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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37화 (137/300)

137화

화랑 전체가 어수선해지면서 도윤은 오히려 할 일이 없어졌다. 매일 같이 들어오던 감정 의뢰는 눈에 띄게 뜸해졌고, 추진 중이던 전시 기획도 당분간 중지됐다. 유일한 팀원인 석훈마저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쫓아내느라 툭 하면 자리를 비워야 했다. 덕분에 그는 아침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텅 빈 사무실을 혼자 지키다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은 달아오른 도가니처럼 뜨거웠지만 당분간 조용히 있으라는 아버지의 엄명 때문에 함부로 설치고 다니기도 어려웠다. 도윤은 일단 사태를 예의 주시하되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다가 꼭 확인해야 될 사실들이 있을 때만 외출했다. 그런 예외를 제외하면 적어도 업무 시간 중에는 늘 화랑을 지킨 것이다.

그 대신 회사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 3층의 수장고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곳에 소장된 작품들을 살피는 한편,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 발견했던 ‘문숙공 행장’과 그 안에 끼워져 있던 ‘살신보효(殺身報?)’라는 글씨의 정체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연구를 시작하자 신숙주와 윤관의 관계는 금세 드러났다. 그는 의외로 윤관의 후예와 친인척의 관계로 깊게 엮여 있었다.

신숙주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글과 글씨를 배우다가 나중에 윤회의 문하로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윤회는 아마 총명한 신숙주를 무척 아꼈던 모양이다.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윤회의 아들인 윤경연은 나중에 영의정부사를 지냈는데, 신숙주는 바로 그의 딸과 결혼했다.

처음에는 스승이었다가 나중에는 신숙주의 처 할아버지가 된 윤회는 윤관의 8대 손이었다. 고려 말에 태어난 그는 태종 때 과거에 급제해서 정도전이 편찬을 시작했던 고려사의 기록을 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신숙주 역시 세종 말년에 고려사를 간략하게 편집한 ‘고려사절요’의 편찬에 관여했다. 그가 원래부터 고려사에 조예가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와 함께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 중에 윤기견이라는 사람이 있다. 윤관의 10대 손인 그는 첫째 부인이 돌아간 뒤에 신숙주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 둘 사이에서 나온 딸이 바로 폐비 윤 씨다. 후궁으로 입궐했다가 성종에게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결국에는 임금의 얼굴을 할퀴었다가 폐서인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신숙주가 윤관의 행장을 쓴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부인과 스승의 조상인데다 고려사에 관심이 깊었으니까. 게다가 문장력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기도 했고.”

어쩌면 스승인 윤회나 동료이자 사촌 매제인 윤기견의 부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행장 안에서 나온 ‘살신보효(殺身報?)’라는 글씨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신숙주와 관련된 자료를 아무리 뒤져도 비슷한 구절조차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도윤은 이것이 혹시 윤관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윤관에 관한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살신보효(殺身報?)’라는 글귀를 발견한 곳은 ‘고려사’였다. 고려사는 총 139권 75책으로 구성된 역사서였는데, 그 가운데 열전(列傳)은 모두 50권으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방대했다. 그 가운데 ‘윤관 열전’이 있었던 것이다.

윤관은 생전에 여진을 토벌한 것으로 이름이 높은 장군이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는 그가 두 차례에 걸쳐 여진을 토벌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1차 여진 정벌 때 고려군은 뜻밖의 패배를 당한다. 이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렸던 윤관을 구한 하급관리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코리언 소드마스터’로도 불리는 척준경이다.

1차 여진정벌 때 적장의 목을 베는 등 큰 공을 세운 척준경은 어찌된 일인지 그 뒤에 상을 받기는커녕 옥에 갇힌다. 사서에는 그 이유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이때 그를 감옥에서 꺼내 다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 바로 윤관이었다.

1107년의 2차 여진 정벌 때, 당시 별무반을 이끌던 윤관은 지금의 함흥 인근에 위치한 석성에 웅크린 채 거세게 저항하는 여진족으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윤관은 척준경을 불러 이관진 장군과 함께 성을 함락시킬 것을 명했다. 이때 척준경이 했던 말이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일찍이 장주 지역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공께서 저를 뛰어난 용사라고 하면서 조정에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니, 오늘이야말로 제가 몸을 희생하여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고려사를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며 읽던 도윤은 이 대목에서 탄성을 토해냈다.

“이거, 혹시……?”

그는 신숙주가 쓴 ‘문숙공 행장’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다. 거기에는 ‘몸을 희생하여 은혜를 갚는다(殺身報?)’는 네 글자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고려사에 나와 있는 것과 똑같은 글귀인데다 보통 ‘效’라고 쓰는 글자를 속자인 ‘?’로 쓴 것까지 동일했다.

“이건 분명히 붓글씨에 익숙한 문관들이 쓴 글은 아니야.”

‘살신보효(殺身報?)’라는 네 글자는 필선이 고르지 못하고 획도 일정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백이 넘쳐흐르기는 했지만 평소에 붓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도윤은 이 글을 쓴 사람이 어쩌면 척준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처지가 어려웠던 척준경으로서는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준 윤관에게 각오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때문에 써서 바친 글씨일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윤관이 척준경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 글씨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척준경에게 ‘너를 아들로 대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로 대하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인 윤회가 태종 때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글귀를 열전에 직접 적어 넣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글씨에 담긴 능력이 척준경이 남긴 것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도윤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석훈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뭐하세요? 회사 안에 있으면 같이 점심 먹으러 갑시다.”

전화를 끊고 잠시 책상 위에 놓인 글씨를 쳐다보던 그는 ‘문숙공 행장’을 집어 들었다. 글씨가 쓰인 종이도 다시 접어 책갈피에 끼워 넣었다. 그동안은 계속 비밀 수장고에서만 연구를 진행했는데, 오늘은 마음을 바꿔 책을 들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 종이가 정말로 척준경의 능력을 담고 있다면, 그 능력의 주인을 찾고 싶었다.

* * *

‘어째 예감이 그렇더라니.’

화랑 근처의 식당에서 석훈과 함께 점심을 먹던 도윤은 심사가 복잡했다. 그의 옆자리 빈 의자 위에는 커다란 서류철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서류는 없고 대신 비밀 수장고에서 가지고 나온 ‘문숙공 행장’을 안에 껴놓은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와 맞은편에 앉은 석훈에게 흘러드는 게 보였던 것이다. 녀석이 유물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척준경은 비록 무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다지 현명한 인간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 윤관이 죽은 뒤에 이자겸의 편에 서서 함께 난을 일으켰던 것을 보면 상관이나 동료를 고르는 안목이 그다지 뛰어났다고 하기도 어렵고.’

석훈의 실력이 비록 척준경에게 비할 수는 없겠지만 녀석도 몸을 쓰는 능력이 뛰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성격이나 성향 역시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람이 은근히 가벼워보인다든가, 한번 눈이 돌아가면 보이는 게 없는 사람처럼 날뛰는 기질까지. 근데 척준경도 설마 걸핏하면 비아냥대는 습관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형. 나한테 뭐 불만 있어요?”

도윤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석훈이 숟가락을 멈추더니 불쑥 물었다.

“불만? 너한테? 당연히 많지. 하지만 당장은 없는데?”

“근데 왜 아까부터 밥은 안 먹고 제 얼굴만 힐끗힐끗 쳐다보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피식피식 웃으면서.”

“내가 웃었다고?”

“몰랐어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나왔나 보네.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에요. 불만이 있으면 솔직히 얘기해 봐요. 그렇게 사람 얼굴 빤히 쳐다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지 말고.”

실소를 속으로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밖으로 새어나왔나 보다. 아무튼 저 녀석 앞에서는 이상하게 긴장이 풀어진다니까.

“석훈아.”

도윤이 갑자기 목소리를 착 낮춰서 자신을 부르자 석훈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에이, 왜 또 목소리를 깔고 그래요? 형이 그러면 늘 골치 아픈 일이 생기던데……. 왜요?”

이 자식이. 도윤은 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풀었다. 때린다고 저 놈이 맞겠냐?

“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내가 유물의 능력을 그 주인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한 거 말이야.”

“당연히 기억하죠. 형도 그걸로 치료의 능력을 받았다면서요? 라스푸친의 목걸이인가 뭔가 하는 것한테서. 그래서 한샘이도 치료해줄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 그런데 내가 얼마 전에 주인이 있는 유물을 하나 더 찾았다.”

살짝 눈을 크게 떴던 석훈이 손가락을 탁 튕기며 활짝 웃었다.

“잘 됐네요. 그러고 보니까 형도 올해 들어서는 아직 유물의 주인을 한 명도 찾지 못했잖아요? 그거 일 년에 한 명씩은 찾아서 능력을 전해줘야 한다면서요?”

“맞아. 아직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하지만 그래도 슬슬 긴장해야 할 때가 되긴 했지.”

“어떤 건데요, 그 유물이? 그리고 혹시 유물의 주인도 찾았어요?”

도윤은 말없이 의자 위에 놓아두었던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서 ‘문숙공 행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책갈피 안에서 다시 문제의 글자가 쓰인 종이를 빼서 펼쳐보였다.

“그게 뭐에요?”

석훈이 종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한자라고는 아주 기초적인 것밖에 모르는 녀석은 거기 쓰인 글씨를 전혀 읽지 못했다.

“살신보효라고 몸을 희생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야. 고려 시대에 척준경이라고 알지? 무력이 대단했던 장수 말이야.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 양반이 직접 쓴 글씨인 것 같아.”

도윤의 입에서 척준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석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눈을 왕방울 만하게 뜨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척준경? 고려시대의 장수 척준경 말이에요?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 가을 추수하듯 적장들의 목을 베고 홀로 수만의 여진 군대를 멈추게 한 그 척준경? 코리안 소드마스터…….”

“진정해. 그리고 무슨 수로 혼자 수만을 멈추게 해? 아무튼 고려시대의 그 척준경 맞아.”

“우와, 대박! 이 종이가 정말 척준경이 남긴 유물이 맞는다면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아주 로또를 맞은 거네요? 이 종이에 담긴 능력을 전해 받기만 하면 척준경처럼 막 힘이 세지고 성벽을 훌훌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거 아니에요?”

“홍길동이냐? 성벽을 훌훌 뛰어넘게? 그리고 남들이 보니까 얼른 자리에 앉아.”

도윤의 재촉을 받고 다시 앉기는 했지만, 석훈은 척준경의 능력이 담긴 유물이라는 말을 듣자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긴 워낙 몸싸움을 좋아하는 녀석이니 윤관은 몰라도 척준경이라는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도윤은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아직 확실한 건 없어. 여기에 척준경의 능력이 담겼는지, 아니면 그 뒤로 이 종이를 가지고 있던 다른 누군가의 능력이 담겼는지 모른다는 얘기야. 그걸 알려면 먼저 유물의 주인이 능력을 전해 받아야 돼. 그래야 능력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거야.”

“갑시다. 얼른 가서 그 유물의 주인을 찾아야죠.”

도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그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냐? 그는 엉덩이를 들썩이는 석훈에게 팔을 뻗어 억지로 녀석을 주저앉혔다.

“주인 찾으러 다닐 필요 없어. 이미 찾았으니까.”

“벌써 찾았다고요? 누군데요, 그 행운아가?”

“너.”

“네?”

“너라고. 네가 바로 이 종이의 주인이야. 축하한다, 행운아.”

석훈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도윤은 군대에서 석훈을 만난 뒤로 지금까지 녀석이 그렇게 귀신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허옇게 말라붙는 걸 처음 봤다.

* * *

그날 저녁, 도윤과 석훈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두 사람은 다른 때보다 이른 저녁을 먹자마자 곧바로 석훈의 방으로 향했다. 도윤은 먼저 석훈을 침대 위에 눕게 했다.

“이거 몸이 막 경련을 일으키거나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죠?”

석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도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프면 능력을 받지 않으려고? 그럼 관두던가. 찾아보면 어딘가 주인이 또 있겠지.”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알았으니까 그냥 해주세요.”

“아프지는 않은데 능력을 받고 나면 하룻밤 정도는 꼼짝없이 정신을 잃을 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정신을 잃고 있는 시간이 길수록 받은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

“그럼 한 일주일 꼼짝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으면 아주 좋은 거겠네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넌 분명히 그 전에 배고프다며 깨어날 테니까.”

도윤은 뭔가 더 떠들려는 녀석의 입을 손으로 막고 침대 옆에 ‘살신보효’라고 쓰인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석훈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윤은 한 손으로 종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녀석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정신을 집중시켰다. 잠시 후, 종이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도윤의 몸을 타고 흐르다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종이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빛이 모두 사라질 무렵, 석훈의 몸이 한 차례 꿈틀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의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근데 원래도 잘 싸우던 놈이 척준경의 능력까지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요즘 세상에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를 일은 없을 테니까 종합 격투기 선수로라도 나서야 하는 건가?”

아무리 척준경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바탕으로 전장을 누비는 건 곤란하다. 고려 시대와는 달리 현대전에서는 누구나 총알 한 방이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은 종이에 깃든 능력이 사실은 척준경과는 무관할 가능성도 있었다.

석훈이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 늦게였다. 그래도 반나절 이상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단 녀석이 받은 능력이 허접한 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어, 이거 확실히 몸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요? 기운이 불끈불끈 솟는 것 같아요.”

석훈은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오더니 양쪽 팔로 번갈아 알통을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도윤은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기운이야 원래부터 불끈불끈 솟아나던 놈이었고, 배에 새겨진 복근 역시 늘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공연히 힘자랑을 하듯 몸 여기저기에 힘을 주어보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어? 가만 있자. 형, 능력을 받은 사람은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받은 능력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능력을 개발하도록 유도되는 거야. 안 그러면 평생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고 살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근데 이거 느낌이 조금 황당하기는 한데……. 설마 내가 미친 건 아니겠지?”

녀석은 계속 혼잣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주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도윤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주방에서 식칼을 하나 뽑아들더니 자신의 팔을 쓱 그었다.

“야, 인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깜짝 놀란 도윤이 말리려고 뛰어가는데 석훈이 다시 한 번 자기 팔을 칼로 그었다. 아까보다 훨씬 힘이 들어간 행동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팔은 멀쩡했다. 황당한 광경을 목격한 도윤이 저도 모르게 주춤하는 사이, 녀석은 작심한 듯 이를 악물면서 몇 차례나 팔과 다리를 그어대더니 나중에는 칼끝을 세워 배 여기저기를 찔러대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자살을 하려고 환장한 놈 같은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석훈의 몸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다만 칼에 찔린 자리가 약간 불그스름해졌을 뿐이다. 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석훈 역시 놀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형. 나 아무래도 아이언맨이 된 것 같아요.”

도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괴력의 헐크보다는 단단한 아이언맨이 맞는 표현인 것 같기는 했다. 도윤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척준경이 그걸 믿고 그렇게 전장에서 날뛰었던 거였어?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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