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16. 데스마스크>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한 도윤은 크리스틴이 보낸 차를 타고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5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크리스틴, 아니 토마스 리히터 회장의 집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엄청난 규모의 저택이었다.
“성은 아니고…, 옛날 스타일로 지은 리조트 같은 느낌이네.”
사유지 표지판이 달린 육중한 철제 대문을 지나고도 자동차가 비탈길을 5분 정도 굽이굽이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야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 저택이 나타났다.
폭이 수십 미터가 넘는 잔디밭이 녹색 해자처럼 에워싸고 있는 한 가운데에 평지에서 솟아오른 신기루 같은 3층짜리 저택이 서 있었다. 잔디밭 너머로는 사방이 온통 키 큰 나무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었다. 저택의 정면으로는 분수가 설치된 인공호수가 넓게 자리를 잡았고, 후원에는 길이가 이십 미터가 넘는 수영장과 손님을 위한 별채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생각보다 오랜만에 만나게 되네요. 리히터 하우스에 오신 걸 환영해요.”
차가 저택 정면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크리스틴이 화사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반겼다.
“글쎄요, 제 생각보다는 일찍 만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택의 거실은 테니스를 치거나 인공 암벽등반 시설을 만들어도 충분할 만큼 넓고 높았다. 크리스틴은 도윤이 묵을 2층의 손님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넓기도 넓었지만 내부 인테리어가 호텔 스위트룸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장식된 방이었다.
“원래 잠시 묵다 갈 손님들은 별채에 있는 손님방을 드려요. 본채의 방을 내드렸다는 건 아빠가 이 박사를 그만큼 특별히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크리스틴의 말에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고마우면서도 부담되는 말씀이네요. 지금이라도 별채의 조그만 방 하나를 내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옮기겠습니다. 왠지 그게 더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여기 계시면서 부담을 듬뿍 느끼세요. 이틀 뒤에 있을 파티에서 이 박사가 해야 될 일은 절대로 편한 게 아닐 테니까요.”
“분명히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하지만 부담을 느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 것도 사실이에요.”
“제가 감정해야 할 작품들이 상당히 고가인 모양이군요.”
“진품일 경우에는 그렇죠. 그래서 위작일 경우에는 그만큼 더 철저하게 감정해야 하고요.”
크리스틴이 방을 떠난 후 도윤은 짐을 정리한 뒤에 간단히 샤워를 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커피를 한 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누군가 노크를 했다.
“회장님께서 1층 서재에서 차 한 잔 하지자고 청하셨습니다.”
복장을 보니 집안일을 돕는 사람은 아니고 아무래도 리히터 회장의 비서인 듯 했다. 그를 따라 들어선 1층의 서재에는 커다란 책상과 소파를 중심으로 사방에 고색창연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희귀한 고서적이나 초판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책들보다 더 도윤을 놀라게 한 것은 책상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이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진작인 거 같은가요?”
도윤에게 자리를 권하던 리히터 회장이 씩 웃으며 물었다. 도윤의 시선이 벽에 걸린 그림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카라바조의 ‘아기예수 탄생’이 회장님 서재에 걸려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분명히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그 말은 저걸 진품으로 보신다는 뜻입니까?”
“글쎄요. 감정을 원하신다면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손까지 내밀며 권하는 리히터 회장의 권유를 사양하지 않고 도윤은 그림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사실 가까이서 본다고 해서 감정 결과가 달라질 건 없었다. 이미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서 그림을 보려는 건 명작을 조금 더 자세히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카라바조가 그린 ‘아기예수의 탄생’은 메시나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도 한 점이 있다. 당시의 다른 화가들처럼 카라바조도 동일한 주제의 그림을 여러 장 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어둡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메시나의 그림과는 달리, 지금 도윤이 보고 있는 ‘아기예수의 탄생’은 성모자가 그림 중앙에 배치되었고, 분위기도 훨씬 밝았다.
한참 동안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도윤이 이윽고 가볍게 탄식을 토했다.
“진품이 틀림없군요. 구도와 색상, 붓 터치는 물론이고 심지어 액자까지도 산 로렌초 성당에 걸려 있던 카라바조의 진품이 확실합니다. 이 그림을 도대체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감탄을 금치 못하는 도윤을 보며 리히터 회장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다른 장소가 아닌 자신의 서재에서 차를 마시자고 한 것 자체가 이 그림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도윤이 소파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얼른 차를 내왔다.
“스파투차가 헛소리를 했든가 아니면 그라비아노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을 겁니다.”
의기양양한 리히터 회장의 말에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림을 훔쳤던 마피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작품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놈들은 애초에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내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쥐가 갉아먹어서 손상되었다거나 아예 불태웠다는 말도 죄다 거짓이지요.”
카바라조의 명작인 ‘아기예수의 탄생’은 본래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산 로렌초 성당 예배당에 걸려 있던 작품이었다. 1969년에 도난당해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했던 이 작품에 대해 가스파레 스파투차라는 전직 마피아 암살자가 2009년, 뜻밖의 증언을 했다. 마피아 보스인 필리포 그라비아노로부터 이 그림이 1980년대에 불태워졌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최소 3000만 유로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기예수의 탄생’은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최초의 아마추어 절도범들도 마땅한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림을 마피아 일파인 플라라 가문에게 헐값에 넘겼고, 그들은 이 그림을 농장 별채에 숨겼다. 그러다 그림이 쥐와 돼지들에게 갉아 먹히는 등 훼손을 입자 고민 끝에 그냥 태워버렸다는 얘기였다.
스파투차는 장기간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정보제공자로 전향하면서 석방되었다. 그는 나중에 세 차례나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베를루스코니가 마피아와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덕분에 비록 증거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기예수의 탄생’이 불타 없어졌다는 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 그림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지요. 불에 탔다는 증언이 그 중 대표적인 것이지만 지진이 나면서 파괴되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 여러 가지 소문들 가운데 그나마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은 남아프리카에 사는 이탈리아 수집가에게 넘어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가 아니라 리비아이기는 했지만.”
“그럼 회장님이 그 리비아의 이탈리아 수집가로부터 그림을 사들이신 겁니까?”
도윤의 물음에 리히터 회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업가의 손을 떠난 뒤에도 중간에 두어 명의 수집가들을 더 거친 뒤에야 저한테 왔습니다. 덕분에 그림 값은 많이 올랐지만 대신 깨끗하게 세탁이 됐지요. 설사 그림을 공개하더라도 산 로렌초 성당에서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떳떳하게 서재에 걸어놓으시는 거군요? 뺏길 염려가 없으니까.”
그 말에 리히터 회장이 천만의 말씀이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저 그림이 걸린 장소가 왜 내 책상 맞은편 벽이겠소. 난 카톨릭은 아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요. 그리스도의 탄생은 내게 늘 감동과 영감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물론 내 그림을 다른 곳도 아닌 내 서재에서 감히 뺏어갈 사람도 없겠지만요.”
“그렇게 자신만만한 분의 저택 치고는 너무 요새 같더군요. 경비가 대단하던데요?”
리히터 회장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걸 벌써 눈치 챈 겁니까? 이 집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데다 주변을 모두 잔디밭으로 꾸몄잖습니까? 사방이 훤히 트여서 저택에 몰래 접근하기는 어렵겠더군요.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옥상 쪽에도 경비원들이 돌아다니는 걸 봤습니다. 대규모 부대가 사방에서 급습하지 않는 이상 집에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습니다.”
“이런, 미술사 박사인 줄 알았더니 지금 말하시는 걸 보면 무슨 특수부대 요원 같습니다.”
특수부대 요원이기는 했지. 명색이 UDT 출신이니까. 그 부대가 원래 수중 잠입과 폭파에 관련된 훈련을 많이 받는 곳이었다.
도윤은 리히터 회장이 자신을 서재로 초대한 데에는 평가의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벽에 걸린 그림을 대했을 때 단번에 그걸 알아볼 수 있는가? 빠른 시간 내에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는가? 혹은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경찰이 찾고 있는 세계적인 걸작을 보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모레 열릴 파티에서 감정할 작품들도 ‘아기예수의 탄생’하고 성격이 비슷한 것들입니까? 그럼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는 약속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도윤의 말에 리히터 회장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자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열더니 안에서 시가를 꺼냈다.
“한 대 피우시겠소?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라서 맛이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담배는 피우지 않아서요.”
리히터 회장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시가의 한쪽 끝을 자른 뒤에 불을 붙였다. 입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흩어질 무렵,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틀 뒤의 파티에서 보게 될 작품들이 도난 사건에 연루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훨씬 거창하고 역사적인 도난 사건이지요.”
“법적인 문제를 따지기도 어려울 만큼 거창한 사건입니까?”
도윤의 목소리가 약간 뾰족해졌다. 그걸 느꼈는지 리히터 회장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 박사도 아마 큄멜 보고서에서 대해 들어봤을 거요.”
“2차 세계대전이 열리기 직전에 오토 큄멜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히틀러가 지시해서 만들어진 게 아닙니까?”
“그렇소. 과거 독일에서 탈취되어 전 세계로 흩어진 미술품들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 목록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프랑스에 있는 것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무려 1800여 점이나 되었으니까. 대부분 나폴레옹이 훔쳐간 것이었소.”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뒤에 나치가 유럽 전역에서 훔쳐간 미술품의 수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요. 히틀러는 어떤 면에서 나폴레옹보다 더 악랄한 약탈자였습니다.”
리히터 회장은 도윤의 반박을 받고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나치는 범죄 집단이었지요.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습니다. 다들 정의와 명분을 내걸고 싸움을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지요. 뺏는 게 여의치 않으면 아예 파괴해버리기도 하고. 나도 그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요.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나치가 훔쳤던 미술품들은 대부분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대부분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 사라진 미술품 중에는 아직도 되찾지 못한 것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1500점에 달하는 막대한 미술품들이 어떤 노인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모두 나치에 의해 탈취당한 것들이었지요.”
도윤이 언급한 것은 2011년에 있었던 일이다. 독일 경찰들이 뮌헨의 슈바빙에 사는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라는 노인의 집에서 시가로 10억 유로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미술품들을 찾아낸 것이다. 구를리트는 집에 비밀창고를 만들어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나치 집권 시기에 유대인 수집가들로부터 몰수한 작품들을 숨겨왔다.
구를리트의 할아버지는 나치 시절 미술품 수집상을 했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이 수집한 미술품은 손을 뻗어 줍기만 하면 되는 주인 없는 황금 덩어리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구글리트 노인은 필요할 때마다 숨겨놓았던 작품들을 하나둘씩 빼내어 스위스 등으로 가서 팔아치우곤 했는데, 재수 없게도 세관의 무작위 검사에 걸리고 말았다.
“전쟁 당시의 파렴치한 약탈은 군인들에 의해서만 자행된 게 아닙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훨씬 더 광범위하고 무자비한 폭력과 갈취가 이루어졌지요. 구글리트의 미술품들만 해도 원래의 주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수용소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합법적인 상속인을 찾지 못하면 그 미술품들의 소유권이 다시 구글리트에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도윤의 거듭된 반론에도 리히터 회장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의 손끝에서 타들어가던 시가의 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틀 뒤에 열릴 파티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로젠베르크 전국특별참모부, 흔히 ERR이라고 불리던 기관에서 회수한 독일 미술품들이 등장할 겁니다. 물론 그 중에는 위작도 적지 않을 거라 짐작해요. 내가 이 박사에게 부탁할 것은 바로 그 작품들의 진위를 판단해 달라는 겁니다. 해 주시겠소?”
정확히는 독일 미술품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미술품이겠지. 도윤은 리히터 회장이 역사 문제를 놓고 더 이상 논쟁하기 싫다는 뜻을 분명히 했음을 깨달았다.
“창하이 옥션의 초대장을 얻은 대가치고는 다소 비싸군요.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한 일이니 감정은 해드리겠습니다. 전부 몇 작품이나 됩니까?”
“당일에 누가 어떤 미술품을 더 들고 올지는 몰라도 일단 확정된 것만 백 점이 조금 넘습니다. 아, 그리고 감정료는 확실하게 드릴 거예요. 초대장을 드린 대가는 이 박사가 프랑크푸르트까지 온 것으로 이미 지불한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만약 양심상의 문제로 감정이 꺼려지면 그냥 돌아가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오늘 들은 얘기는 함구해주셔야 합니다.”
“아뇨.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저도 그 작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겁니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을 경우 저도 응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뜻밖의 요구였나 보다. 리히터 회장이 놀란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나는 이 박사를 감정가로 부른 겁니다. 입찰 경쟁자가 아니라.”
“그래서 저는 작품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아쉽지만 여기서 이만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탐나는 작품을 앞에 두고 눈요기만 하다가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요.”
리히터 회장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한참동안 도윤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에 대한 감정이 끝난 다음에 내가 다섯 개의 작품을 고르겠소. 그 작품들에 대해서는 입찰에 응하지 마시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어떻소?”
다섯 개? 도윤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제가 리히터 회장님 같은 세계적인 부자와 무슨 수로 경쟁을 하겠습니까? 그 정도면 감사한 마음으로 감정가로서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소. 젊은 천재의 안목이 빛을 발하기를 바랍니다.”
리히터 회장이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악수를 나눈 도윤은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니 차를 한 잔 같이 마시자고 서재로 초대받았는데, 그곳을 떠날 때까지 정작 차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더 간절하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