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94화 (94/300)

94화

<14. 백제의 미소>

한강일보 일본 특파원인 염조형은 원래 문화부 기자였다. 일 년 전, 주로 경제나 정치부 기자들만 갈 수 있다는 일본 특파원에 임명되어 도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기자로서의 자신의 앞길에 드디어 탄탄대로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호기는 적잖게 움츠러든 상태였다.

“그 기사를 내가 발굴하기만 했어도…….”

얼마 전 고베에서 정선의 그림이 발견되어 한국으로 옮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염조형은 속으로 땅을 쳤다. 그림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던 그는 나중에 회사로부터 은근한 문책을 받았다. 기껏 문화부 기자를 뽑아서 보내놨더니 거기서 뭐하고 있었냐는 얘기였다.

며칠 전, 어떡하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어쩌면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이메일이 한 통 왔다. 메일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치무라 고헤이입니다.”

도쿄 외곽에 자리 잡은 전통 일본식 저택. 자신을 맞이하는 오십 대의 일본 기업가의 얼굴에 맺힌 부드러운 미소가 염조형에게는 보살의 미소처럼 보였다. 제발 저 사람이 전화로 했던 말이 사실이기를…….

“한강일보의 염조형입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그가 안내된 곳은 전형적인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앙증맞게 꾸며진 일본식 정원이 보였고, 벽에는 말을 탄 무사들이 활을 쏘며 사냥하는 세 점의 연작 그림이 걸려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그려진 것이 분명한 그 그림들은 염조형이 기억하기로는 한때 특별전에 초대되어 전시되기도 했던 고가의 걸작들이었다.

‘저 그림들이 한 점에 1억 엔이 넘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염조형이 잠시 벽에 걸린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두 사람 앞에 차와 과자가 담긴 조그만 나무 그릇이 하나씩 놓였다.

“바깥 날씨가 벌써 쌀쌀합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시죠.”

“아, 감사합니다.”

우치무라가 권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날씨에 관한 내용 없는 이야기가 잠시 오고간 뒤에 염조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한테 보여주실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우치무라가 씩 웃으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러자 방 옆으로 난 문이 열리면서 삼십대의 남자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우치무라의 앞에 상자를 내려놓더니 들어올 때처럼 조용하게 물러났다.

“이게 말씀하신 그 불상입니까?”

염조형의 물음에 우치무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시죠.”

그 말과 함께 우치무라가 상자의 뚜껑을 벗겼다. 그러자 기대했던 대로 안에서 30cm 높이의 불상이 나타났다. 한쪽 다리를 살짝 굽힌 자세로 서 있는 보살을 묘사한 입상. 녹색의 녹이 불상 전체를 덮은 가운데 언뜻 언뜻 금빛이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화로 들었던 금동보살 입상이 분명했다. 보살의 입가에 맺힌 저 미소는 전형적인 …….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보살입상이지요. 저희 집 가보입니다.”

염조형은 불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없이 사람을 품어줄 것 같은 인자한 미소. 저게 바로 백제의 미소라는 거구나. 오른 손을 접어 반쯤 들어 올린 자세로 서 있는 보살은 주름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선 고운 여인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예술 작품이었다.

“제가 감히 물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이건 분명히 진품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물건은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염조형의 말에 우치무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한 세트의 서류를 내놓았다. 도쿄 국립 박물관으로부터 받은 진품 감정서였다.

“선친께서 감정을 의뢰해서 받은 서류입니다. 불상 자체는 증조부께서 조선, 아니 한국에 계실 때 우연히 얻어서 일본으로 가져온 물건이지요. 워낙 아름답고 품격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대를 이어가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의 말 가운데 몇 개의 단어가 살짝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염조형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확실히 가보로 간직할 만한 보물입니다. 아니, 이 정도면 국보급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저에게 연락해서 이걸 보여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염조형의 물음에 우치무라가 손을 들어 슬쩍 턱을 쓰다듬었다.

“얼마 전에 한국의 불교 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1907년에 부여에서 몇 가지 백제 유물이 한꺼번에 발굴되었는데 그때 출토되었던 보물들 가운데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행방불명되었다더군요. 당시 찍었던 흑백 사진만 남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염조형은 우치무라가 하려는 얘기를 금세 알아들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불상이 당시에 행방불명되었던 금동보살입상이라는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저야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 학자가 아니니까 장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요. 하지만 증조부께서 이 불상을 얻었을 때가 기사에 적힌 행방불명 시기와 비슷합니다. 염 선생께서 본래 한국에 계실 때 문화부 기자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보여드리고 의견을 물으면 어떨까 싶어서 집으로 모셨습니다.”

문화부 기자가 무슨 전문 감정가도 아니고 보는 것만으로 뭘 알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눈앞의 불상이 적어도 가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불상과 감정서를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특종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는 혹시나 싶어서 가지고 온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죄송하지만 사진을 몇 장 찍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찍으십시오.”

그날 오후, 염조형이 찍은 사진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본사로 전송되었다. 그가 보낸 메일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우재경 문화부장에게까지 보고되었다. 미술품을 보는 안목은 평범하지만 기자로서의 촉이 대단한 인물. 황일우 화백의 위작 사건 때 도윤과도 인연을 맺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 * *

“이렇게 오빠네 부녀하고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서울의 한 고급 레스토랑. 전망이 빼어나지만 음식 값이 워낙 비싸서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사람들은 출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그곳에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풀코스 메뉴를 즐기고 있었다. 미래 전자 사장인 최병호와 그의 딸 최서라, 그리고 청파 갤러리의 관장인 최수아가 함께 모인 자리였다.

“근데 오빠가 웬일이에요? 그 동안 바쁘다면서 얼굴도 잘 보여주지 않더니.”

최수아의 말에 최병호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무리 시간이 없기로서니 여동생 얼굴 볼 시간도 없을까? 얼굴 보고 싶으면 너라도 먼저 전화하지 그랬냐?”

“바쁜데 공연히 방해할까봐 그랬죠.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이에요? 나하고 서라를 함께 불러내고. 특별히 할 얘기라도 있어요?”

“특별한 건 아니지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같이 나오라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그 말 이후로 최병호는 정말로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용건을 꺼낸 것은 디저트가 나온 뒤였다. 뜬금없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서라, 너 요즘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최서라는 물론이고 최수아까지 동시에 흠칫했다. 최수아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빠를 쳐다봤지만 그녀보다는 최서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이도윤이라고 현소 갤러리 이세준 대표님 아들이에요. 미국에서 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지금은 현소 갤러리에서 전문 감정사 겸 팀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네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자주 와서 안마도 해드리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똑똑한 젊은이라고 칭찬하시더구나. 사귄 지 오래 됐니?”

할아버지도 도윤 씨를 좋게 보셨구나. 최서라는 은근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게 된 건 일 년이 조금 넘었지만 사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아요.”

눈치를 보고 있던 최수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일본까지 가서 나마타 해바라기를 감정한 사람이 바로 이 박사예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그때부터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최서라의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본 최병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미리 어른들한테도 말씀을 드리고 그래라. 진지하게 사귀는 거면 인사를 시켜도 좋고. 그런 걸 괜히 숨기니까 사람들이 괜히 오해하지 않냐?”

“오해라고요? 무슨 오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최서라와 최수아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네 큰아버지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런데 형님이 너한테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더라.”

최서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본 최수아가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오빠가요? 아니 큰오빠는 평소에 조카들한테 별로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서라한테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그래요? 누군데요? 그 소개시켜준다는 남자가.”

“한대길 의원 아들을 만나보라고 하더라.”

“한 의원 아들이면 한치호요? 한성 옥션 기획 실장?”

“그래. 그 친구다. 얼핏 듣기에 평이 별로 안 좋은 친구인 것 같아서 거절했다. 사실 서라 생각을 물어보는 게 먼저이기는 하지만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그냥 거절하길 잘했구나.”

“당연히 잘하신 거예요. 아니, 큰 오빠는 자기 조카 앞길을 막으려고 작정을 하셨나?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어디서 그런 쓰레기를 소개시키겠다는 거예요?”

“아이, 고모. 그만하세요. 아빠가 거절하셨다잖아요.”

펄펄 뛰려는 최수아의 손을 최서라가 살짝 잡아당겼다. 그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듯하던 최수아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거 혹시 큰오빠 생각이 아니라 한대길 의원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거 아니에요?”

최병호가 최서라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최수아의 얼굴이 더욱 더 딱딱해졌다.

“큰오빠가 한대길 의원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는가 보네요? 여당 실세라는 건가요?”

“애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최병호가 엄한 눈빛으로 최수아를 책망한 뒤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너도 큰아버지 성격을 알 거다. 조만간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올 거야. 조금 거북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만나면 단호하고 예의바르게 네 뜻을 말씀드려라.”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아빠.”

“그 이도윤이라는 친구하고 계속 사귈 거면 아빠하고 엄마한테도 인사시키고. 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더라.”

“그럴게요. 하지만 나중에요. 지금은 아직 조금 이른 것 같아요.”

최병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수아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아참. 서라 너 오늘 한강일보 문화면에 실린 기사 읽었니? 일본에서 백제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다던데?”

굳어 있던 최서라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한국 미술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금동보살입상도 일종의 금속공예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기사가 실렸어요? 점심시간 때 인터넷으로 기사 검색했을 때는 못 봤는데…….”

“오후 늦게 뜬 기사야.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특급 유물이라나 봐.”

“진품이래요?”

“양태현 교수라고 백제 불상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가 한 분 계셔. 그 분이 직접 일본까지 가서 감정을 했다고 들었어. 진품이 확실하대.”

“그 말이 사실이면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렇지? 그럼 네가 가서 직접 보고 올래? 이왕이면 작품 대여 허락도 받으면 좋고.”

얘기가 급작스럽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최서라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네? 제가요?”

“그래. 올 연말에 우리 갤러리에서 불교 특별전을 하잖아. 그때 그 불상도 함께 전시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 아니겠어? 해 볼래?”

최서라는 고모가 오늘 그 기사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작품 대여를 부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말을 꺼내신 거였구나. 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단 정확한 상황을 알아본 다음에 제가 한 번 일정을 짜볼게요.”

“오케이. 그럼 네가 맡는 거다?”

그때만 해도 최서라는 갤러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본격적인 일을 맡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치무라 고헤이라는 일본 사업가가 소장하고 있다는 금동보살입상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갑자기 지나칠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일본까지 가서 금동보살입상을 감정하고 왔다는 양태현 교수가 그 작품이 단순히 괜찮은 미술품이 아니라 국보급이라는 칼럼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

[백제의 미술품들은 신라에 비해 그 수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그나마도 상당수가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과거라면 몰라도 이제는 우리의 경제력도 당당히 세게 10위권까지 도약했다.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자신들의 유산을 외면하고 남의 나라 박물관만 기웃거리며 감탄하고 살 것인가?]

처음에는 조금씩 번져가던 작은 불씨가 어느 순간부터는 커다란 불꽃이 되었다. 일본 강점기 때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귀중한 국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여론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급기야는 국회에서까지 문화체육부 장관을 불러서 이 문제를 따지기까지 했다.

“문화체육부 장관으로서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 아닙니까?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에 묶여 있어요. 이 기막힌 현실을 도대체 언제까지 방치할 겁니까?”

정부에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금동보살입상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회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그 문제를 따진 사람이 바로 한대길 의원이었다. 한치호의 아버지이자 한성 옥션 사장인 성진아의 남편이기도 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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