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대기실. 티엔과 도안은 커피숍에 앉아 휴대폰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윤이 일러준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서 각자 자신들의 몫으로 할당된 계좌를 확인했다. 한 사람 앞에 100만 달러씩. 시험 삼아 베트남에 있는 자신들의 계좌로 100달러를 송금한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없이 돈이 이체된다는 걸 확인했다.
도윤은 티엔과 도안에게 곧바로 패스워드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패스워드 변경 작업을 끝낸 두 사람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100만 달러는 원화로도 10억이 넘는 거금이지만 베트남에서는 일반 직장인들이 평생 일해도 모을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확인한 도윤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두 분 덕분에 이번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정혁 사장님께 미리 얘기해 놨으니까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곧 승진 발령 인사가 있을 겁니다.”
티엔과 도안 역시 도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콜롬비아는 베트남과 날씨가 비슷해서 별로 고생한 것도 없습니다. 저희야말로 두 달도 채 되지 않는 출장의 대가로 너무 큰돈을 받는 것 같아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시겠지만 비밀 유지 조건이 붙은 돈입니다. 이번 일에 CIA가 관계되었다는 거 아시죠? 콜롬비아에서 보고 들은 일을 함부로 발설하면 미국 정부가 나설 거예요. 여러분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그저 석탄 광맥을 찾으러 왔다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회사에도 탐사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보고하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베트남에 가게 되면 또 보게 될 겁니다. 표는 퍼스트 클래스로 끊었으니 베트남까지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침 베트남 행 비행기의 탑승 수속이 시작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기 때문에 티엔과 도안은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도윤이 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이미 한국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가 이곳에서 진행된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곧 서울로 갈 거라고 얘기하자, 석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티엔과 도안 말이에요, 그 두 사람 정말 비밀을 지킬까요?”
“그거야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하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CIA가 나설 거라는 건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야. 아담스 팀장이 저 두 사람에게 몇 번이나 따로 주의를 줬거든. 아무리 베트남이 한때 미국과 전쟁을 치른 나라라고 해도 평범한 민간인들이 미국 정보부의 경고를 무시하기는 힘들 거야.”
게다가 티엔과 도안은 미국 국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도윤과 석훈이 동굴 내부의 물건들을 확인하는 동안 두 사람은 계속 밖에 서 있었고, 도윤이 CIA 요원을 만나러 갈 때는 이미 국채를 숨긴 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석과 현금을 훔쳐서 도망가지 않은 것만 봐도 믿을 만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도윤이 메데인에서 호텔에 묵은 다음날 아침, 석훈은 미리 약속한 대로 콜롬비아에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 뒤로 도윤이 CIA 요원들과 함께 동굴로 돌아올 때까지 현장에 남아 있던 사람은 티엔과 도안 둘뿐이었다. 동굴로 복귀한 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몰래 금괴와 보석, 현찰의 수량을 확인했다. 모든 게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100만 달러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윤이 이번에 공식적으로 얻은 것은 보석 한 주머니와 미술품 두 점, 그리고 채권 1억 달러가 전부였다.
그나마 티엔과 도안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미술품 두 점과 가방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도윤이 이번 일로 정확하게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너무 과한 보상을 주는 건 오히려 공연한 의심을 키울 우려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당분간 우리 노영태 변호사님이 고생깨나 하시겠네.”
도윤은 비에코에 대한 투자 건 때문에 조명근 검사의 추천을 받아 대동의 노영태 변호사를 전담 변호사로 선임했었다. 조명근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변호사 자격을 얻었을 뿐 아니라 기업이나 금융 쪽 전문가라고 했으니까 이번에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것이다.
“날씨 무지하게 좋다!”
도윤은 서울 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라운지에서 기지개를 크게 켰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우중충한 뉴욕의 하늘이 유난히 맑아 보였다.
* * *
도윤이 선택한 두 점의 미술품은 그가 탄 비행기와 함께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CIA에서 빠르게 손을 써 준 덕분에 시간을 끌지 않고 항공 화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메데인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무사히 미국 땅에 착륙한 이후로 도윤은 보이드 국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뉴욕을 떠나는 그를 공항까지 배웅한 사람은 아담스 팀장이었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가드너 미술관에서 내건 현상금 천만 달러는 조만간 우리가 받아서 이 박사님 계좌로 입금할 겁니다. 하지만 이 박사님은 가드너 미술관은 물론이고 앞으로 그림을 돌려받게 될 어떤 곳으로부터도 감사 인사를 받지 못할 거예요. 그건 모두 CIA의 공적이 될 테니까요.”
도윤은 실소를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시네요. 에스코바르의 동굴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당연히 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저는 물론이고 이번 일에 관계된 그 누구도 죽을 때까지 메데인의 동굴이나 에스코바르의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맞죠?”
“맞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돌려받게 될 사람들은 몰라도 미국과 CIA는 박사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 힘이 닿는 한 최대한 돕겠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적어도 아담스 팀장은 보이드 국장에 비해 약간이나마 양심이 있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도윤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두 번 다시 CIA와 일을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 발견된 금괴와 보석, 현찰들이 모두 국고로 들어가지는 않겠지. CIA는 비밀 자금이 많이 필요한 곳이니까. 제발 미술품들만 얌전히 돌려줬으면 좋겠네.’
인천 공항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석훈이 트럭을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린 화물을 찾자마자 곧바로 트럭에 실어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왔다. 도윤은 물건들을 무사히 집안으로 옮겨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앉아 잠깐 숨을 돌린 그는 다른 물건들을 일단 안방으로 치운 다음, 금동 불상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어른 배꼽 높이의 상자 안에는 금동 불상이 충전제 속에 파묻힌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떨어져나간 팔은 불상의 무릎 위에 올려진 상태였다.
특이한 것은 처음 금동 불상을 포장하던 때와는 달리, 상자 안에 두툼한 의자 시트 두 개가 세로로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콜롬비아의 트럭 렌트업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사라진 조수석 시트 두 개가 그곳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도윤은 금동불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의자 시트만 꺼냈다. 그가 시트 옆에 달린 지퍼를 당기자 안에 있던 두툼한 종이 뭉치가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에스코바르의 동굴에서 발견된 두 개의 가방에 잔뜩 들어있던 미국 국채들이었다.
“전부 다 무사한 거예요?"
그가 시트 안에서 국채를 잡아 빼는 걸 본 석훈이 옆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도윤은 눈대중으로 국채 뭉치의 두께와 수를 대충 가늠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 한쪽에 4억 5천만 달러씩 9억 달러가 맞는 거 같아. 나머지는 가방 안에 넣어서 당당하게 CIA의 허락을 받고 가져왔으니까 전부 합해서 10억 달러다. 이것 때문에 메데인 공항까지 가는 동안 엉덩이가 배겨서 죽는 줄 알았다. 거기 산길이 좀 덜컹거려야지.”
“배부른 소리 하시네. 10억 달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엉덩이가 배기는 게 아니라 뼈가 부서지더라도 참을 사람이 수두룩할 거요.”
그 말에는 도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국채를 무사히 빼오기 위해 나름 머리도 쓰고 고생도 한 게 사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대가를 얻은 셈이었다.
처음 동굴에서 국채를 발견했을 때, 도윤은 석훈과의 논의를 통해 그걸 한국까지 빼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아무리 티엔과 도안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모든 걸 알리는 건 곤란했다. 뿐만 아니라 CIA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도윤은 원래 다른 미술품들과 함께 있던 불상의 머리나 팔을 떼어낸 다음에 그 안에 국채를 숨길 생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을 만들 때 뱃속을 비운 다음에 그 안에 책이나 사리함 같은 것들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복장(腹藏) 유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착안한 방법이었는데, 석훈이 금동 불상을 손가락으로 탕 튕겨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형, 이거 속이 비어서 밖에서 두드리면 맑게 울리잖아요. 그런데 종이로 된 국채를 넣으면 소리가 당장 둔탁하게 변할 거 같은데요? 옮기다가 떨어트리거나 누가 부딪치기만 해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안에 뭔가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한 대안이 트럭 조수석의 두툼한 의자 시트였다. 조수석 시트와 등받이는 모두 두툼한 쿠션이 들어간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안에 있는 쿠션을 빼내자 크기와 두께 모두 국채를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동이 트기 전에 두 사람은 시트 속을 몽땅 비우고 대신 국채를 채워 넣는 작업을 끝마쳤다.
1억 달러는 일부러 빼내어 가방에 담았다. 그는 1억 달러어치의 채권에 CIA의 눈길이 쏠리게 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다른 곳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피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그의 계획은 제대로 적중했다.
CIA와 함께 동굴 속의 물건을 밖으로 옮기던 날, 도윤은 일부러 금동 불상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을 연출했다. 만약을 위해 호텔에서 보이드 국장을 만났을 때 일부러 불상의 속이 비어있다는 얘기도 슬쩍 흘려두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냥 넘어가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마침 보이드 국장이 의심을 품고 다가와 불상의 팔을 잡아 뽑는 무리수를 두었다. 덕분에 그로서는 오히려 일이 더 쉬워졌다.
무안해진 국장이 먼저 트럭으로 도망감에 따라 다른 CIA 요원들이 보내던 감시의 눈길도 느슨해졌다. 덕분에 불상이 담긴 나무 상자 안에 트럭 시트를 넣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다. 원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돌릴 방법까지 따로 마련해 두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대신 동굴에서 공항까지 가는 내내, 도윤은 시트 대신 미리 준비한 얇은 합판 위에 앉아 덜컹대는 산길을 견뎌내야 했다.
“보이드 국장이 자기 손으로 13억 달러를 비행기에 실어 보냈다는 걸 알면 아마 머리를 몽땅 쥐어뜯으려 들 거야. 하긴 그 사람은 대머리가 더 어울릴 것 같기는 해.”
도윤이 보이드 국장이 들었다면 펄쩍 뛸 소리를 하는 동안, 석훈은 마치 사랑스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국채 뭉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야,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 이게 그럼 우리나라 돈으로는 전부 얼마예요?”
“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1조 2천억 정도 될 거야.”
“1조 2천억! 형, 그럼 우리 이 돈으로 오성 전자도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도윤이 혀를 차면서 석훈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정신 차려. 거기 주식은 시가 총액이 300조야. 우리나라 대기업 시가 총액 순위 20위만 돼도 기본적으로 15조가 훨씬 넘는데 1조 2천억을 어디다 갖다 붙이려는 거야?”
물론 도윤도 1조 2천억을 별거 아니라고 할 정도 간이 크지는 않았다. 상장 기업의 주식을 1% 이상 소유하면 법률상 대주주로 분류된다. 1조 2천억을 모조리 주식으로 바꿀 경우 웬만한 기업에서는 단번에 대주주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이번에 발견된 보물 가운데 우리가 절반 정도는 차지한 셈이네요?”
그런가?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계산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였다.
동굴에서 발견된 금괴와 보석, 그리고 현찰을 모두 합하면 대략 8억 달러 정도가 될 것이다. 거기에 컨테이너 안에 있던 미술품들을 모두 시세대로 팔 경우 총합이 20억 달러 이상까지 올라간다. 그렇게 따지면 도윤이 가져온 것은 전체의 3분의 1가량이다.
“하지만 도난당한 미술품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했으니까 나머지를 팔아서 미국 정부가 갖는다고 해도 15억 달러 이상은 아닐 거야. 그럼 우리가 가져온 게 대략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할 수 있겠지. 너무 많이 가져온 건가?”
도윤의 말에 석훈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CIA는 솔직히 손도 안 대고 코 푼 격인데 뭐가 너무 많이 가져와요? 남의 걸 훔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챙긴 건 전부 주인 없는 물건이잖아요. 더구나 이번에 콜롬비아에서 돈도 많이 썼으니까 형은 충분히 양심적으로 권리를 행사한 거라고요.”
솔직히 양심적이라고까지 얘기하기에는 다소 낯이 뜨거운 게 사실이었지만 도윤 역시 이 국채를 굳이 CIA에게 넘겨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이야 어차피 자신이 처리하기에는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았으니 그들에게 넘기는 게 나았다. 게다가 CIA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상은 그들에게 넘긴 금괴와 보석, 현찰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나저나 저 금동 불상은 어떻게 할 거예요?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인데 좀 안타깝네요. 원래 모습대로 복원이 잘 될까요?”
석훈이 불상을 보며 입맛을 다시며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가짜야. 수리할 필요 없어. 게다가 양식 자체가 우리나라 것도 아니고. CIA의 눈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데, 그 친구들 저게 중국 고대 불상을 모방한 거라는 걸 눈치조차 채지 못하더라고.”
“아니, 잠깐만요. 중국 불상이든 한국 불상이든 아무튼 저게 가짜라고요?”
“그래. 안 그러면 애초에 내가 저 안에 국채를 넣을 생각을 했겠냐? 나름 겉에다 금도금을 하기는 했지만 전부 황동으로 만든 거야. 저거뿐만이 아니라 컨테이너 안에 있던 미술품들 중에 위작이나 모작이 제법 돼. 에스코바르가 처음부터 사기를 당했던 모양이야.”
결국 금동이 아닌 황동 불상은 석훈의 손에 의해 납작하게 구겨진 뒤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그러나 도윤이 굳이 선택했던 나머지 그림 한 점과 보석은 모두 진짜였다.
불상을 처리한 도윤은 그제야 이번에 얻은 그림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그림은 가로가 2미터, 세로가 1미터 가량 되는 화선지에 그린 동양식 채색화였는데, 용머리를 단 배 한척이 여러 척의 다른 배들을 뚫고 지나가며 대포를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그림을 살펴보던 석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이게 뭐예요? 해상 전투를 하는 모습을 그린 것 같기는 한데 어느 나라 건지 모르겠네. 이거 색감이 좀 이상한 걸로 봐서 혹시 일본 그림 아니에요?”
도윤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석훈을 쳐다봤다.
“그래도 미술관에서 일하더니 보는 눈이 생겼나 보구나. 맞아. 나도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임진왜란 때의 모습을 그린 걸 거야. 일본사람들은 그때부터 이미 전쟁터에 종군 화가들을 파견해서 전쟁 상황을 그리게 했거든. 요즘은 종군 사진기자 같은 거지.”
“임진왜란이요? 그럼 이 배가 그 뭐냐, 조선시대 판옥선이에요?”
“기본적으로는 판옥선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는 아냐. 그거 거북선이야.”
순간 석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거북선이라고? 그는 그림과 도윤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에이,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사람이 속일 걸 속여야죠. 이게 무슨 거북선이에요? 하긴 자세히 보니까 뱃머리에 용머리가 달려 있기는 하네. 그래도 등에 철갑이 덮여 있지 않잖아요. 죄다 나무로 만들었는데 거북선은 무슨?”
“거북선 맞아. 그리고 누가 거북선에 철갑이 덮여 있대? 이름이 거북선이라고 해서 진짜 거북이하고 똑같이 생겼는지 알아?”
석훈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럼 도대체 왜 거북선인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