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파티는 이틀 뒤였지만 다음날부터 이미 경매에 선보일 작품들이 저택 곳곳에 전시되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되는 칵테일파티가 프리뷰인 셈이었고, 저녁 식사 전에 시작된 경매가 끝나면 늦은 밤까지 본격적인 연회가가 이어질 계획이었다.
도윤이 저택에 도착하던 날 거실이 유난히 넓고 황량하다는 생각을 했던 건 이유가 있었다. 작품의 배치를 위해 이미 거실을 비롯한 1층의 각 방들에 비치되었던 가구들이 대부분 치워졌기 때문이다. 파티 전날 저녁, 경매에 출품될 대부분의 작품들이 전시 준비를 마쳤고, 도윤의 감정 역시 마무리 되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작품들이 몇 점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내일 점심시간 전까지는 모두 진열이 완료될 거예요. 잠깐 산책을 하려는데 같이 나가시겠어요?”
하루 종일 큐레이터 역할을 맡아 작품의 진열을 진두지휘했던 크리스틴이 저녁시간이 되기 조금 전 도윤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노트북으로 리히터 회장에게 줄 진작과 위작 목록의 정리를 마친 도윤은 흔쾌히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저택을 나서기가 무섭게 도윤은 크리스틴이 정말로 산책을 하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섯 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해가 져서 사방이 깜깜했고,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언덕 위의 바람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산책을 하기에는 전혀 적당한 날씨가 아니었다.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잔디밭 중간 중간 세워진 야외 등이 없었으면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 정도로 사방이 어두웠다. 도윤과 크리스틴은 후원의 수영장을 빙 돌아 몇 개의 방에 불이 켜진 별채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진열된 작품들을 감정해 보니까 어때요? 위작들이 제법 있던가요?”
무심한 듯 내뱉은 크리스틴의 말을 들으며 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다고 하기는 어렵더군요. 그래도 위작보다는 진작들이 더 많았습니다.”
의외의 말이었던지 크리스틴이 걸음을 뚝 멈췄다.
“그 정도에요? 설마 그럴 리가?”
서 있으면 더 추울 것 같아서 도윤은 일단 다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틴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더니 종종걸음으로 따라와 옆에 붙었다.
“말해보세요. 위작이 얼마나 돼요?”
“위작이 전체의 삼분 일이나 되더군요. 예상보다 많아서 저도 놀랐습니다.”
“아빠한테 말씀드려야겠네요. 도대체 어떤 간 큰 사람들이 감히 위작을…….”
“리히터 회장님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제 짐작에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크리스틴이 또 발걸음을 멈췄다. 아, 이 아가씨가 추워 죽겠는데 자꾸. 도윤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그냥 걸음을 옮겼다.
“몇 점은 굳이 저 같은 감정가가 아니더라도 안목 있는 수집가라면 충분히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로 조악한 위작이더군요. 그런 작품들까지 받아준 걸 보면 내일 파티에서 진행될 경매가 그다지 정직한 건 아니라는 뜻일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뒤에서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크리스틴이 다시 도윤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누굽니까? 리히터 회장님이 주최하신 경매에 그렇게 형편없는 위작을 내놓고도 전혀 뒤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도윤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말했다.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토니 폴스터라는 미술상이에요. 아빠가 다섯 점의 미술품을 미리 고르겠다고 하셨죠? 내일 오전에 그 중 하나를 들고 오기로 한 사람이에요.”
“엄청난 작품인 모양이군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런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겁니까?”
“오카시오예요. 루벤스의 작품 말이에요.”
이번에는 도윤이 발걸음을 멈췄다. 오카시오(Occasio). 정확하게는 ‘오카시오 : 승리의 영웅이 평화를 위해 기회를 사로잡다’라는 긴 부제가 달린 작품. 그게 내일 이곳으로 온다고?
“설마 지겔란트 박물관이나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에 있는 걸 말하는 건 아니죠?”
“그 두 작품은 모두 루벤스의 원본을 바탕으로 공방의 제자들이 만든 복제본이잖아요. 그것들도 뛰어난 작품인 건 맞지만 폴스터 씨가 내일 가지고 올 것은 원본이에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원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을 텐데요? 설마 그게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는 말입니까?”
크리스틴이 추운 듯 몸을 떨면서 양쪽 팔을 문지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도윤이 급하게 그녀의 곁으로 따라 붙었다.
“나치 시절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ERR', 그러니까 ‘로젠베르크 전국특별참모부’라는 걸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으셨을 거예요.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약탈한 것으로 악명을 떨친 기관이죠. 오카시오는 전쟁 당시 그 ERR에 의해 발견되어서 독일로 옮겨졌어요.”
두 사람은 어느새 별채를 지나 잔디밭을 절반 이상 지났다. 거기서부터는 조명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라 산책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이 저택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히틀러는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어요.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술학교 시험에 연거푸 낙방하는 바람에 결국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지요. 포부는 대단했지만 당시 그를 알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능도 노력도 부족한 학생이었던 모양이에요.”
나중에 권력을 잡게 된 히틀러는 젊었을 때의 상처를 보상받고 싶었던지 고향인 린츠에 대규모의 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이때 그 미술관에 채울 미술품들을 유럽 전역에서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는데 앞장섰던 기관이 바로 ERR, 즉 로젠베르크 전국특별 참모부였다.
“나치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ERR은 유럽 전역에서 8000점이 넘는 작품을 끌어 모아서 천여 곳의 창고에 분산시켜 보관했어요. 전쟁이 끝난 후 알타우세 소금광산이나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들이 발견되었지만 당연히 거기 있던 게 전부는 아니었죠. 특히 큄멜 보고서의 목록에 있던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
“하지만 오카시오는 그 큄멜 보고서에도 언급되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도윤의 지적에 크리스틴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실소를 터트렸다.
“천재라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확실히 대단하시네요. 큄멜 보고서에 어떤 작품이 수록되었는지 다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보고서에 모나리자나 비너스의 탄생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지요. 오카시오처럼 말이에요.”
크리스틴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추위가 옷 속을 점점 파고드는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카시오는 원래 독일의 한 귀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었어요.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안에 처박혀 살면서 외부인들을 만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 말이에요. 그 귀족이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아무도 그가 오카시오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고 결국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랬던 작품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는 아니에요. 단지 그림의 소장자들이 그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걸작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지.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그 귀족의 성이 약탈당했어요. 그 바람에 오카시오가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옮겨졌죠.”
“그걸 나치가 다시 찾아왔나 보군요.”
“2차 대전 당시에 오카시오를 소유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사업가였어요. 재산은 많지만 예술에 대한 취미나 안목은 빵점이었던 인물이었죠. 문제는 그의 집에서 그림을 빼앗아서 독일로 보낸 장교도 그 점에서는 비슷했다는 거예요. 결국 다른 몇 점의 별 볼 일 없는 그림들과 함께 함부르크의 어느 낡은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걸 토니 폴스터가 찾아냈어요.”
“지금 하신 말씀은 모두 그 폴스터라는 미술상의 입에서 나온 얘기이겠군요.”
어느새 저택 앞까지 왔다. 크리스틴이 걸음을 멈추더니 도윤을 보고 싱긋 웃었다.
“사실인지 의심스럽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진짜 중요한 건 내일 그가 들고 올 그림이 진작이냐는 거 아니에요?”
“하긴 그림의 원래 주인이었던 프랑스 사업가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그림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만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겠군요.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자기 조상이 가지고 있던 그림이 루벤스의 걸작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테니 항의할 수도 없을 테고요. 물론 말씀하신 게 모두 진짜라면 말이지요.”
“도난당한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원 주인을 확인할 수 없으면 현재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소유권을 인정받는 게 법이지요. 말씀드렸잖아요? 불법적인 일은 없을 거라고요.”
크리스틴은 도윤에게 살짝 윙크를 하더니 재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거실의 불빛이 환하게 흘러나오는 정원에서 도윤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 * *
다음날, 미처 도착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이른 아침부터 거실을 비롯한 1층 전시실의 빈 공간을 하나둘 메우기 시작했다. 도윤은 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혼자서 숲 근처까지 주변을 멀리 산책했다. 그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별채 근처를 지나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도윤 박사가 아닙니까?”
발길을 멈춘 도윤이 돌아보자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통통한 사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양인 치고는 작은 키에 눈에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이도윤 박사가 맞군요. 트루쓰 앤 밸류 첫 시즌 우승자! 올해도 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첫 시즌에 비해서는 출연자들의 실력이 영 형편없어요. 이거 만나서 반갑습니다.”
상대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도윤은 어쩔 수 없이 일단 그의 손을 잡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데, 미술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이렇게 꼭 자신의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고는 했다.
“토니 폴스터입니다. 함부르크에서 조그만 화랑을 경영하고 있죠. 말 그대로 아주 조그만 화랑입니다. 무명 화가들의 작품이나 사람들이 집에 가지고 있던 오래된 그림들을 모아서 파는 게 주된 일이지요.”
토니 폴스터. 도윤은 그 이름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좋고 수다스러운 중년의 사내. 하지만 크리스틴의 말에 의하면 바로 이 자가 오카시오를 발굴했고, 그 그림을 경매에 올리는 대가로 여러 점의 위작까지 함께 넘기려는 수작을 부렸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파타에 초대받은 걸 보면 그저 작은 화랑을 운영하는 평범한 분은 아닐 것 같네요. 저녁에 있을 경매에 작품을 위탁하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동네 화랑이라도 장사를 하다 보면 가끔씩 운 좋게 좋은 작품들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리히터 회장님께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렸더니 흔쾌히 가지고 오라고 하시지 뭡니까? 덕분에 이렇게 큰 저택에 손님으로 오게 됐습니다.”
말을 하던 폴스터가 은근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 박사께서 여기 오신 걸 보니까 혹시 리히터 회장님을 위해 감정을 하러…….”
“맞습니다. 이번 경매에 올라갈 작품들을 감정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하, 역시 그렇군요. 이거 이 박사처럼 대단한 감정가가 왔으니 오늘 경매에 위작을 내놓은 사람들은 참 곤란하겠습니다. 하하하.”
“글쎄요. 열심히 하느라 하겠지만 워낙 대단한 위작들이 많아서요. 혹시 감정을 잘못해서 회장님께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많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에이, 무슨 겸손의 말씀을. 아참, 내 정신 보게. 방에다 휴대폰을 놓고 왔나 봅니다. 이따가 파티에서 뵙지요. 언제 시간나면 함부르크에도 한 번 놀러 오시고요. 그럼 이만.”
폴스터는 명함을 한 장 꺼내서 도윤에게 건네더니 부리나케 별채로 돌아갔다. 도윤은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뭐라고 투덜거리며 욕을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도윤은 점심시간 이전까지 오늘 새로 도착한 작품들을 확인한 뒤에 감정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완성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작품들이 많아 감정을 하면서도 적잖게 놀랐다. 그는 보고서 파일을 담은 USB를 들고 서재로 내려가 리히터 회장에게 주었다.
“다섯 점의 작품은 입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떤 건지 정하셨습니까?”
리히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반으로 접힌 매모지를 한 장 건넸다. 거기에는 다섯 점의 작품 제목이 화가의 이름과 함께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오카시오를 비롯해서 모두 도윤이 짐작했던 작품들이었다. 다만 리히터 회장이 선택한 그림들 중 두 점은 도윤도 누가 그린 것인지만 짐작할 뿐 미처 제목을 알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피카소의 춤추는 소녀와 샤갈의 꽃의 제전이라……. 원래 있던 제목입니까, 아니면 회장님께서 직접 붙이신 겁니까? 솔직히 저도 이런 그림들이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리히터 회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그 그림의 주인들이 이번에 작품을 내놓으면서 알려준 제목들이요. 모두다 과거 ERR에서 수집했던 것들인데, 이제는 그런 그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겁니다. 원래는 은밀한 개인 소장품들이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이 그림들을 매입하면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하실 겁니까?”
“당장은 아니지만 조만간에 그렇게 할 거요.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내가 그 그림들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테니까. 나는 저택을 명작들의 무덤으로 만들 생각이 없소.”
“나치가 훔쳐갔던 그림들의 합법적인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이제 과거를 털어버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과거를 털어버리고 싶으면 먼저 피해자의 양해를 구해야지. 가해자의 후손이 제멋대로 과거를 청산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도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기 한 시간 전부터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 손님들의 면면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한 부류는 당연히 파티를 즐기고 작품을 사기 위해 온 부자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그들이 데리고 온 전문 감정가들로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번에 작품을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사러 온 사람들이 도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죄다 독일 수집가들이로군. 큄멜 보고서에 언급된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띤다 싶더니 결국 독일에서 반출된 미술품들을 이제라도 다시 독일 영토 안으로 들여오겠다는 건가?’
도윤의 입장에서는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칵테일 잔을 들고 오가는 부유한 손님들이 모두 과거의 약탈을 완성하기 위해 돈을 싸들고 찾아온 사람들로 보였다. 합법적이고 안전한 거래일 거라는 크리스틴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양심은 가난한 자들만의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그가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거실에 걸린 작품들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거실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아마 뒤늦게 도착한 작품인 게 분명했다. 이미 보고서를 다 작성해서 리히터 회장에게 건넨 뒤였기에 도윤은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작품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어? 저건?’
전시실 한쪽에 남아 있던 비어있는 테이블 위에 유리 상자 하나가 놓였다. 천천히 다가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던 그는 안에 있는 물건을 보고 약간 놀랐다.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네? 원래 있던 건 아닐 테고, 새롭게 발견된 건가?’
오랫동안 때를 타서 그런지 완전히 갈색으로 보이는 석고 안면상은 분명히 베토벤의 데스마스크였다.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통통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모습과는 달리 광대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홀쭉하게 여윈 불쌍한 얼굴. 그건 도윤이 예전에 베토벤의 생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데스마스크가 분명했다.
‘황당하네. 갑자기 왜 이런 물건들이 연달아 나타나는 거야?’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는 전 세계에 세 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데스마스크가 진품이라면 네 번째 데스마스크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도윤이 놀란 것은 새로운 데스마스크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물건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잠깐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올해만 들어 벌써 세 번째 보는 주인이 있는 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