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99화 (99/300)

99화

가장 먼저 나온 작품은 16세기에 그려진 조선 시대 탱화였다. 호수로 따지면 20호 정도 되는 세로 90cm, 가로 75cm 크기의 이 그림에는 특이하게도 네 군데의 모서리에 각기 서로 다른 부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시작가는 100만 위안, 원화로는 1억 6천만 원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역시 그랬구나. 저 그림이 결국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었네.”

그림이 단상 위로 올라오자 도윤이 작게 탄식을 토했다. 최서라가 속삭이며 물었다.

“아는 그림이에요?”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알지? 거기서 30년 전에 도난당했던 탱화야. 나도 사진으로만 봤는데, 그게 여기에 나올 줄은 몰랐네. 어쩐지 도록에 사진이 없고 설명도 간단하더라니.”

“정말이요? 그럼 저 그림이 장물이라는 뜻이에요?”

“응. 하지만 절도죄나 장물취득죄 모두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을 테니 압수하기는 힘들 거야. 다만 소장자가 저 탱화를 어딘가에 몰래 숨겨서 보관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숨겨서 보관했으면 얘기가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은닉죄는 물건을 숨기고 있는 동안이 아니라 은닉 상태가 끝나는 순간부터 공소 시효가 시작돼. 그러니까 자기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 7년이 지나야 처벌도 안 받고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받는다는 얘기지. 사실 그런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야. 누가 신고를 하지 않으면 경찰들도 모르고 지나가기 마련이거든.”

최서라가 ‘어라?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그럼 저 그림을 사면 안 된다는 얘기잖아요? 잘못하면 기껏 돈 주고 산 물건을 원 주인에게 도로 뺏기는 거 아니에요? 덤으로 장물을 산 죄로 처벌도 받고요.”

도윤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건을 산 사람이 장물이라는 걸 몰랐을 경우에는 선의취득이라고 해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어. 물론 부동산이나 등록된 문화재 같은 경우에는 웬만해서는 선의취득이 인정되지 않을 만큼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우린 저 물건이 장물인 줄 몰랐다고 하면 돼.”

“그래도 기껏 산 물건을 뺏길 수도 있잖아요? 저건 문화재로 등록이 안 된 건가요?”

“저 탱화는 도난 상시에 이미 지방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었어. 하지만 일본으로 넘어간 뒤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양도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어쨌든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7년 이상 걸려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래봤자 그런 사실을 원소유자나 우리 경찰이 알기는 어려우니까.”

“그럼 저 탱화를 사도 완벽하게 소유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응. 심지어 이번 경매를 통해 더 안전하고 깨끗하게 세탁이 되겠지.”

최서라가 목소리를 더욱 낮춰서 속삭였다.

“저 그림 말이에요, 시세에 비해 시작가가 높은가요? 아님 낮아요?”

“왜? 저걸 사려고?”

“시세보다 싸게 나온 거면 당연히 사야죠. 우리나라 문화재니까 도로 찾아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일단 사 두면 투자 가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도윤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최서라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좋은 태도야, 그런 태도. 일단 저 탱화는 250만 위안까지는 충분히 베팅해볼 가치가 있어. 하지만 300만 위안 이상으로 올라가면 손을 떼는 게 좋을 거야.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할 게 아니라면 그 이상은 무리한 투자야.”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럼 250만 위안까지는 팻말을 계속 올려주세요.”

함께 참석하기는 했지만 직접 응찰할 수 있는 사람은 도윤뿐이었다. 두 사람은 경매에 임하기 전에 미리 약속을 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원하는 물건이 나올 경우 일단 도윤의 이름으로 모두 낙찰받기로 한 것이다. 단, 낙찰 받은 물건이 두 사람이 모두 원하는 것일 때는 도윤이 양보받기로 했다.

“100만. 100만 없습니까? 네 11번 손님, 100만 부르셨습니다. 이제 105만 기다립니다.”

시작가가 시세의 절반에 불과한데도 선뜻 팻말을 들어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유일하게 팻말을 들어 올린 응찰자가 다름 아닌 한치호였다.

‘뭐야. 첫 물건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도윤은 물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장내의 분위기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결국 한치호 외에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가 팻말을 들어올렸다.

“어, 네. 7번 손님 105만입니다. 105만 나왔습니다. 110만 없습니까?”

경매사는 도윤이 팻말을 들어 올리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노련한 경매사답게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경매를 속행했다. 왕이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치호는 도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내 그의 팻말이 다시 올라갔다.

“110만 나왔습니다. 115만 기다립니다. 115만 없습니까?”

응찰자 가운데 오직 한치호와 도윤 두 사람만 번갈아가며 팻말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어느새 도윤이 부른 호가가 200만 위안에 도달하자 한치호가 그에게 노골적으로 독살스러운 눈빛을 보내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경쟁을 포기했다.

“200만 위안 한 번. 200만 위안 두 번. 200만 위안 세 번. 네. 낙찰됐습니다. 7번 손님이 200만 위안에 16세기 조선 시대 걸작 탱화의 주인이 되셨네요. 축하합니다.”

결국 도윤이 탱화의 주인이 되자 장내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로 박수를 치면서도 저마다 도윤과 최서라가 앉은 쪽을 힐끗거리며 웅성거렸다. 한치호뿐만이 아니라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첫 경매의 결과는 의외였던 게 분명했다.

‘200만 위안에서 포기한 걸 보니까 그래도 시세가 얼만지는 대충 알고 들어왔다는 얘기네? 손쉽게 물건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되지.’

도윤이 의도적으로 약간 미안한 기색을 담아 한치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속 좁은 자식. 그렇다고 삐치기는.

“다른 사람들도 한치호 실장이 낙찰 받을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 맞죠?”

실내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을 감지한 최서라가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그런 거 같네. 비공개 경매라고 할 때부터 짐작했던 거지만, 이번 경매에서는 우리 둘만 불청객인 거 같아. 오늘 너무 욕심을 부리면 나중에 미움을 많이 받겠는데?”

첫 경매 물품에서는 한치호와 경쟁했지만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는 누가 경쟁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건 적어도 몇몇 물건들에 대해서는 이미 임자가 정해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눈치를 보니 이 자리에서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응찰자는 아무래도 도윤이 거의 유일해 보였다. 적진에 홀로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 * *

중간 휴식 시간 전까지 창하이 옥션의 비공개 경매에서 스무 개의 위탁품이 소개되어 모두 낙찰됐다. 일반적인 경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전량 낙찰이었다.

“대단하군. 모조리 임자가 정해진 건 아닌 것 같은데도 유찰되는 게 하나도 없어.”

출품된 물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미리 낙찰 받을 사람들이 정해진 눈치였다. 그래서 도윤도 낙찰률이 높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100퍼센트 낙찰은 의외였다.

“이번에 올라온 작품들의 질이 예상보다 높다는 뜻 아닐까요?”

“그동안 꽁꽁 숨어 있던 장물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치호가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물건들은 대부분 중국의 큰손들이 쓸어갔다. 그 가운데 몇 개에 대해서는 도윤도 슬쩍 팻말을 들어 올려 보았지만 두세 번 호가를 높이다가 눈치가 이상하면 조용히 포기했다. 공연히 중국의 큰손들과 척을 지었다가 정작 본인이 원하는 물건에서 박 터지게 싸우는 꼴을 연출할까 걱정됐던 것이다.

다만 한치호에게는 철천지원수처럼 굴었다. 지금까지 그가 열심히 팻말을 들었던 물건은 모두 네 개였는데, 그걸 모조리 도윤이 낙찰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윤이 과도하게 돈지랄을 한 건 아니었다. 최종 낙찰가 자체는 시세보다 높다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치호가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허락받은 한계 금액이 너무 낮았던 탓이 컸다.

“한치호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한대길 의원이 작품 위탁자나 창하이 옥션 관계자와 미리 입을 맞춰뒀던 게 분명해. 덕분에 나만 좋은 일이 돼버렸지만.”

후환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윤의 뒤에는 청파 갤러리와 미래 그룹이 있었다. 한대길이 아무리 여당 실세라고는 하지만 국내 재계 순위에서 오성 그룹과 선두를 다투는 미래 그룹에게 대놓고 따지는 건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도윤 혼자 경매에 참여했다면 그 역시 한치호가 노리는 모든 물건을 싹쓸이 하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매사가 3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을 때, 도윤의 몫으로 두 개, 그리고 최서라의 몫으로 세 개가 낙찰되었다. 한치호가 노렸던 네 개의 물건 이외에도 도윤이 열아홉 번째로 나온 작품을 하나 더 낙찰 받았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미리 낙찰자가 정해지지 않은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응찰 경쟁이 가장 밋밋했던 특이한 물건이었다.

“저건!”

로트 번호 19. 패철(佩鐵), 혹은 나경패철(羅經佩鐵)이라고 불리는 물건이 단상 위로 올라왔을 때, 도윤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패철에서 생각보다 강력한 빛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잠깐이기는 하지만 붉은 빛이 언뜻 보였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건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는 건 주인이 있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일정 거리 이내로 유물의 주인이 접근해야지만 자연스럽게 붉은 빛을 띠게 되는데, 도윤의 경우에는 정신을 집중시킬 경우 잠깐이나마 그 빛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그 역시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단상 위에 오르는 물건들을 계속 살피느라 잔뜩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왜 그러세요?”

그의 안색이 변하자 옆에 있던 최서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도윤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오늘 주제가 불교 미술인데 엉뚱하게 지관들이 쓰는 패철이 올라와서요.”

“도윤 씨가 가지고 있는 도록에 로트번호 19번은 분명히 나경패철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사진도 실려 있었고. 설마 모르셨어요?”

“그런가요? 깜빡했었나 보네요. 하하하.”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자기가 봤던 도록에 실린 물품을 깜빡했다고? 최서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모든 걸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도윤이 놀란 건 패철이 나올 줄 몰라서가 아니라 거기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였고, 붉은 빛까지 보였으면 주인을 만났을 때 능력까지 전해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 패철은 과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패철은 쉽게 말해서 허리에 매달고 다니는 나침반을 가리킨다. 옛날 지관들이 집터나 묘지 터 등을 찾을 때 쓰던 물건인데, 과거 스님들 가운데에는 지관 노릇을 겸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본래 불교 용품이 아닌 물건이 오늘 경매에 출품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느 절에서 스님의 유품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로트번호 19번. 패철은 10만 위안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0만 위안 없습니까?”

전형적인 불교 미술품이 아니어서 그런지 응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미리 정해진 낙찰자도 없는 듯하자, 도윤은 조금씩 호가를 올린 끝에 18만 위안이라는 비교적 낮은 가격에 재빨리 패철을 낙찰 받았다. 그만해도 원화로는 2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지만 그로서는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 * *

스무 번째 물품이 낙찰되자마자 휴식 시간이 선언되었다. 분분히 자리를 뜨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귀 끝까지 얼굴이 빨개진 한치호가 씨근대며 도윤에게 다가왔다.

“이 박사. 너무한 거 아니오? 왜 내가 노리는 물건들만 그렇게 악착같이 쫓아와서 가로채는 겁니까? 현소 화랑이 요즘 잘 나간다고 하더니 이젠 한성 옥션마저 우습게 보여요?”

뭐야, 이 철없는 자식은? 도윤이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최서라가 먼저 나섰다.

“가로채긴 뭘 가로채요? 경매에서 원하는 물건이 나오면 서로 경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꼭 갖고 싶은 물건이었으면 한 실장님이 더 높은 가격을 부르셨으면 되잖아요? 경매장에서는 오로지 안목과 돈이 주인을 결정하는 거예요. 다른 회사도 아니고 경매 회사인 한성 옥션 실장님이 그런 뻔한 사실도 모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네요?”

최서라가 쌍심지를 짚고 나서자 한치호는 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두 분이 같이 오셨기에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청파 갤러리에서 이 박사를 내세워서 응찰 경쟁에 나선 겁니까? 그래서 이렇게 이 박사 편을 들고 나서는 거예요?”

“그건 한 실장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청파가 아니라 이 박사님 개인이 낙찰 받은 거면 뭐가 달라지나요? 만만해 보이면 힘으로 뺏기라도 하실 생각이에요?”

한치호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도윤과 최서라의 얼굴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턱을 바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전반전은 우리 한성이 졌다는 걸 깨끗이 인정하지요. 하지만 아직 후반전이 남았으니 어디 두고 봅시다. 청파 갤러리의 돈과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 꼭 지켜보겠소.”

한치호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홱 돌리더니 사라졌다. 도윤이 그의 등을 보며 혀를 찼다.

“앞으로 남은 스무 점의 물건들에 대해서는 낙찰가가 예상보다 더 올라가겠네요. 한 실장 저 양반, 독이 단단히 오른 거 같아요.”

그 말에 최서라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못난 남자에요. 자기 능력을 살피지 않고 협상이 아닌 대결을 선택하다니. 안목이야 처음부터 기대할 것도 없으니 돈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건데, 그렇게 나오면 청파도 질 수 없죠. 저렇게 무례한 사람에게는 단 하나도 양보할 수 없어요. 누가 이기나 두고 보라죠.”

도윤은 그녀의 태도가 상상 외로 강경한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아가씨가 이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캐릭터였던가? 그로서는 한대길이 최병준을 통해 최서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했던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도윤에게 그런 애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한치호가 씨근대며 사라진 뒤, 두 사람 역시 경매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왕 회장님께서 귀빈 휴게실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윤과 최서라는 서로 눈빛을 맞추고는 남자를 따라갔다. 제법 넓은 공간에 소파와 다탁이 마련되어 있는 귀빈실에는 이미 찻주전자와 찻잔, 간단한 다과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전의 활약은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한성 옥션에서 꽤 열을 낼 것 같더군요.”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왕이푸 회장의 말에 도윤은 그가 이미 한성 옥션에서 노리던 물건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 몇 점이 우연히 한성 옥션 측과 겹쳤을 뿐입니다. 경매장에서는 늘 있는 일이지요. 한성도 경매 회사니까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나도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혹시 이 박사나 청파 갤러리에서 금동보살입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요.”

도윤은 입가에까지 가져갔던 찻잔에 입술만 살짝 적시고 도로 내려놓았다.

“저희가 금동보살입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왕 회장님께서 그걸 노리고 계시다면 아무래도 패색이 짙은 싸움이 될 것 같군요.”

“양보를 해 주시겠습니까?”

슬쩍 미소를 짓는 왕이푸의 말에 도윤은 고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해보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입니다. 부디 살살해 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왕이푸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느긋한 자세로 팔짱을 끼었다.

“글쎄요. 두 분이 정말로 불상을 원하신다면 양보해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대신 이 박사께서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신다는 조건으로요. 어떻습니까?”

도윤과 최서라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눈치로 볼 때 처음부터 금동보살입상의 낙찰로 내정된 사람은 왕이푸 회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불상을 양보할 용의가 있다고? 그렇게만 되면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수아 역시 연말에 있을 청파 갤러리 특별전을 빛낼 물건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왕이푸가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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