정교한 위작을 만들 수 있는 위인이 못되니까. 우리나라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 사람들은 우황청심환을 쓰지도 않고.”
“그럼 이제 복수는 포기하는 거요? 엄밀히 따지면 다니엘에게는 별로 피해를 준 것도 없잖아요? 런던과 잘츠부르크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든 것 빼고는.”
아니.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지. 그리고 복수는 이브라힘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도윤은 석훈에게 그냥 씩 웃어주었다.
간밤에 오토의 집에서 철수하자마자 두 사람은 곧바로 귀국 준비를 했다. 그들은 미리 장난감 가게에 들러 웬만한 아이 몸집보다 큰 곰 인형을 비롯해서 값싼 봉제 인형들을 여러 개 샀다. 그런 뒤 곰 인형의 배를 갈라 그 안에 가지고 있던 HK416 소총을 비롯한 실탄들을 집어넣은 뒤 다시 바느질을 해서 봉했다.
그 인형들을 모두 커다란 상자 안에 담아서 임대한 컨테이너 창고에 집어넣자 드디어 오스트리아를 떠날 준비가 끝났다. 컨테이너 창고는 이삿짐이나 공장의 재고품들을 장기 보관하기 위해 쓰는 것인데, 이미 뮌헨에서도 같은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마르케스의 집에서 나온 총기류를 뮌헨과 잘츠부르크 양쪽에 나누어 장기 보관한 것이다.
도윤이 잘츠부르크까지 총을 가져온 것은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총격을 당한 이후, 다시는 무기력하게 똑같은 상황에 놓이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석훈은 처음에 총을 땅에 파묻자고 했지만 그럴 경우 녹이 슬어서 못 쓰게 될 우려가 컸다. 반면에 컨테이너 창고는 온라인으로 돈을 보내기만 하면 임대 기간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었다.
“손자병법을 쓴 손자께서 말이야, 전쟁은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게 제일 좋다고 하셨거든. 복수도 비슷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게 제일 좋지.”
비행기가 이륙할 때쯤 도윤이 내뱉은 말이었다. 석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요?”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도윤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요 며칠은 진짜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