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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96화 (96/300)

96화

압둘이 중간 단계를 건너 뒤고 자신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을 때, 야세르 라힘은 적잖게 놀랐다. 중요한 일이구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압둘의 지시 내용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다만 대상이 되는 인물이 너무 거물이어서 예전에 최서라라는 한국 유학생 집을 뒤졌던 것과는 무게감 자체가 질적으로 달랐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다니엘 로스차일드를 잡아라.”

야세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납치하라는 건 생포를 뜻하는 겁니까?”

“그래. 놈은 항상 여러 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움직여. 집에는 더 많은 경호원들이 상주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거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영국 전체에 퍼져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특수 요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 뒤에 다니엘의 집과 주요 이동 경로 등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저택을 습격하는 건 무리야. 자칫하면 희생자만 낳고 작전은 실패할 확률이 커.”

문제는 이동 중에 습격한다고 해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다니엘의 차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차에 버금갈 정도로 견고한데다 온갖 특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보통 롤스로이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내실은 전차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알라의 요술봉을 가지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작전을 짜는 과정에서 수하들 가운데 한 명이 그런 제안을 했다.

“RPG-7 로켓 발사기를? 그걸 쐈다가는 납치가 아니라 사살이 될 텐데? 아무리 특수하게 제작된 차라도 그걸 맞고 견디기는 어려워.”

“다니엘의 차가 아니라 경호차들을 박살내는데 쓰자는 말입니다. 놈의 부하들을 먼저 제거한 뒤에 사로잡는 게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괜찮은 생각이었다. 물론 백주 대낮에 RPG-7을 쏘아대면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테러가 된다.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경찰들이 달려오기 전에 현장을 떠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생각이었다. 압둘 비서실장은 분명히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 * *

런던에서 출발해 멀리 히드로 공항을 바라보면서 윈저 성으로 향하는 한적한 도로. 세계적인 대도시답게 외곽까지 주택가와 상가, 공장지대가 교대로 이어지던 주변 풍경이 갑자기 농작물이 자라는 전원으로 바뀌었다. 벌판과 구릉이 물결치듯 이어지는 지형을 관통하는 도로 위를 흰색의 롤스로이드가 두 대의 경호 차량을 앞뒤로 세운 채 달리고 있었다.

“뭐야? 왜 갑자기 차가 느려졌어?”

롤스로이드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있던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시속 60마일 이상으로 달리던 차의 속도가 갑자기 뚝 떨어진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전방에서 대형 컨테이너 차량이 길을 막고 서행 중입니다.”

운전사의 보고에 다니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운전사의 말마따나 백 미터 가량 앞에 대형 컨테이너 화물차가 1차선과 2차선 사이에 바퀴를 걸친 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저 놈 수상한데? 선도차에 연락해서 갓길로 빠지라고 해봐. 당장 추월할 것처럼.”

“알겠습니다.”

연락을 받은 선도 경호차가 속도를 높이면서 갓길 쪽으로 차선을 바꾸는 순간, 앞서가던 컨테이너 차가 갑자기 왼쪽으로 핸들을 확 꺾었다. 타이어가 도로에 미끄러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다란 컨테이너 차량이 위태롭게 비틀거리더니 2차선 도로를 비스듬하게 가로막으며 멈췄다. 그 바람에 갓길로 빠졌던 선도차가 갈 곳이 없어졌다.

쿵미처 차를 세우지 못한 선도차가 결국 컨테이터 차량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뒤를 따르던 롤스로이드와 후위차는 다행히 제때 멈춰서 충돌을 면했지만, 그들이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도로 뒤편에서 두 대의 밴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회장님. 몸을 숙이십시오.”

다니엘의 옆에 타고 있던 그리넘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며 소리쳤다. 후미에서 나타난 밴들이 멈추더니 복면을 한 채로 소총을 든 괴한들이 문을 열고 내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반대 차선으로 넘어가서 앞으로 달려.”

그리넘이 운전사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네? 하지만 그럴 경우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와 충돌을 할 우려가…….”

머뭇거리는 운전사를 향해 그리넘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 놈들 손에 총이 들린 거 안 보여? 여기서 선 채로 당하기 전에 그냥 달리란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운전사가 반대편 차선으로 핸들을 트는 걸 확인한 그리넘이 곧바로 무전기를 통해 다른 경호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이다. 전원 공격해. 어떡하든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어.”

눈으로 얼핏 확인한 바에 따르면 두 대의 밴에서 내린 습격자들의 수가 여덟 명이었다. 반면에 롤스로이드의 후위 차에 탑승한 경호원들은 네 명뿐. 그리넘은 선도차에 탑승했던 경호원들 가운데 일부만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럴 경우 적을 물리치는 것까지는 어려워도 다니엘이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롤스로이드 운전수가 핸들을 꺾는 순간, 전방을 가로막으며 멈췄던 컨테이너 차량의 운전석이 벌컥 열렸다. 그와 함께 두 명의 복면 괴한이 새롭게 몸을 드러냈는데 그 중 한 명의 손에 RPG-7이 들려있었다.

“미친!”

그리넘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야세르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RPG-7은 분명히 다니엘이 탄 차가 아니라 경호차를 박살내기 위해서 쓰기로 했다. 그러나 실전이 벌어지자 컨테이너 차량에 탔던 부하가 순간적으로 흥분한 게 분명했다.

가장 먼저 상대의 무기를 확인한 운전사가 기겁을 하면서 액셀을 밟았다. 순간 RPG-7 후미에서 불꽃이 일어나더니 롤스로이드의 후미에서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로켓탄이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차가 탄력을 잃은 팽이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뒤에서는 이미 양쪽 간에 교전이 벌어지면서 총성이 빗발처럼 도로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넘은 차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나름대로 시간을 끌어줄 것을 기대했던 후미의 경호원들이 자동소총에 적중되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선도차에서 튀어나왔던 두 명의 경호원들 역시 미처 자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복면 괴한들이 난사한 총을 맞고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빌어먹을!”

첫 발을 명중시키지 못한 RPG-7 사수가 또 다른 로켓탄을 장착하는 게 보였다.

“밟아. 무조건 밟으란 말이야.”

그리넘은 이를 악물고 소리치면서 차창을 내렸다. 다니엘의 롤스로이드는 전체가 방탄 처리가 된데다 타이어 역시 특수하게 제조된 것이었다. 덕분에 설사 바퀴 한두 개가 펑크 나더라도 한동안은 최대 시속 45마일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차라도 대전차 로켓탄을 정통으로 맞으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RPG-7 사수가 두 번째 로켓탄을 장착하고 발사 통을 어깨 위에 올려놓는 순간, 이리저리 흔들리던 롤스로이드가 드디어 잠시 멈췄다. 서로를 겨누고 있던 그리넘의 눈과 RPG-7 사수의 눈이 허공을 격하고 마주쳤다. 기겁을 한 RPG-7 사수가 다급하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그보다는 그리넘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탕날카로운 총소리와 함께 RPG-7 사수가 발사통을 놓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자 또 다른 한 명의 괴한이 바닥에 떨어진 RPG-7을 주워들려고 달려들었다.

탕, 탕, 탕, 탕.

제어 능력을 회복한 롤스로이드가 도로 위에 타이어자국을 남기며 앞으로 튕겨나가는 순간, 그리넘의 총구가 계속해서 불을 뿜었다. RPG-7에게 달려들던 복면 괴한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뒤늦게 뒤에서 날아온 총알들이 차 트렁크와 뒷유리를 요란하게 두들겼지만 그 정도로는 롤스로이드의 두터운 장갑과 방탄유리를 뚫을 수 없었다.

뒤늦게 후미에서 달려온 괴한 가운데 한 명이 다시금 RPG-7을 발사했지만 숙련된 사수가 아니었던지 로켓탄은 롤스로이드를 한참 벗어나서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 사이에 다니엘이 탄 차는 그들의 사거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멀리 왔을까? 반대편 차선으로 몇 대의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사건 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게 보였다. 비로소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좌석에 등을 기대면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구일 것 같아?”

그리넘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즉각 대답했다.

“이브라힘 왕세제가 보낸 놈들이 분명합니다. 영국 한복판에서 대형 컨테이너 차량을 동원하고 알라의 요술봉까지 쓸 정도라면 어설픈 테러리스트일 리가 없습니다.”

다니엘도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한테 가짜 파라켈소스의 검을 탈취당한 것에 대한 복수겠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그걸 되찾아가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브라힘은 아직까지 그 검이 진짜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앞으로 길고 험한 싸움이 이어지겠어. 쓰레기를 뺏은 대가치고는 너무 크군.”

다니엘이 씁쓸한 미소를 짓자 그리넘도 입맛을 다셨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더 경호에 만전을 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외출도 삼가십시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냥 포기할 놈들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사실은 그 검과 문서가 가짜였다고 한들 이브라힘이 믿을 리가 없겠지?”

“자신을 놀리려고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아, 미치겠군.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가짜를 일부러 벽속에 숨겼을까? 오토 셰퍼라는 놈은 분명히 아닌 것 같은데. 그 검과 문서는 아마추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공포와 분노, 짜증과 두려움이 번갈아가며 다니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차라리 돈으로 싸우는 거라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기를 들고 서로를 노리는 싸움에서는 아무래도 이브라힘이 더 유리했다.

“파라켈소스의 검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에 넣은 칼이 가짜라니……. 도대체 어떤 놈이 그랬을까?”

속에서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 *

한국 정부는 진통 끝에 결국 우치무라의 금동보살입상의 구매를 포기했다. 본인이 말도 안 되는 고액을 고집하는 한, 문화재청이 단독으로 15억 엔이나 주고 불상을 사들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정부의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한대길 의원은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 너무 소극적이라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어댔다.

‘저 양반 아무래도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단 말이야. 분명히 뭔가 있어.’

도윤이 한대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동안 결국 우치무라는 불상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홍콩과 상해의 중국 경매 회사 몇 곳이 주관 회사로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적으로는 상해에서 경매가 열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즈음, 도윤이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쉬주하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옛날 지도 교수님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았던 모든 인맥을 총동원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녀석은 도윤이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공치사부터 늘어놓았다.

“다음에 만나면 내가 술을 사지. 진짜로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져 보일 때까지.”

“오케이. 상해에서 경매가 열리게 된 건 알지? 결론부터 말하면 금동보살입상을 살 사람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 왕이푸가 낙찰 받을 거야.”

“왕이푸? 아리쓰의 사장 말이야?”

“그래. 왕이푸가 나선 이상 다른 큰손들은 들러리에 불과해. 당 고위 간부가 아닌 이상 왕이푸와 베팅 경쟁을 할 부자는 중국에서도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은 죄다 고미술품에 별로 관심이 없어.”

반면에 왕이푸는 유럽이나 미국 미술 시장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미술 시장의 큰손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큰 온라인 쇼핑 업체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그는 심지어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왕이푸가 그린 유화가 홍콩 경매에서 60억 원에 낙찰되면서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왕이푸가 불교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나? 그런 얘기는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도윤의 물음에 쉬주하오가 킥킥대며 웃었다.

“부자들의 변덕을 누가 예상하겠어? 원래는 관심이 없던 게 맞아. 그런데 2년 전부터 갑자기 불상과 불화에 푹 빠졌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하더라고. 올해 상하이 박물관 주최로 열렸던 실크로드 특별전 알지? 그 전시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기업이 바로 아리쓰야.”

실크로드 특별전이라고? 중국인들에게 수당 시대의 중국 불교 미술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전시회였다. 도윤이 뭔가 머리를 간지럽히는 생각 때문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쉬주하오가 깜빡했다는 듯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참. 아리쓰가 최근에 한국의 경매 회사 한 곳하고 뭔가를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나도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건데, 아마 두 회사가 공동으로 북경에 새로운 경매 회사를 세우려나봐. 합작 회사 형식으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아니야.”

“한국의 경매 회사? 거기가 어딘데?”

“뭐라더라? 잠깐만.”

쉬주하오가 뭔가를 부스럭대며 찾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가 다시 들렸따.

“찾았다, 한성 옥션. 근데 그거 한국에서 제일 큰 경매 회사 아니야?”

“맞아. 화랑이 아니라 경매 회사만 놓고 따지면 가장 크지.”

그리고 한대길 국회의원이 마누라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이기도 하고. 이거 진짜 냄새가 나는데? 도윤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왕이푸가 낙찰을 받으면 예상 낙찰가가 어느 정도 될까? 마구 지르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낙찰가가 올라가겠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리 과감하게 베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 물건에나 마구 지르는 건 아니니까. 관건은 그 금동보살입상이 얼마나 뛰어난 예술품이냐에 달렸어.”

적어도 한화로 백억까지는 가지 않을까? 아마 시작가가 얼마냐에 따라서 낙찰가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도윤은 별로 관심이 없던 상하이 경매에 직접 참가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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