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습격을 당했던 사건은 언론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런던 근교의 도로 한복판에서 자동 소총과 RPG-7까지 동원되어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소식을 듣는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근처에 CCTV는 없었지만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주변을 달리던 자동차들의 블랙박스에 생생한 전투 방면이 찍혔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들도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테러범들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영국의 한 사업가를 노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낮의 도로를 피로 물들인 잔혹한 테러범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해서 도주하는 여유를 보여주기까지 했는데요, 그 때문에 사건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들은 모두 피해자의 개인 경호원들로 밝혀졌습니다. 한편 경찰 당국은 이번 사건에 대해……….]
이브라힘 왕세제는 신경질적으로 TV를 껐다. 압둘은 분노에 찬 왕세제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실패했다고? 훈련받은 정예 요원들이 RPG-7까지 들고 갔는데도?”
“죄송합니다.”
압둘은 변명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롤스로이드가 방탄 차량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총도 아닌 자동소총의 총알까지 완벽하게 튕겨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록 명중은 되지 않았더라도 바로 옆에서 터진 로켓탄의 폭발 충격마저 이겨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타이어 두 개가 펑크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주하다니…….
“핸들을 잡은 게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내 전용 운전사로 채용하고 싶군. RPG-7이 코앞에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데도 과감하게 그냥 액셀을 밟았다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시신을 수습해서 철수한 건 잘했어.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우리 쪽 신분이 노출됐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다는 소리 좀…….”
이브라힘은 이를 꽉 물고 억지로 울화를 참았다. 여기서 몇 마디 더 하다가는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압둘의 얼굴에 물건을 집어던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그 실패의 내용은 다니엘이 현장에서 죽는 것이지 멀쩡하게 살아서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납치가 아니라 사살을 지시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냉정하게 판단할 때 다니엘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살아가서 도망간 게 다행이기는 했지만.
“다니엘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걸 보니 저쪽에서도 애를 쓴 모양이지?”
“경찰에서는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피해자라는 걸 이미 파악했을 겁니다. 다만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경찰과 언론에 적극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서 신분이 노출되는 걸 막은 듯합니다.”
이브라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시 천장을 쳐다봤다. 후우, 빌어먹을.
“차라리 놈의 저택으로 직접 치고 들어갈 걸 그랬나?”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2개 소대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게 저희 쪽 분석 결과였습니다. 남의 나라 한 복판에서 그렇게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했다가는 심각한 문제가…….”
“알아. 그리고 놈이 자기 저택 안에 파라켈소스의 검을 두었다는 보장도 없다는 거지?”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로스차일드의 비밀 금고가 있는 저택과 별장은 영국 안에만 세 곳입니다. 그 밖에도 몇 군데 은행에 개인 금고를 만들어둔 게 분명합니다. 그 가운데 어느 곳에 파라켈소스의 검을 두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브라힘이 기가 막힌 듯 혀를 차자 압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왕세제 전하. 파라켈소스의 검에 현자의 돌이 있다면 로스차일드가 이미 그것을 꺼내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사용 회수에 제한이 있는 것으로…….”
“그놈은 아직 현자의 돌을 사용하지 않았어!”
이브라힘이 워낙 단정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압둘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본 이브라힘이 피식 웃었다.
“이봐, 다니엘이나 내가 왜 현자의 돌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고 생각해? 돌을 황금으로 바꾸고 싶어서? 지금도 부자인데 여기서 더 엄청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압둘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현자의 돌은 워낙 다양한 효능을 지닌 물건이었다. 그렇더라도 영원히 무한하게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령 돌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해서 현자의 돌 하나로 이 세상을 죄다 황금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압둘이 침묵을 지키자 이브라힘이 스스로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불로불사.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사람들의 꿈이었지. 현자의 돌을 이용하면 늙은이도 젊음을 되찾을 수 있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산 사람의 수명을 늘려주는 건 가능하다는 얘기야. 그런데 자네들이 그동안 지켜보니까 어때? 다니엘이 젊어졌던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반백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녀석은 아직 현자의 돌을 사용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가 더 애가 타는 거야. 그 놈이 한 번이라도 더 현자의 돌을 쓰기 전에 최대한 빨리 그걸 뺏어 와야 한단 말이야.”
“야세르에게 다음 계획을 짜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이브라힘이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안 돼. 한 번 실패한 자에게 왜 다시 일을 맡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알겠습니다.”
압둘은 이브라힘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서재를 나서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다니엘이 아직 현자의 돌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고? 왜? 혹시 그가 아직 현자의 돌을 얻지 못한 건 아닐까? 파라켈소스의 검이 가짜일 가능성은 없나?
하지만 그는 이브라힘의 앞에서 차마 그런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이브라힘은 지금 이성을 잃고 있었다. 하긴 압둘 자신도 잘츠부르크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호텔 종업원들에게 발견되었을 때의 치욕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이브라힘이 아니라 압둘을 위해서라도 다니엘은 진짜 파라켈소스의 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련하게 여전히 현자의 돌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닐 경우 평생을 유지해온 이브라힘과의 돈독한 신뢰 관계에 금이 갈 우려가 있었다.
* * *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쿠라부(Club). 엄격한 회원제로 운영되며 정장을 입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되는 VIP 전용 술집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한쪽은 금동보살입상을 경매에 올리겠다고 선언한 일본의 사업가 우치무라였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인물은 한국의 국회의원 한대길이었다.
“공무로 바쁘실 텐데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치무라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한대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한일의원연맹의 일정이라는 게 사실은 친목 모임이나 다름없지요. 어차피 오늘 저녁에 우치무라 선생을 보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겁니다.”
“정치인에게는 술자리도 공무의 연장이나 다름없지요. 귀한 시간을 내주셨으니 오늘은 제가 이 집에서 가장 비싼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우치무라가 옆자리에 앉은 호스테스에게 고급 위스키를 주문했다. 주문한 술이 나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몇 차례 술잔이 돌자 우치무라가 호스테스들에게 눈짓을 했다. 배석했던 여자들이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비우자 우치무라가 한대길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덕분에 경매 낙찰가가 크게 뛸 것 같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대길이 부드럽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어디 우치무라 사장만 좋으라고 하는 일입니까? 서로 윈윈하자는 거지요. 파는 쪽은 물건을 비싸게 팔아서 좋고, 사는 쪽은 한국 정부가 포기한 문화재를 명분을 세워가며 소장할 수 있어서 좋고. 왕이푸 회장도 만족해했어요.”
“북경에 세우기로 한 합작 회사 문제는 잘 진척이 되고 있습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왕 회장이 공산당 고위간부들을 이미 다 설득해 놨어요. 그게 세워져야 그 양반도 이번에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 알아서 열심히 하겠지요. 우치무라 사장은 나중에 물건만 잘 공급해주면 됩니다.”
“그야 두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본 땅에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각지에서 밀반입된 문화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팔기는 어려운 물건들이니까 소장자들도 판이 마련되기만 하면 기꺼이 내놓을 겁니다.”
한대길이 껄껄대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게 바로 상부상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당장은 이번 경매에 집중합시다. 우치무라 사장은 그저 약속한 대로 다른 물건들의 시작가를 낮게 잡아주기만 하면 돼요.”
“물론이지요. 이미 다른 위탁자들에게도 단단히 약속을 받아놨습니다.”
“경매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문제도 확실히 처리해야 합니다. 그게 삐끗하면 이번 경매 전체가 엉망이 될 수 있어요. 수십억 엔이 걸린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창하이(滄海) 옥션 사장이 장담했습니다. 엄격하게 선발된 이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내기로 했으니까요. 그 초대장을 받은 이들만 응찰자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절대로 경매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겁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외부에 공개되는 건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뿐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 명단이 바로 경매의 공정성을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꽤 유명한 수집가들의 이름이 섞여 있으니까 설사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겁니다. 대신 금동보살입상을 제외한 다른 위탁 물품들의 목록은 모조리 비공개로 처리했습니다. 프리뷰도 없습니다.”
“왕이푸 회장을 제외한 다른 수집가들은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게 확실하죠?”
“왕 회장님을 제외하고는 한국 불교 미술품을 사들인 적이 있는 수집가들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이 상해까지 관심도 없는 물건을 보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럼 별 문제가 없겠군요. 한 잔 합시다.”
한대길이 내민 술잔에 우치무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두 사람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 * *
상하이의 쉬주하오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이미 자신이 부탁한 정보는 모두 전달받은 상태였으므로 도윤은 다소 의아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쉬주하오가 약간 흥분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박사. 저번에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던 그 경매 말이야. 거기에 관해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어.”
“새로운 소식? 좋은 소식이야, 아니면 나쁜 소식이야?”
“어, 그게 좀 애매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 경매가 비공개로 진행될 거래.”
“비공개? 경매 주관사가 창하이 옥션 아니었어? 거긴 꽤 이름 있는 회사인데 그런 곳에서도 비공개 경매를 해?”
“소더비나 크리스티 지사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중국 회사라면 가능해.”
도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애매하기는? 이건 확실히 안 좋은 소식이었다.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가진 경매는 대개 공개로 진행된다. 물론 공개 경매라고 해서 아무나 참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대개는 소정의 등록비만 내면 누구나 응찰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게 보통이다. 취재를 원하는 기자들에게는 출입증도 발부해 준다.
또한 대개의 공개 경매에서는 사전에 프리뷰 전시를 진행한다. 위탁자나 낙찰자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더라도 경매 물품의 정체와 낙찰가 역시 공개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비공개 경매에서는 사전에 초대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경매를 진행한다. 경매 물품 목록을 받아볼 수 있는 사람들 역시 초대된 소수에 한정된다. 기자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작품이 얼마에 낙찰되었는지도 경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보통 이런 식의 비공개 경매에는 장물을 비롯해서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취득된 물건들이 자주 출품된다. 그래서 공신력이 있는 경매 회사에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방식인데, 중국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공산당 고위 간부나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는 부호들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비공개 경매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경매의 핵심 인물이 왕이푸라고 했지?”
도윤의 물음에 쉬주하오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 다른 응찰자들은 죄다 왕이푸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 참가하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왕이푸 말고는 죄다 조무래기들만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다크호스로 지목할 만한 사람은 없어?”
“다크호스가 아니라 유명한 수집가들 이름들도 초대자 명단에 있어.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 초대장을 받고도 절대로 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뿐이야. 이번 경매 주제가 한국 불교 미술이잖아? 명단에서 내가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 가운데 그쪽 분야에 관심을 가진 수집가는 한 명도 없어. 아참, 한국 사람도 한 명 초대를 받기는 했어.”
“한국 사람이라고? 누군데?”
“한치호라고 되어 있던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야.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알지. 그것도 아주 잘.
“어떤 물건들이 이번 경매에 출품되는지는 모르지?”
도윤의 질문에 쉬주하오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그걸 공개하면 더 이상 비공개 경매라고 할 수가 없잖아. 비공개 경매의 핵심은 물건을 숨기는 거야. 사람이 아니라. 물론 낙찰 받은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미안하지만 그 초대자 명단을 나한테 이메일로 보내줄 수 있어?”
“오케이. 당장 보내줄게.”
전화를 끊은 도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강 신문의 단독 기사가 금동보살입상에 대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그 불상의 가격을 끝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은 사실 한대길 의원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국회에서 백억이 아니라 천억을 주고서라도 문제의 불상을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 때문에 이번 경매에서 불상의 낙찰가가 최소 10억 엔을 넘길 거라는 예상이 무성했다. 그런데 바로 그 한대길의 아들이 회사 이름을 내걸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참가한다고?
창하이 옥션에서 한성 옥션이 아닌 한치호 개인에게 초대장을 보냈다는 사실에서 도윤은 돈 냄새를 진하게 맡았다. 이번 경매에는 반드시 참가해야 하겠는데? 하지만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