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강일환이 재빨리 검사 한 명을 불러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지시를 받은 검사가 자기 쪽 감정가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의 이야기를 전하자 황덕원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대신 다른 감정가 한 명이 사람들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도자기를 주로 감정하는 문일호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선 것은 다음에 보여드릴 작품이 바로 꽃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림과 도자기는 분야가 매우 달라서 부득이하게 황 교수님을 대신해서 제가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판정관들의 시선이 전시헌과 도윤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상대방의 허락을 받은 문일호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그때까지 잠자코 보고만 있던 검찰총장이 갑자기 중간에 끼어들었다.
“저쪽에서는 도자기 전문가를 내세웠는데 전 차장은 사람을 바꾸지 않을 건가? 난 이도윤 박사가 서양화 전문가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화까지 척척 설명을 해서 솔직히 놀랐어. 하지만 도자기라면 아무래도 다른 감정가가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전시헌 차장이 의사를 묻는 눈빛으로 객석에 앉아 있는 이세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미소만 지었고, 대신 도윤이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총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거론되는 작품들은 어차피 모두 저희 현소 화랑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화랑 소장품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으니 그냥 제가 계속 대답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혀를 차거나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미술품이라고해도 엄연히 분야가 다른데 아직 젊은 도윤이 너무 자신감을 앞세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세준의 얼굴은 태연했고, 그 점은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검찰 총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단상 위에 도자기가 한 점 올라왔다. 전체적으로 은은한 옥색이 감도는 가운데 표면에 매화나무가 양각되어 있는 꽃병이었는데, 그 색이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애매한 색깔이라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문일호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도자기는 매화문병이라고 하는 화병입니다. 색깔이 고려청자에 비해 조금 옅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사실 이 화병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 중국 경덕진에서 제작된 도자기지요. 원나라 초기의 작품입니다. 당시에는 경덕진에서 청자와 백자의 중간색을 띤 도자기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화병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죠.”
그는 황덕원에 비해 훨씬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보고 계신 도자기가 어떻게 현소 화랑으로 흘러들어갔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소유주가 누구였는지는 알지요. 이 화병은 원래 전 오성그룹 총재였던 이원태 회장님의 애장품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분이 화병을 손에 넣은 것은 이십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이듬해 도난당하고 말았어요. 돌아가시기 이년 전의 일입니다.”
장내가 한 차례 크게 출렁였다. 이원태 회장이 도난당했다는 그 도자기가 지금 사람들의 눈앞에 버젓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판정관들의 눈이 도윤에게 잠시 향했다가 다시금 객석에 앉아 있는 이세윤과 서연희에게서 멈췄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장내에 불길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문일호가 모니터에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오래 전의 것으로 보이는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이었다.
“이 화병은 예술적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귀한 골동품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도 이 정도의 명품은 쉽게 구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이십년 전 처음 도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지금 보시는 것처럼 신문에 보도가 됐습니다. 그때 기사에 실렸던 사진을 지금 단상에 놓인 실물 화병과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따라 사진과 실물을 비교해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 디지털 기술의 한계 때문인지 모니터 속의 사진은 해상도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사진 속의 도자기가 눈앞의 실물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슬쩍 미소를 지은 문일호가 리모컨을 클릭하자 다시 여러 가지 수치가 적힌 표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이십년 전, 이원태 회장님은 매화문병을 얻고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수집가답게 감정도 철저히 했죠. 기와나 도자기처럼 불에 구워 만든 기물의 경우에는 보통 열발광분석법을 이용해서 연대를 확인합니다. 보시는 표는 당시 서울 공대에서 이 도자기에 대해 실시한 열발광분석법의 결과입니다.”
표에는 여러 가지 전문적인 수치와 그에 대한 해석 결과가 나열되어 있었다. 문일호는 그 가운데 몇몇 수치와 문구에 미리 색을 칠해 놨다. 1300년에서 1360년 사이. 중국 원나라 중기. 도자기의 제작 연대와 시대를 나타내는 항목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문일호가 선언하듯 결론을 내렸다.
“저희는 이번에 현소 화랑에서 압수된 미술품들을 감정하면서 단상 위의 매화문병에 대해서도 열발광분석법을 이용해서 연대를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이십년 전 이원태 회장님이 자신의 화병에서 얻었던 측정값과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이 도자기는 과거 이원태 회장님이 도난당했던 바로 그 매화문병입니다.”
말을 마친 문일호가 어떠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도윤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과거의 신문 기사까지 찾아내서 이용하다니. 솔직히 문일호는 생각보다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면 안 되지.
그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원나라 때 귀족이나 왕실에 납품되는 도자기들은 모두 중국 강서성의 경덕진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뛰어난 매화문병이라면 그 외의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경덕진에서는 좋은 흙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기록에 따르면 춘추전국 시대 이전부터 도자기 산지로 유명했거든요.”
도윤은 문일호를 힐끗 쳐다봤다가 얘기를 이어나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자기 위조범들이 가장 활개를 치는 곳 역시 바로 경덕진이라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도자기 위조에 필요한 재료들이 아주 풍부하거든요.”
그는 모니터에 사진을 하나 띄웠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옆으로 깨어진 도자기 파편이 바닥 가득히 깔려있는 풍경을 찍은 것이었다.
“도공들이 가마에서 완성된 도자기들을 꺼낸 뒤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깨버린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사진에 보이는 장소가 바로 그렇게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를 검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경덕진은 이런 일을 무려 이천년 전부터 해왔어요. 그 때문에 지금도 땅을 파편 과거의 도자기 파편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윤이 씩 웃었다.
“그 오래된 도자기 파편들이 바로 위조범들의 재료가 됩니다. 그들은 땅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들을 잘 갈아서 분말로 만든 다음에 물과 섞어서 새로운 도자기를 빚습니다. 그걸 구운 다음에 열발광측정을 하면 연대가 아주 오래전의 것으로 나오거든요. 저는 이원태 회장님이 매입했던 도자기가 바로 그런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문일호가 발끈하며 나섰다.
“그런 식의 위조가 가능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조지폐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돈이 가짜인 건 아니죠. 이도윤 박사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과거 이원태 회장님이 가지고 있던 매화문병이 가짜였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쓸 데 없이 도자기의 연대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할 게 아니라. 입증할 수 있습니까?”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 보세…, 뭐, 뭐라고요?”
문일호는 설마 도윤이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이원태 회장이 소유했던 매화문병은 무려 19년 전에 도난당했다. 눈앞에 있는 화병은 진짜가 틀림없으니 도윤이 19년 전의 매화문병이 가짜라는 걸 입증하려면 그걸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오래전에 사라진 도자기가 가짜라는 걸 이제 와서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윤이 객석에 앉아 있는 이세준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 자리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꺼내서 열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커다란 사진첩과 USB 하나를 새로 꺼냈다. 어제 저녁에 이세준이 적절한 때에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니 챙겨가라고 준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경우를 대비했는지 알 수가 없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컴퓨터에 USB를 꽂았다. 그런 뒤 사진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판정관들이 앉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과거 이원태 회장님이 매화문병을 구입하기 불과 일 년 전에 그 화병이 사실은 현소 화랑, 정확히는 예전 저희 할아버지 집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같이 사진을 보시죠.”
도윤은 컴퓨터에 꽂힌 USB에서 사진을 하나 찾아서 모니터에 띄웠다. 판정관들에게 준 사진을 디지털 화면으로 스캔한 것이었다.
모니터의 사진 속에서는 두 사람의 노인이 낮은 상을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입은 옷으로 볼 때 늦은 봄에 찍은 것 같았는데, 모니터에 사진이 뜨자마자 갑자기 객석에서 헉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한성 옥셔의 사장인 성진아가 저도 모르게 내지른 소리였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도윤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신 사진 속에서 왼쪽에 앉은 분이 바로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입니다. 그 반대편의 분은 한성 옥션의 창립자이자 저기 앉아계신 성진아 사장님의 선친이신 성택진 전 사장님이죠. 여러분이 주의 깊게 보셔야 할 것은 저희 할아버지 어깨 뒤로 보이는 방안 풍경입니다.”
도윤이 그 말과 함께 화면의 일부를 확대시켰다. 그러자 그의 할아버지 어깨 뒤로 화병이 놓여 있는 문갑이 보였다. 화면을 확대시키느라 화질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화병의 색과 겉에 새겨진 매화나무 문양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저희 아버님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저 화병을 몹시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늘 서재의 문갑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셨죠. 보통은 서재에 손님을 잘 들이지 않으시는데, 성택진 사장님은 가끔씩 들러 차를 마셨습니다. 그 분은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셨는데 저 문갑 위에 놓인 화병 사진도 여러 장 찍으셨지요.”
문일호가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저렇게 흐릿한 사진을 가지고 어떻게 저기 찍힌 화병이 이원태 회장님이 구입했던 바로 그 매화문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사진을 찍은 시기 역시 마찬가지예요. 저 사진이 이원태 회장님이 매화문병을 구입하기 이전에 찍은 게 확실합니까?”
도윤이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저 사진의 해상도가 적어도 문일호 위원께서 조금 전에 보여주셨던 신문 기사의 사진보다는 좋을 거예요. 필름 카메라로 찍은 거거든요. 그런데도 저걸로는 화병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시면 문일호 위원께서 증거로 내세웠던 기사의 사진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거죠?”
문일호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을 본 도윤이 빠르게 주장을 이어나갔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이원태 회장님이 매화문병을 구입한 지 일 년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회장님이 그걸 다시 도난당했던 바로 그해 겨울이었죠. 그리고 돌아기시기 몇 달 전부터 병으로 계속 누워계셨기 때문에 저렇게 서재에 앉아서 손님과 차를 마실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저 화병은 할아버지께서 아직 기력이 있으실 때, 다시 말해 이원태 회장이 누군가로부터 매화문병을 사들이기 이전부터 그분의 서재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도윤은 일부러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객석을 쳐다봤다.
“저 매화문병은 사실 단 한 번도 저희 집이나 현소 화랑 수장고 밖으로 유출된 적이 없습니다. 제 고조부이신 고학 어르신께서 처음 저 화병을 얻은 이후로 계속 저희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궁금합니다. 우리는 팔거나 도난당한 적이 없는 꽃병을 어떻게 돌아가신 이원태 회장님이 구입할 수 있었을까요?”
문일호는 물론이고 자리에 앉아 있던 강일환 차장의 얼굴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도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들의 반응을 살핀 도윤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화병을 팔거나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이원태 회장님은 그걸 샀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누군가가 매화문병을 위조해서 이회장님에게 팔았다는 뜻이지요.”
위기를 느낀 문일호가 곧바로 말꼬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말씀처럼 그 화병이 한 번도 밖으로 유출된 적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그걸 위조했다는 말이죠? 적어도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베끼든 뭐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꽃병을 누군가 똑같이 위조해서 판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요?”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건을 자세히 알고 있고 사진까지 찍은 사람이 우리 가족 외에도 딱 한 명 있죠. 조금 전에 이미 다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실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객석에 앉아 있는 한성 옥션의 성진아 사장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윤을 무섭게 노려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강일환 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화가 치민 목소리로 따졌다.
“저런 사진과 자료가 있으면 왜 우리가 현소를 압수 수색할 때 내놓지 않았습니까? 의도적인 증거물 은닉도 처벌 대상이라는 걸 몰라요?”
도윤이 그를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뭐야, 이 양반은 또?
“영장에는 압수 대상이 현소 화랑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과 재무관련 기록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나요? 저 사진들은 현소 화랑이 아니라 저희 아버지 개인 사진첩에 있던 겁니다. 소장 예술품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재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요. 더구나 화랑이 아니라 저희 집에 있던 겁니다. 그걸 왜 검찰에게 내놓아야 한다는 거죠?”
강일환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이곳이 검찰 조사실이라면 윽박지르기라도 할 텐데 객석에는 지검장과 검찰총장까지 앉아 있었다.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강일환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본 도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모두 다 말씀드리죠. 저 사진이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는 매화문병을 이제 막 지은 현소 화랑 건물 지하 수장고에 가져다 놓으셨어요. 나중에 화병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성택진 사장님이 자꾸 캐묻기에 실수해서 깨져버렸다고 둘러대셨다더군요. 그런데 그 이듬해 이원태 회장님이 원나라 때의 매화문병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나돌기에 깜짝 놀라셨어요.”
더 이상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도윤은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원태 회장님이 가짜를 구입하신 것 같다면 계속 고민하셨어요. 결국 병석에 눕기 얼마 전에 이 회장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셨죠. 그 뒤로 갑자기 문제의 매화문병이 도난당했다는 기사가 떴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이 회장님이 체면 때문에 그걸 깨버렸을 거라고 짐작하셨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짐작이기는 하지만요.”
상대를 베기 위해 휘두른 칼에 자신이 죽을 때의 기분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객석에 앉아 있던 성진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시선이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이세진에게 꽂혔다. 당신이지? 이 함정을 판 놈이? 그녀가 하도 주먹을 꽉 쥐는 바람에 손가락이 아프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