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오셨습니까?”
안진휘 검찰 총장이 강당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박상하 지검장이 달려 나가 그를 맞이했다. 안 총장이 박상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이곳에서 검사들만을 위한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고 들었네. 내가 평소에도 미술관을 자주 들락거린다는 거 알지? 덕분에 모처럼 진귀한 작품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들렀어. 혹시 내가 와서 불편한 건 아닌가?”
박상하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솔직히 일반적인 전시회는 아니잖아? 감정가들끼리 피 튀기는 설전을 벌일 예정이라며? 미안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할 것 같아. 특별히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해. 나는 그림 구경만 하다가 돌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당 중앙의 좌석으로 가다가 서로를 쳐다보며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사실 검찰총장이 미술관 관람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지 그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한 건 아니었다. 며칠 전 지검장이 남 모르게 전화를 걸어 그에게 참석을 부탁했고, 안진휘 총장이 그것을 흔쾌히 승낙한 것이었다.
총장과 지검장이 나란히 자리에 착석하자 검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그들이 공개 검증을 준비하기 위해 단상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안진휘 총장이 옆에 앉은 지검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검찰 전시회라니…, 자네나 나한테는 조금 독특한 퇴임 선물이 되겠군.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갈 곳은 정해뒀나? 자네 정도면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을 텐데?”
“아직 마음을 결정한 곳은 없습니다. 청파 갤러리에서 고문 변호사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더군요. 한대길 의원은 정치에 뜻이 없느냐고 묻고요. 특이한 사건을 맡는 바람에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를 않나, 말년에 분에 넘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총장이 소리를 죽여 가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부럽군. 난 청와대에 찍혀서 그런지 전화기가 잠잠해. 퇴임하면 내 이름으로 로펌을 차려야 할 판이야. 여차하면 그냥 연금으로 먹고 살아야겠어.”
“사람들이 전직 검찰총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정권이 바뀌면 잠잠하던 전화통에 불이 날 겁니다. 당분간 강제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여튼 의리 없는 친구라니까. 죽어도 같이 낚시나 다니자는 얘기는 안 해요. 쯧쯧.”
두 사람이 진담이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예정에도 없었던 검찰 총장의 참석으로 인해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강일환과 전시헌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총장까지 참석한 자리다. 오늘 공개 감정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빌어먹을. 이래서는 나중에 재검을 하자고 우길 수도 없잖아?’
강일환은 속으로 이를 갈며 자신이 내세운 감정가를 쳐다봤다. 한성 옥션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며 추천한 황덕원이라는 대학 교수였다. 하지만 실상은 체면이나 양심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성 옥션의 입장을 지지해줄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전시헌 차장이 내세운 감정가는 당연히 도윤이었고, 그밖에도 단상 바로 앞에 세 명의 감정가가 책상을 놓고 나란히 앉았다. 박상하 지검장과 다른 두 차장 검사들이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다들 미술계에서는 이름이 쟁쟁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어설프게 인선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 수사에서 압수된 작품들에 대한 공개 검증을 진행하겠습니다. 이 검증은 검찰 내부에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검사들이나 미리 참석을 허락받은 분들이 아니면 모두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사회라기보다는 검증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마이크를 잡은 검사 한 명이 장내 정리를 요구했다. 나갈 사람이 모두 강당을 빠져나가자 곧바로 감정이 시작되었다. 도윤은 속으로 자그맣게 속삭였다. 쇼 타임!
* * *
검증의 시작은 도윤부터였다. 그는 한성 옥션에서 압수한 열세 점의 그림 가운데 비단 채색화 한 점을 먼저 단상 위에 내걸었다. 강당 뒤편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대형 모니터에는 그가 내건 그림의 영상이 떠올랐다.
“이 그림은 정선의 ‘설평기려’입니다다. 보시다시피 하얀 눈밭에 서 있는 당나귀를 그린 비단 채색화지요. 한성 옥션에서는 이 그림을 진작이라고 우겨서 무려 3억 2천만 원에 낙찰시켰습니다. 낙찰 받은 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아쉽게도 이 그림은 위작입니다.”
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내가 조용했다. 도윤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선은 이 그림을 그려 이병연이라는 사람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점을 더 그려 본인이 소장했지요. 문제는 정선이 가지고 있던 ‘설평기려’가 오래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십 년 전에 갑자기 한성 옥션 경매장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도윤이 리모콘을 클릭하자 모니터의 그림이 크게 확대됐다. 그는 기다란 금속 막대를 이용해 그림 여기저기를 짚으며 세부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길 보십시오. 위작자가 낡은 비단을 쓰고 먹도 오래된 것을 구해서 그리기는 했지만 사물을 묘사한 필선의 필력과 먹의 농담 처리가 정선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아마 원작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 베껴 그린 모작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원작은 이병연이 소장하고 있던 ‘설평기려’를 의미합니다.”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한성 측에서 내세운 감정가 황덕원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 말은 틀렸어요. 저 그림은 진작이 분명합니다. ‘설평기려’는 방금 이도윤 박사가 말한 대로 이병연이 선물로 받은 것과 정선이 소장하고 있던 두 점이 존재했었지요. 덕분에 진위를 판가름하기가 한결 쉽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채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더니 또 다른 금속 막대를 꺼내들었다. 도윤을 힐끗 쳐다보는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매달렸다.
“그림 왼쪽 위에 쓰인 제화시(題畵詩)를 보십시오. 이건 본래 이병연이 자신이 선물로 받은 그림에 직접 써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선이 그 시를 마음에 들어 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품에도 같은 글귀를 써 넣었죠. 그 사실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저 그림에 쓰인 제화시는 현존하는 이병연의 소장품과 내용이 같지만 글씨가 다릅니다. 당연합니다. 정선의 필체이니까요.”
황덕원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다. 그는 다른 작품에 쓰인 정선의 글씨를 계속해서 모니터에 띄우면서 그 글씨들과 ‘설평기려’의 글씨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설명을 듣던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바위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양심 없는 소리를 할까?
눈앞의 ‘설평기려’에 쓰인 글씨는 확실히 정선의 다른 작품에서 발견되는 필체와 유사했다. 하지만 진짜 전문가가 본다면 두 그림의 필체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오늘 두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설득해야 할 대상이 서예가가 아니라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검사들이라는 점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에는 저 글씨들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저 양반 대학교수라고 했지? 아무래도 많이 해 본 솜씨 같은데? 하지만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릴 판정단은 검사가 아니라 전문가들이라는 점을 감안했어야지.’
모니터 앞에서 한 차례 강의를 마친 황덕원이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다시 도윤이 나섰다. 그는 모니터에 다른 사진을 띄웠다. 단상에 내걸린 ‘설평기려’와 흡사하지만 어딘지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건 과거 이병연이 소장했던 그림입니다. 지금은 지방의 한 대학 박물관에서 가지고 있죠. 한성 옥션에서 낙찰 시킨 ‘설평기려’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선이 소장했던 작품이 아니라 박물관에 있는 이병연의 그림을 모사한 겁니다.”
도윤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실내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양쪽 그림의 당나귀를 비교해보십시오. 단상에 내걸린 그림의 당나귀 다리가 모니터에 있는 것보다 미묘하게 짧다는 걸 느끼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실제로 두 당나귀의 다리는 약 5밀리미터 가량 길이가 다릅니다.”
그의 말에 강당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눈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도윤이 리모콘을 클릭해서 모니터의 사진을 바꿨다. 이번에는 화면이 반으로 분할되어 각각 두 그림의 당나귀 다리를 확대시킨 사진을 비춰주었다.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다리 부분만 집중적으로 확대시키자 확실히 한쪽의 당나귀 다리가 다른 쪽보다 약간 짧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윤이 금속 막대로 모니터를 탁탁 쳐서 웅성대는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진본 위에 종이를 대고 모본을 만들 때 가끔씩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무리 문진을 올려놓아도 작업을 하다보면 밑그림이 살짝 움직이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걸 모르고 그대로 따라 그릴 경우 보시는 것처럼 밑그림의 일부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림처럼 당나귀의 오른쪽 앞다리가 몸체에 더 바짝 붙게 되는 거지요.”
설명을 듣던 황덕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원래 다른 그림이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윤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한성 옥션에서 판 그림의 당나귀 다리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는 점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 뒤로도 도윤과 황덕원 사이에 몇 차례 더 공방이 오고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윤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흘렀고, 반대로 황덕원의 얼굴 위로는 진땀이 흘렀다.
“이제 설명은 충분히 들은 것 같으니 그만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은데?”
박상하 지검장이 판정을 내리기를 요구하자 마이크가 단상 앞에 나란히 앉은 세 명의 판정위원들에게 넘어갔다. 그들 가운데 한국 서화를 전공한 감정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로서는 모본을 그릴 때 발생한 실수 때문에 당나귀 다리가 짧아졌다는 이도윤 박사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따금씩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단상 위에 있는 ‘설평기려’의 글씨는 정선의 그것과 약간 다릅니다. 솔직히 말하면 문인 화가답지 않은 필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저 그림이 위작이라고 봅니다.”
다른 두 감정가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결국 황덕원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오늘 감정가들과 판정단이 내린 결론은 나중에 기소를 할 경우 법정에 그대로 증거로서 제출되어야 할 거야. 담당 검사들은 그 점을 명심하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감정가 분들에게 꼭 사인이 된 소견서를 받도록.”
쐐기를 박는 듯한 박상하 지검장의 말 때문에 강일환 차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가 이를 악무는 모습을 본 황덕연이 창백한 표정으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현소 화랑에서 압수한 작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단상 위에 올렸다. 그의 주장은 해당 그림이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도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늘 공개 감정의 핵심은 현소 화랑의 소장품이 위작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것이 불법적으로 매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야 했다. 황덕원은 초점을 잘못 잡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나한테 지고 나니까 열이 받은 모양이네.’
도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황덕원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단상의 그림이 위작이라는 것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장승업의 ‘묘작(猫雀)’, 즉 ‘고양이와 참새’라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장승업의 그림이 아니에요. 그의 화풍을 그럴 듯하게 흉내 내기는 했지만 ‘기운생동’이라는 장승업 특유의 기법이 확연히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남의 그림에 누군가 장승업의 낙관을 찍어서 그의 그림인 것처럼 위조했지요. 이 작품은 위작입니다.”
판정 위원들의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눈앞의 그림은 확실히 장승업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미묘하게 미흡한 점이 있었다. 나름 훌륭한 솜씨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장승업의 낙관이 없었더라면 그 자체로 약간이나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까지 들었다.
그때, 도윤이 한창 설명을 이어나가던 황덕원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저걸 누가 장승업의 그림이라고 했습니까? 검찰에서 저희 화랑에서 작품을 압수해갈 때 분명히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걸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현소에서는 저 그림을 장승업이 아니라 그의 제자인 안중식의 작품으로 분류했습니다. 왜 저희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시는 거죠?”
그 말에 황덕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뜻밖의 말에 판정위원들은 물론이고 실내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윤이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계속했다.
“구한말에 장승업의 작품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그림 값이 마구 올라갔지요. 그래서 일부 화상들이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수정해서 장승업의 작품이라고 속여 파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런 걸 보통 ‘추작’이라고 하는데 기존 화가의 진작을 다른 화가의 작품인 것처럼 속이는 행위죠. 하지만 저희 현소에서는 작품의 원작자를 밝혀내서 그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판정단 가운데 한 명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럼 현소에서는 저 작품을 처음부터 장승업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네. 우리 화랑에서는 이 그림을 안중식의 진작으로 판정했습니다.”
그제야 다급하게 자료를 확인한 형사 6부 검사들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들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박상하 지검장과 안진휘 검찰 총장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상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히 그림 감정은 감정가에게만 맡겨놓고 검사들은 다른 쪽을 파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수사 결과는 서로 공유해야지,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어떡하자는 거야?’
판정단은 판정단 대로 혀를 찼다.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안중식은 무명 화가가 아니다.
장승업의 제자인 그는 젊은 시절 스승의 작품을 흉내 내서 많은 습작을 그렸다. 나이가 든 이후에는 스승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지만, 자세히 보면 젊은 시절의 그림에도 후기의 독창적인 그림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이미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다.
‘장승업의 그림을 팔아먹으려는 화상들에게는 안중식의 젊은 시절 그림이 위조하기에 딱 좋은 재료였겠지. 장승업의 낙관은 종류가 워낙 많으니까 그 가운데 하나를 적당히 위조하면 어설픈 고객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과거의 그 못된 화상들이 지금에 와서는 황덕원이라는 대학교수마저 속아 넘긴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판정단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황덕원이 연달아 궁지에 몰리는 가운데에도 공개 감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이 단상에 올라올 때마다 황덕원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나중에는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기운 것이다.
“이건 김창석 화백의 작품일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백색의 마법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흰색을 즐겨 사용했다는 건 아시죠? 그런데 김 화백은 평생 실버 화이트만 썼습니다. 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쓰면 인체에 유독한 물감이죠. 하지만 워낙 순백의 성질이 강하고 햇빛에 노출되어도 변색이 되거나 갈라지는 현상이 없어서 일부 화가들은 그걸 고집했죠. 그런데 이 그림에 쓰인 물감은 실버 화이트가 아니라 티타늄 화이트입니다.”
보고 있던 검찰 총장이 기어코 혀를 찼다.
“이 공개 감정의 주 목적이 원래 진위를 가리는 거였나? 내가 알기로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현소에서 가져온 작품들 가운데 장물이나 밀수품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강일환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