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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10화 (110/300)

110화

구한샘은 한 사람을 대동하고 도윤과 석훈이 함께 지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도윤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동안 석훈의 도움을 받아 새로 계약한 에이전트였다. 염려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빠르게 에이전트를 구한 셈이었다.

“이도윤 박사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YM 스포츠 에이전시의 박주원입니다. 앞으로 구한샘 선수에 관한 모든 일을 물심양면으로 돕기로 했습니다.”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허리를 크게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하는 박주원에 대한 첫인상은 밝고 쾌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차차 겪어봐야 하겠지만 일단 사람이 의뭉스럽거나 뒤로 딴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윤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회사지만 YM 스포츠 에이전시는 이름 그대로 운동선수만 전담해서 관리하는 에이전시였는데, 업계에서는 나름 큰 곳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에는 아직 지사가 없지만 독일과 영국, 스페인과 네덜란드에 각각 직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한샘을 전담할 에이전트인 박주원은 짐작대로 석훈의 대학 동기였다.

“저놈 없었으면 아직도 에이전트 구한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녀야 했을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선수를 등쳐먹을 놈은 절대 아니니까 일단 믿어보세요.”

석훈은 다른 것보다 박주원이 믿을만한 인간이라는 점을 열심히 강조했다. 도윤은 일단 두 사람을 거실로 맞아들여 슈뢰더 회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그러니까 기회는 주겠지만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제 능력에 달려 있다는 얘기죠? 전 그걸로 충분히 만족해요. 고마워요, 형.”

한샘은 도윤의 얘기를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녀석, 일단 마음 자세는 됐네.

“그래. 테스트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몸을 만들 수 있겠니?”

“몸은 벌써 다 만들어졌어요. 지금은 기술에 대한 감을 끌어올리는 중인데, 최대한 노력해서 테스트 전까지는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다듬어 놓을게요.”

“너무 급하게 훈련하면 오히려 부상당할 염려가 있어. 이번에 안 되면 여름에 다시 정식으로 입단 테스트를 받으면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라.”

“에이, 이 정도면 무리하는 것도 아니에요. 에이전트가 생기니까 당장 훈련장 구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어서 전보다 훨씬 편해졌어요.”

도윤이 박주원을 쳐다보자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에이전트 계약을 맺을 때 염려했던 것보다 구한샘 선수의 컨디션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만 가면 테스트 통과를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사실 박주원이 소속된 YM 에이전시는 처음에 한샘과 계약하는 것을 망설였다. 아무리 과거에 잘나갔던 유망주라고 해도 다른 병도 아닌 백혈병 때문에 오랫동안 입원했던 선수였다. 본인의 말도 그렇고 병원의 진단서에도 완쾌했다고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잠복했던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해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원이가 한샘이 연습하는 걸 보더니 회사에 적극적으로 얘기했어요. 잠재력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스토리가 있는 선수니까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요.”

석훈의 말이었다. 박주원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식으로 에이전시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다. 독일까지 가서 테스트를 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비용 역시 한샘이 대기로 했다. 다만 녀석이 테스트를 통과해서 프랑크푸르트 구단과 계약이 체결되면 그때부터 YM 에이전시와도 정식 에이전시 계약을 맺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일단은 제가 구한샘 선수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갈 겁니다. 현지에서 무사히 테스트를 받도록 도울 예정이거든요. 구한샘 선수가 쓰는 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하지만 회사에서도 제 출장 비용은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박주원이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구한샘이 얼른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라도 해주는 게 어디에요? 저는 독일어는 한 마디도 못하고 영어도 떠듬떠듬이거든요. 주원이 형은 둘 다 잘하니까 통역만 해주셔도 크게 도움이 될 거예요.”

석훈의 말에 따르면 박주원은 어릴 때 상사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오랫동안 국제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덕분에 영어하고 독일어는 아무런 문제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그것이 석훈이 박주원을 적극 추천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아파트로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박주원은 이미 프랑크푸르트 구단과 선수는 물론이고 코칭 스태프에 대해서까지 상세한 조사를 해놓은 상태였고, 그것이 그에 대한 믿음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박주원은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쯤 지나자 양해를 구한 뒤 먼저 돌아갔다 그때부터는 석훈과 도윤, 한샘 세 사람만 남아서 가볍게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다만 한샘은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며 술을 사양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따로 커피를 내려주었다.

“근데 저건 뭐예요? 왠지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조각이네요?”

한샘이 문득 거실 벽에 걸어놓은 데스마스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도윤은 독일에서 사온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를 일부러 거실에 걸어놓았다. 그것을 발견한 한샘이 집안에 장식해 놓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며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하긴 베토벤은 죽기 전에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광대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살이 빠진 상태였다. 그 모습을 그대로 본뜬 데스마스크는 한샘의 말마따나 그다지 보기 좋은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저건 조각이 아니라 데스마스크야. 죽은 사람의 얼굴을 석고로 본을 떠서 만든 건데, 유럽에서는 한때 저런 게 유행했었어. 베토벤뿐만이 아니라 뉴톤이나 나폴레옹, 빅토로 위고 같은 사람들의 데스마스크도 남아 있을 정도니까.”

“에이,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는 게 제일 깨끗하지 왜 쓸데없이 저런 짓을 한대요?”

한샘은 데스마스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윤도 쓴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일단 그 말에는 동의했다. 자신이 베토벤이라면 죽을 당시의 흉한 모습이 영원히 남아서 사람들 앞에 전시되는 걸 절대로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한샘의 개인적인 기호에 상관없이 그에게 꼭 필요한 마스크라는 게 문제였다.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더라니.’

한샘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데스마스크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와 그에게 연결되는 게 분명히 보였다. 녀석이 바로 데스마스크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독일 축구 선수의 능력이 한국의 축구 유망주에게도 전해질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유물의 주인은 먼저 집는 놈이 임자인 것 같아.’

주인이 있는 물건이라고 해서 하나의 유물에 오직 한 명의 주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또한 주인들마다 유물과의 궁합 정도가 서로 달라서 전해 받는 능력의 강도나 효율성 같은 것들이 제각기 달랐다. 또한 유물과 주인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링커의 능력도 얼마나 큰 능력을 전해 받느냐에 영향을 주었다. 구한샘은 과연 어떨까?

“이왕 왔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라.”

도윤은 늦었으니 그만 일어서야겠다는 굳이 한샘을 만류했다. 석훈이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보안 문제 때문에 현재의 아파트를 얻어 독립한 이후로 석훈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누구도 집에서 재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한샘에게 먼저 자고 갈 것을 권하니 조금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도윤은 그의 시선을 모른 척 했다.

“그래도 돼요? 그럼 이번에 독일에 갔던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주세요.”

다행히 한샘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자고 가는 쪽을 택했다. 세 사람이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도윤은 일부러 석훈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결국 빠르게 술이 오른 녀석이 그만 씻고 자아겠다며 비틀거리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둘만 남게 된 틈을 이용해서 도윤은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한샘의 커피 잔에 슬쩍 집어넣었다.

“아, 이 닦고 자야하는데…….”

약발이 잘 받는 체질인지 한샘은 수면제가 몸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결국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도윤은 거실에 걸려 있던 데스마스크를 내려 한 손에 잡았다.

“설마 수면제 조금 먹었다고 컨디션이 엉망이 되지는 않겠지?”

도윤은 다른 손으로 잠든 한샘의 손을 잡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잠시 후 데스마스크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도윤의 몸을 타고 한샘에게 스며들었다. 능력이 전해지는 순간 약간 꿈틀대던 녀석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코끝에 손을 대자 고른 숨이 느껴졌다. 옷장에서 모포를 꺼내 녀석에게 덮어준 도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년 쯤 능력을 전달해주고 싶지만 그냥 지금 하는 게 나을 거야.”

내심 걱정했는데, 짐작대로 한샘에게 전해진 것은 우베 젤러의 능력이 분명했다. 유물의 능력을 주인에게 전달시켜주는 순간만큼은 그 성격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도윤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한샘은 당장 다음 달에 독일로 가서 테스트를 받아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아닌 축구 선수의 재능은 역시 지금 전해주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열심히 훈련해서 꼭 좋은 성과를 내라. 네 꿈이었잖아. 유럽에서 활약하는 축구 선수.”

그나저나 올해는 이것으로 세 번이나 유물의 능력을 주인에게 전해준 셈이 되었다. 이러면 한 삼 년쯤 능력을 전해주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링커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자선봉사자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는 크리스마스와 신정 연휴였다. 현소 화랑은 물론이고 청파갤러리까지 한 해의 일정이 모두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도윤과 최서라는 모처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따뜻한 휴가였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윤은 최서라에게 리히터 회장이 건네주었던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경매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 자리에 이왕이면 최서라가 함께 참석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월 말에 저와 함께 터키에 가자는 말씀이죠?”

그녀의 말에 도윤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함께 가자는 게 아니라 이스탄불에서 만나자는 얘기야. 나는 또 다른 곳에 들렀다가 거기로 가야 하거든. 물론 돌아올 때는 같이 올 수 있어.”

“도윤 씨는 너무 국제적으로 노는 것 같아요. 그럼 새해에도 몹시 바쁘겠네요?”

도윤도 바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벌여놓은 일들이 많았고, 확인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새롭게 자꾸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는 일부러 화제를 경매로 집중시켰다.

“고대 페르시아도 그렇지만 수메르 문명 역시 황금으로 만든 머리 장식과 팔찌 등을 비롯해서 금속 공예품들이 극도로 발달했어. 그런데 그쪽 분야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네 도움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

사실 진품을 가려내는 도윤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예술적 가치를 토대로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소한 분야의 예술품이라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을 찾아내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도윤이 최서라의 동행을 요구한 것은 사실 그녀와 함께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일본 여행은 당일치기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쉬움만 잔뜩 남겼다.

“근데 이스탄불에 오기 전에는 어디를 들를 건데요?”

“뉴욕하고 콜롬비아. 몇 가지 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주된 목적은 역시 콜롬비아에 들르는 것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뮌헨에서 만났던 파울로 마르케스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뉴욕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오윤수를 먼저 만나보려는 것은 어차피 서울에서 콜롬비아 현지까지 곧장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 편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스코바르의 비밀 동굴이 있는 자리에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했지? 그럼 동굴을 확인하더라도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일단 현장만 답사해 두자.’

마르케스에게서 실토를 받아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비밀 동굴에 숨겨진 보물을 무사히 꺼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군인들의 눈을 속이는 건 둘째 치고, 설사 보물을 무사히 꺼낸다고 하더라도 그걸 또 한국으로 가져올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현장을 보지도 않고 여기에서 고민만 하고 있자니 그것도 사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결국 한샘과 그의 에이전트가 프랑크푸르트로 떠난 며칠 뒤, 도윤은 다시 짐을 싸서 뉴욕으로 향했다. 비행기 마일리지가 무서운 속도로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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