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도윤은 어린 시절 한 번 크게 앓고 난 이후로 미술품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각성했다. 이세준과 서연희는 고민 끝에 그런 아들에게 미술품 감정은 물론이고 미술 전반에 대한 교육을 다양하게 시키기로 했다. 덕분에 도윤은 어렸을 때부터 현소 화랑 지하 2층에 있는 수장고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작품들을 마르고 닳도록 감상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지하 3층에도 또 다른 수장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이세준에게 비밀 수장고를 구경하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때 이세준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하 3층은 현소 화랑의 주인만 내려갈 수 있는 곳이야. 나중에 우리 도윤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그래서 화랑을 맡겠다는 결심을 굳히면 아빠가 꼭 보여줄게.”
“제가 어른이 됐는데도 화랑을 맡지 않겠다고 하면요?”
“그럼 아쉽지만 아빠도 화랑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겠지. 비밀 수장도고 그 사람한테만 보여주고. 그곳은 아빠 아들이 아니라 화랑의 주인만 볼 수 있거든.”
그 뒤로 다행스럽게도 도윤은 미술품의 감정과 복원에 큰 흥미를 보였고,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뒤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현소 화랑 일을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된 도윤은 섣불리 비밀 수장고를 보여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이세준 역시 툭하면 자리를 비우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아들을 보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한성 옥션이 쓸 데 없는 짓을 벌이는 바람에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부모님 집을 찾아갔던 다음날, 도윤은 출근하자마자 이세준의 호출을 받았다. 대표실로 올라가자 그의 옆에 어머니인 서연희가 함께 서 있었다. 전날 술을 제법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세준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아들을 맞이했다.
“오늘은 우리하고 같이 지하 3층에 가자.”
지하 3층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도윤은 움찔했다.
“그 말이 설마 아버지가 대표직에서 물러나시겠다는 뜻은 아니죠?”
이세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더니 큭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 아들이 참 믿음직하게 잘 크기는 했어도 대표 자리에 앉으려면 최소한 삼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걸? 난 백발이 되기도 전에 낚시나 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비밀 수장고를 보여주시겠다는 거예요? 저야 물론 고맙지만요.”
“그렇잖아도 조만간 너를 지하 3층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네가 워낙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적당한 시기를 잡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하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앞으로는 나도 너한테 화랑 일을 맡기고 가끔씩 엄마하고 여행도 좀 다니면서 살아야겠다.”
말을 마친 이세준은 곧바로 움직였다. 서연희와 도윤을 비밀 수장고 입구까지 데리고 간 그는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전자자물쇠의 비밀 번호를 입력하고 아들의 지문을 등록시켰다.
“이제 이 자물쇠는 이 세상에서 나하고 네 엄마, 그리고 너 세 사람만 열 수 있다. 이번에는 내가 데리고 내려왔지만 앞으로는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수장고에 드나들 수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으면 여기에 보관해도 되고.”
이세준은 도윤에게 일러준 방법대로 직접 수장고를 열어보라고 했다. 그가 2단계에 걸쳐 비밀 번호를 입력하고 엄지손가락을 판독기에 올리자 수장고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수장고의 내부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도윤은 너무나 눈부신 빛 때문에 하마터면 눈을 감을 뻔했다. 수장고 전체를 신비스러운 빛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윤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수장고를 쓱 둘러본 도윤이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생각보다 엄청 넓네요. 어떻게 지하 3층이 2층보다 더 클 수가 있죠?”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면서 내뱉은 도윤의 말에 이세준이 씩 웃었다.
“이걸 만드느라 네 할아버지가 성백준을 통해 귀중한 작품을 몇 점이나 팔아야 했지. 당시에도 인사동 땅값이 꽤 비싸기는 했지만 그래도 건설비가 훨씬 많이 들었어. 내가 나중에 업그레이드하느라 쓴 비용까지 합하면 이 건물 값의 절반 정도는 이 비밀 수장고를 만드느라 쏟아 부은 셈이야.”
이미 진열대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작품들을 뒤적이고 있던 도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수장고를 만드는데 얼마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작품들 시세도 건물 값 못지않을 것 같은데요? 아빠 생각보다 부자였네요?”
“내가 아니라 현소 화랑이 부자인 거야. 난 이거 팔아서 호의호식하고 싶은 생각 없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이 작품들을 팔지 않아도 이미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하지만.”
도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곳에 보관된 작품들은 섣불리 가격을 매기기가 두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소장품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서화나 유물들이었다. 한국의 미술 시장이 그리 큰 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시세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나 신윤복, 김홍도의 걸작들이 오히려 현대 화가들의 그림보다 싸게 거래되는 실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미술사적 의미나 역사적 비중을 따지면 이곳에 소장된 작품들의 가치는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지하 3층의 수장고는 넓이만 따질 경우 농구장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게다가 큰 수장고 안에 있는 작품들 가운데 진작이 아닌 것이 단 한 점도 없었다. 작품들의 절대 다수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고학 어르신의 수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양반이 생전에 신안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여기 있는 게 모두 몇 점이에요?”
도윤이 작품을 하나씩 살펴보며 물었다. 그러자 이세준이 수장고 한가운데로 그를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컴퓨터와 모니터를 비롯한 사무용 집기들이 놓여 있었다. 이세준이 컴퓨터를 켜더니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시켰다.
“전부 524점이다. 네 할아버지와 내가 구해서 여기에 가져다 놓은 게 백 점이 조금 넘으니까 나머지는 모두 고학 어르신이 모아놓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아까도 말했듯이 이 건물을 짓느라 할아버지께서 조금 내다파신 것도 있고.”
“그럼 이 가운데 정말 국보급 문화재도 있어요? 신문 기사에 그렇게 났잖아요. 우리가 도굴꾼들에게 몰래 구입한 국보급 문화재가 여러 점이라고.”
그 말에 이세준이 피식 웃었다.
“글쎄다. 그건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 봐라. 여기 있는 것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어. 그러니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딱지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지. 네 증조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때 이것들을 지키느라 워낙 고생을 하시는 바람에 절대로 사람들 앞에 내놓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 유언을 지키는 중이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숨길 거예요?”
“글쎄다. 나는 성백준 그 인간 때문에라도 되도록 숨기는 쪽을 택하기는 했지만 너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 내 생각을 묻는 거라면 당장은 공개할 계획이 없어. 하지만 네가 이 화랑을 맡게 되면 굳이 돌아가신 분의 유언에 구애받지 않아도 돼. 알아서 해라.”
이세준은 실행시킨 프로그램을 조작해서 도윤에게 보여주었다. 이 수장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관리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각 작품의 이름과 연대, 작자 등은 물론이고 누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그것을 발견했는지, 그리고 작품의 수집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이 빼곡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너라면 몰라도 나는 여기 있는 작품들의 세부 사항을 모조리 기억하는 게 힘들었어. 그래서 외부에 부탁해서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지. 거기 적힌 기록들은 고학 어르신이 작품을 수집할 때마다 노트에 직접 적으셨던 걸 내가 다시 정리한 거야. 그 뒤로 새로 작품이 추가될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늘려나갔고.”
도윤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력 내용 가운데에는 각 작품들이 수장고에 보관된 위치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물건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도윤이 프로그램에 수록된 작품 목록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세준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하고 엄마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먼저 올라가마.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오늘은 너한테 시킬 일이 없으니까 천천히 살펴보도록 해라.”
이세준과 서연희는 그 말을 남기고 수장고를 떠났다. 체육관처럼 넓은 수장고에 도윤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는 수장고에서 네 시간가량을 더 머물렀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지지 않았더라면 저녁까지 내처 죽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수장고 안에는 볼만한 작품들이 가득했다. 서화는 물론이고 각종 도자기와 불상, 석각과 전통 가구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희귀한 서책들도 눈에 띄었다. 수가 적기는 했지만 현대 한국 화가들의 작품들도 보였다.
이세준은 분야별로 작품과 유물들을 잘 정리해놓았다.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도윤도 목록을 확인한 뒤에는 일단 분야별로 유난히 밝은 빛을 발하는 작품들만 먼저 살피는 방식으로 진열대를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가 그림들을 감상하고 도자기와 금속 공예품들을 들여다본 뒤에 서책 코너로 넘어갔을 때, 문득 얇은 책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문숙공 행장(文肅公 行狀)?”
행장은 달리 행록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죽은 사람의 행적과 성품에 대하여 서술한 글을 가리킨다. 정사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라면, 행장은 대부분 죽은 사람의 친인척이나 제자들이 조상이나 스승의 일대기를 적어서 남긴 것이다.
도윤의 관심을 끈 것은 ‘문숙공’이라는 단어였다. 죽은 사람에게 내려진 시호가 분명했는데, 도윤이 아는 한 문숙공은 고려 시대 때 거란과 여진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윤관이 사후에 받은 것이었다. 무심코 책을 펼쳐서 앞부분을 읽던 도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걸 신숙주가 썼어? 그 사람이 왜? 신숙주가 도대체 윤관하고 무슨 관계지?”
신숙주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세종 때의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조를 거쳐 성종 때까지 관직을 맡았던 유명한 문인이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고려 때의 윤관 행장을 썼다고?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뒤적이던 도윤의 발밑으로 갑자기 종이 한 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네 겹으로 접은 종이였는데 책갈피에 끼워져 있다가 그가 건드리는 바람에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어 펼쳐보았다. 그러자 세로로 길게 펼쳐진 낡은 종이 위에 네 글자가 쓰인 게 보였다.
‘살신보효(殺身報?)’
몸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글씨를 쓴 사람의 서명이나 낙관이 전혀 없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글씨체에 힘이 있기는 하지만 획이 고르지 못하고 붓놀림도 엉성해서 이른바 먹물을 많이 묻혀본 사람이 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글씨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종이에서 언뜻 붉은 빛이 비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 * *
서울 중앙 지검 특수 2부의 조명근 검사실. 도윤에게 어릴 때 한문을 가르쳤던 조태석 교수의 아들이기도 한 그의 방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조 검사? 지금 별일 없으면 내 방으로 잠깐 올라오지?”
조명근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툭 끊어졌다. 이쪽의 대답은 처음부터 들을 생각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말투로 보아 설사 지금 별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닥치고 올라오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조명근은 기가 막혀 전화기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우리 차장님 열 받으셨나 보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나를 들들 볶으시려나?”
그를 부른 차장님은 조명근의 직속상관인 전시헌이 아니라 1차장인 강일환이었다. 며칠 전에 신문 문화면을 후끈 달구었던 현소 화랑의 불법 문화재 매입 건을 수사하고 있는 형사 6부가 바로 그의 관할 하에 있는 부서였다.
조명근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강일환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잠깐 넥타이를 점검한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대뜸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조명근이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두툼한 서류철을 올려놓고 열심히 검토 중인 강일환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그가 책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허리를 숙이자 강일환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일상적인 인사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 낮고 살기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자네 지금 뭐하자는 건가?”
“네?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몰라서 물어? 이거 다 뭐야?”
강일환이 보고 있던 서류철을 펼쳐진 그대로 조명근의 앞에 툭 내던져졌다. 제일 첫 장에 민달삼이라는 이름과 함께 노인의 사진이 인쇄된 서류가 보였다. 서류철의 두께로 보아 그 뒤로도 여러 사람의 이름과 사진을 비롯한 신상 명세가 적힌 기록들이 더 있을 게 뻔했다.
역시 그거였군. 속으로 혀를 찬 조명근이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서류를 형식적으로 몇 장 넘겨보던 그가 짐짓 시치미를 떼며 태연히 대답했다.
“요즘 저희 특수 2부에서 수사 중인 미술품 위조범들이군요. 몇 명은 이미 구속했고, 나머지도 현재 입건 상태입니다. 이 건에 대해 뭔가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불편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 미술품 위조범에 관한 건이면 우리 형사 6부 관할이잖아? 이걸 왜 너희가 건드리고 지랄인데? 특수부가 요즘 그렇게 한가해? 시간이 남아돌아 주체를 할 수가 없어? 왜 남의 나와바리까지 기웃거리는 거야? 엉?”
나와바리 좋아하시네. 우리가 검사지 조폭이냐? 조명근은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희 특수부야 원래부터 인지 수사를 기본으로 하는 곳 아닙니까? 위조범들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기에 수사를 시작한 겁니다. 대충 알아보니까 액수나 수법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경찰과 공조해서 빠르게 수사하고 일부는 검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너희가 진행하느냐는 말이야. 인지된 건은 죄다 수사해? 이런 건 그냥 우리한테 넘기면 알아서 잘 할 텐데 왜 굳이 직접 떠맡고 그래?”
“저희가 하는 수사 중에 지검 내에 담당 부서가 없는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희라고 뭐 일 만드는 게 좋아서 그러겠습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조명근은 최대한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일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이해 못해 주겠다면?”
“네?”
“나는 뭐 장님에 귀머거리인 줄 알아? 들은 얘기가 없을 것 같아? 특수부에서 이 친구들 잡아들이는 게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잖아? 아니야?”
“다른 이유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검사가 범죄자를 잡아들이는데 사회 정의를 바로잡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겠습니까? 저희는 검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 할뿐입니다.”
이 자식 혀 돌아가는 거 보게? 강일환은 울컥해서 핏대를 올리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한대길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요즘 중앙 지검에서 의도가 의심스러운 수사를 한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실을 확인한 강일환은 속으로 한대길을 욕했다.
‘위조범을 잡아들이는 걸 당신이 왜 불편해 해? 분명히 한성 옥션하고 얽힌 놈들이군.’
한국에서 제일 큰 경매 회사가 다른 놈들도 아니고 위조범들하고 엮여 있다는 사실이 그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검사장 승진에 실패하면 곧바로 옷을 벗고 나가 정계로 진출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려면 현직 여당 실세 국회의원인 한대길의 요구를 묵살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수사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담당 검사인 조명근을 불러올린 것인데, 이 자식이 생각보다 능글능글해서 무작정 윽박지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수사 중지해. 정 계속하고 싶으면 형사 6부로 넘기든가.”
강일환의 말에 조명근이 대놓고 난색을 표시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차장님한테 직접 지시받고 시작한 수사인데 제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 그러시면 차장님께서 직접 저희 차장님에게 이야기를 하시면 어떨까요? 그래야 저도 처신하기가 편합니다. 사정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그 뒤로도 강일환이 계속 몰아붙였지만 조명근은 그때부터 계속 자신의 직속상관인 전시헌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다. 결국 강일환은 몇 마디 협박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그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강일환의 방을 나서서 문을 닫는 순간, 조명근의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잘 한다. 차장 검사라는 새끼가 국회의원하고 짝짜꿍이 되어서 범죄자들을 옹호해? 나라 꼴 참 잘 돌아간다.”
그는 이번 수사를 조금 더 신속히 진행시키기로 했다. 강일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가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 당분간은 그럼 또 매일 야근이겠네. 내가 이러다 장가도 가기 전에 과로사 하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