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슈뢰더 회장과 헤어지자마자 도윤은 곧바로 구한샘에게 전화했다. 프랑크푸르트는 아직 한낮이었지만 서울은 이제 한창 출근 시간일 것이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
“헉헉. 저야 늘 똑같죠 뭐. 운동하던 중이었어요. 형은 또 외국에 나갔다면서요?”
주변에서 도로의 소음이 들리는 게 아마 러닝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샘은 최근 모교 감독의 허락을 받아 고등학생 후배들과 어울려 감각을 되살리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학교까지 뛰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에 벌써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너 혹시 독일에 올 수 있냐?”
“독일이요? 거기는 왜요?”
한샘은 내년 여름에 시작될 유럽 구단들의 입단 테스트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었다. 당장 이번 겨울 이적 시장과 함께 시작될 트라이얼 테스트에 참가해도 될 만큼 몸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컨디션이 빨리 올라와서 차라리 이번 겨울부터 도전해 볼 걸 그랬다는 푸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구단 2부 리그 팀에서 너를 테스트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프랑크푸르트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도윤은 조금 전 슈뢰더 회장과 나누었던 얘기를 간단히 전하고 조만간 일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이 담긴 이메일이 갈 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녀석은 그게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되묻더니 전화기에 대고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호들갑 떨지 말고 에이전트부터 먼저 구해.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너 혼자 우왕좌왕하지 말고 석훈이한테도 도와달라고 부탁해.”
안석훈이라면 아마 자기 일처럼 구한샘을 도울 것이다. 원래 한샘의 팬이었는데다 체육 대학 동기 중에 스포츠 에이전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도윤은 한샘에게 훈련 열심히 하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준 뒤에 전화를 끊었다.
* * *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에 어느새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직원들이 의자를 잔뜩 들고 나와 자리를 만들더니 임시로 설치된 단상 위에 커다란 모니터가 내걸렸다. 잠깐 사이에 작품을 올려놓을 이젤과 테이블까지 준비가 끝났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될 시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의자에 앉자 환한 미소와 함께 경매사가 등장했다.
“자, 드디어 오래 기다리셨던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보셔야 할 걸작들은 많고 저녁 만찬 시간은 멀지 않았어요. 빠른 판단과 빠른 결정이 필요한 시간이지요. 그럼 오래 끌지 않고 곧바로 첫 작품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경매사가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말을 들으며 도윤 역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가 미리 받은 팻말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미술상인 토니 폴스터가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리히터 회장님을 위해 온 감정사라고만 생각했는데 경매에도 직접 참여하시려고요?”
도윤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림을 팔러 오신 미술상이 이 자리에 앉는 게 더 이상하군요. 자신이 내놓은 작품들이 얼마에 팔릴지 궁금하신 겁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저 같은 미술상에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겠네. 도윤은 잠자코 경매의 추이를 지켜보려고 했지만 폴스터가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저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이는 작품이 등장하면 시세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성가시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한테서 작품 감정법에 관한 강의라도 듣겠다는 태세네?’
한참동안 그에게 시달리며 꾹꾹 참던 도윤이 마치 지나가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묻는다는 투로 슬쩍 질문을 던졌다.
“리히터 회장님이 오카시오 값으로 얼마나 주던가요?”
“그거요? 역시 대기업의 회장님은 통이 크시더군요. 무려 삼백만 유로…, 아, 이건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데, 헤헤. 죄송하지만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뭘, 못들은 걸로 해? 도윤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이 병신 호구 새…, 아, 그래도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도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기존에 남아 있는 루벤스의 오카시오 복제품이라면 그 정도 가격도 나름 합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박물관에 곱게 걸려 있는 작품들이 새삼 경매 시장에 나올 일은 없겠지만, 삼백만 달러면 루벤스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다른 복제품이나 모작들의 시세와 비교할 때 그나마 높은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폴스터가 가져온 것은 원본이었다.
‘확실히 미술상을 하기에는 작품에 대한 안목이 너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전문가들이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는 다른 위작들을 버젓이 여기까지 들고 왔겠지.’
숨겨져 있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술품을 저인망식으로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부지런함만 특출 난 사람인 게 분명했다. 도윤은 폴스터의 성실함과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저열한 안목에 애도를 표시했다.
루벤스의 작품들은 완성도에 따라 가격의 격차가 크지만 일반적으로 걸작이라고 인정받는 것들은 최소 삼천만 달러를 우습게 넘는다. 그동안 경매장에서 낙찰되었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오카시오는 무조건 5천만 유로까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폴스터는 자기 손에 들어왔던 보물을 시세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리히터 회장에게 넘긴 셈이다.
‘오카시오 하나로 리히터 회장은 이 파티를 연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겠군.’
자신을 프랑크푸르트까지 오게 한 것도 처음부터 오카시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원본이나 복제품이냐에 따라 값이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료로 받기로 했던 십만 유로가 갑자기 너무나 푼돈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천만 달러를 주고 사들은 고흐의 해바라기를 1억 달러가 훨씬 넘는 가격에 팔아치운 자신이 나름 대단한 잭팟을 터트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오카시오가 그렇게 허무하게 리히터 회장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자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돈이 돈을 버는 거지. 리히터 회장이 이번에 사들인 작품들을 언젠가는 공개하겠다고 했으니, 나중에 폴스터 이 친구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되겠지. 혹시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 아닐지 모르겠네.’
그때부터 도윤은 성가심을 무릅쓰고 폴스터가 던지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갑자기 삼백만 유로를 벌었다고 희희낙락하는 그가 너무나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불쌍한 폴스터와는 상관없이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작품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했지만 응찰을 위해 팻말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의 열기도 전체적으로 뜨거웠다. 다만 작품을 소개하는 경매사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찰 받은 물건의 진위 여부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블라인드 경매라는 것이 가장 큰 위험요소였다.
“다음은 로트렉의 ‘물랭루즈에서 춤추는 여인’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시작가는 30만 유로이고 호가는 한 번에 만 달러씩 올라갑니다.”
경매사는 새로운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항상 ‘~으로 추정되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진짜인지의 여부는 알아서 판단하라는 얘기였다. 시작가도 작품을 위탁한 사람의 뜻대로 정해졌다. 실질적인 주최자가 리히터 회장이기는 하지만 그는 장소만 제공할 뿐 작품의 감정과 판매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저건 아닌데……. 돈만 많고 안목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조심성까지 없는 사람이군.’
위작들의 대부분은 아무도 응찰하지 않아서 유찰되었다. 그러나 모든 손님들이 감정가를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누가 봐도 조악한 위작에도 섣불리 팻말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생겨났고, 심지어 낙찰도 됐다.
만 유로 이하의 시작가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작이든 위작이든 마찬가지였다. 모든 위작들이 입을 모아 나는 틀림없는 진짜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홀린 몇몇 사람들은 돈을 가져다 버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두둑한 지갑 때문에 쓸데없이 간이 커진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나한테 나쁠 건 없어. 문제는 저 친구들이 자꾸 나를 쳐다본다는 거지. 젠장.’
도윤도 몇몇 작품에 대해서는 응찰 경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호가가 높이 올라간다 싶으면 미련 없이 포기했다. 골치 아픈 사실은 이상하게도 그가 도전하는 몇 점 안 되는 작품들마다 비정상적으로 가격이 올라간다는 점이었다.
‘미치겠군. 내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
소더비의 까미유는 확실히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직원들의 입을 일일이 단속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뉴욕 소더비에서 경매에 붙여졌던 고흐의 해바라기가 사실은 그에 의해 발굴된 작품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트루쓰 앤 밸류 출연으로 진즉에 얼굴이 팔린 상태인데다 상해 경매에서 있었던 일도 이미 독일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크리스틴이 떠들고 다녔겠지.’
초대된 손님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리히터 회장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감정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도윤이 팻말을 들어 올리면 다른 응찰자들이 미친 듯이 호가를 올리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결국 도윤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응찰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포기하고 팔짱을 낀 채 관망하는 자세로 돌입했다.
‘반드시 사고 싶은 작품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는 투자 가치가 전혀 없어.’
물론 구매해서 이십 년 이상 소장하고 있으면 분명히 이득을 볼 것 같은 작품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그 예상 이득조차 한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도윤이 한동안 응찰에 전혀 참가하지 않는 가운데 절반가량의 작품들이 순식간에 주인을 만나 사라졌다. 일반 경매장에서 낙찰되는 속도보다 가히 몇 배는 빨랐다.
중간에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드디어 그토록 찾았던 크리스틴이 마치 벽속에 숨어 있다 나타난 사람처럼 불쑥 그를 찾아왔다.
“경매에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신 것치고는 너무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나 봐요?”
“글쎄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맥이 빠졌나 봅니다. 오카시오는 이미 회장님의 서재에 걸려 있겠죠?”
“설마 오카시오를 노리셨던 거예요? 그 정도로 대단한 재력가인 줄은 몰랐는데요?”
도윤은 크리스틴의 뻔뻔한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그냥 피식 웃었다. 폴스터가 그림을 얼마에 팔았는지 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판을 이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설계하고 실현할 수 있는 리히터 회장의 능력이 조금 부럽기는 했다.
“감정료는 이미 계좌로 이체했어요. 아빠가 몹시 만족해하세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또 함께 일했으면 하시더라고요.”
“감정가야 의뢰인이 요구하면 언제든지 달려가야지요. 저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진짜로 좋은 경험이었지. 프랑크푸르트에 오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짧은 휴식 시간 뒤에 재개된 경매에서 드디어 도윤이 노리고 있던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는 제발 꿀단지에 모여드는 파리 떼처럼 사람들이 달려들지 않기를. 옆에 앉아 있던 폴스터는 휴식 시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다음은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시작가는 5만 유로, 호가는 한 번에 천 유로씩 올라갑니다.”
도윤은 한동안 팻말을 들지 않고 어디까지 가격이 올라가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어쩌면 아무도 팻말을 들어 올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는 달리 몇몇 사람들이 응찰에 참여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분위기가 뜨겁지 않다는 점이었다.
거북이 비탈길을 기어오르듯 완만하게 올라가던 호가가 7만 유로를 넘어가면서 눈에 띄게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 번 팻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증가하는 호가의 폭이 2천 달러로 높아진 것이다. 그와 함께 팻말을 들어 올리는 빈도가 뚝 떨어지면서 당장이라도 낙찰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때, 사라졌던 폴스터가 다시 나타났다.
‘실망한 척 하기는? 속으로는 좋아 죽겠으면서.’
폴스터는 자리에 앉지 않고 거실 가장자리에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단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는데, 한쪽 볼이 씰룩씰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이미 삼백만 달러를 벌었으니 지금부터 낙찰되는 그의 작품들은 모두 보너스인 셈이었다.
겉으로는 10만 달러 운운했지만 폴스터 역시 자신이 구한 데스마스크가 진품이라는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내심 유찰의 가능성까지 염려했던 작품이었는데, 그래도 시작가를 넘어서 조금씩이나마 가격이 오르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자, 7만 6천 유로까지 나왔습니다. 7만 8천 유로 없습니까? 7만 6천 한 번 갑니다. 7만 6천 두 번 갑니다. 7만 6천 세 번……. 네 7만 8천 나왔군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도윤은 감정사가 호가를 세 번 부르려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팻말을 들어올렸다. 순간 그나마 끝까지 호가를 높이고 있던 신사 한 명이 인상을 확 구겼다. 영락없이 자기 손으로 떨어지려던 데스마스크가 갑자기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도윤을 쏘아봤다.
‘노려보기는? 억울하면 가격을 더 높이던가?’
도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신이 응찰에 뛰어드는 순간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장내의 분위기는 무덤덤했다.
“저 친구 이 박사라고 했지? 그림을 잘 본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역시 다른 물건들은 안목이 별로인 것 같지?”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도윤은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트루쓰 앤 밸류에서는 모두 서양화만 출제됐었다. 그 때문에 도윤이 그림이 아닌 데스마스크까지 제대로 감정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현실적으로 그게 상식이기는 했다. 모든 종류의 미술품을 감정할 수 있는 감정가는 없었으니까.
도윤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지금까지 계속 데스마스크를 노리던 신사가 다시 팻말을 들어올렸다. 그때부터 두 사람이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팻말을 들어 올리자 호가가 순식간에 8만 6천까지 올라갔다. 그때 도윤이 팻말을 슬쩍 흔들었다. 한 번에 호가를 두 배로 높이겠다는 뜻이었다.
“네, 드디어 9만 유로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는 호가가 한 번에 3천씩 올라갑니다. 9만 3천 없습니까?”
도윤은 사실상 경쟁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호가를 더 높이려는 감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고집을 피우던 신사가 혀를 차면서 팻말을 완전히 내려버린 것이다.
“…9만 세 번 갑니다. 축하합니다. 9만 유로에 낙찰 됐습니다.”
내심 20만 유로까지는 각오하고 응찰에 참가했던 도윤은 뜻밖에도 한계로 잡았던 금액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를 손에 넣었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면 그를 노려봤던 신사 때문에 시세보다 더 비싼 가격을 주고 산 물건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이 작품의 진가를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일부러 울상을 짓는 척 하기는 했지만, 데스마스크를 위탁한 폴스터나 그걸 낙찰 받은 도윤에게도 만족스러운 경매 결과였다. 도윤은 다른 그림과는 달리 사람들이 왜 데스마스크에서는 자신을 따라 호가를 마구 높이지 않았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어갈 무렵, 드디어 모든 경매가 끝났다. 워낙 유찰된 작품들이 많아 낙찰률은 그자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여했던 사람들의 얼굴에 대체적으로 미소가 감도고 있었다.
순식간에 단상과 의자가 치워지고 대신 부페식으로 마련된 음식들이 대거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도윤이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접시를 들고 배회하려는 찰나, 크리스틴이 다가왔다.
“아빠가 잠깐 따로 좀 보자고 하세요.”
오카시오 건에 대해 입을 다물라고 다시 한 번 경고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윤은 들었던 접시를 조용히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