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리넘은 노크를 한 뒤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서재의 문을 열었다. 다니엘 로스차일드는 늘 보던 대로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채 자신의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제야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던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드디어 건릉 내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어왔나?”
“네. 사흘 전에 건릉 발굴단이 묘실 안으로 진입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다니엘의 눈에 잠시 생기가 돌아왔다.
“석가모니의 사리는? 혹시 그게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없어?”
“그게, 저…….”
그리넘이 말을 흐리자 다니엘이 살짝 구부리고 있던 등을 곧게 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발굴단이 사흘 전에 묘실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지? 그런데 왜 이제야 보고가 온 거야? 딩샤는 지금까지 뭘 하느라고 연락이 늦었대?”
그리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딩샤는 죽었습니다.”
순간 다니엘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벌떡 일어섰다.
“딩샤가 죽었다고? 언제? 어떻게?”
“건릉 내부를 조사하던 도중에 함정에 빠져서 사망한 모양입니다. 그게…….”
그리넘은 착잡한 목소리로 전후 경과를 설명했다. 딩샤의 죽음과 관련된 그의 보고 내용은 도윤이 탕가오위안 단장에게 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거기에 그녀의 시체를 화장하고 옆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팔각금잔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설명을 모두 듣고 난 다니엘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딩샤 그 빌어먹을 년이 실패했다는 거지? 무후의 묘실에 있던 불상의 뱃속이 텅 비었다는 건 누군가 안에 있던 사리를 빼돌렸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발굴단이 무후의 묘실을 조사했을 때 이미 불상의 뱃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가 확인했기 때문에 누군가 몰래 빼돌렸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이넬이 주먹으로 자신의 책상을 꽝 내리쳤다.
“멍청하긴! 가능성이 왜 없어? 처음에 딩샤하고 이도윤이라는 놈이 묘실에 함께 들어갔었다면서? 그런데 딩샤는 죽고 이도윤은 살아나왔잖아? 그런 뒤에 불상 속의 사리가 없어졌다면 범인은 뻔한 거 아냐? 당연히 이도윤이 딩샤를 죽이고 사리를 가져갔겠지.”
과연 그랬을까? 그리넘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이도윤이 나쁜 놈이라고 해도 물건을 얻기 위해 사람까지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건릉 안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잔뜩 들어차 있다. 그런데 이도윤이 그 가운데서 유독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만 쏙 빼갔다고?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게다가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도윤과 안석훈은 묘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철저한 몸수색을 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몸에서는 묘실 안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이도윤이 정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훔쳤다면 그게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가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다니엘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지금 팔각금잔은 어디 있나? 딩샤가 가지고 갔던 것 말이야.”
“발굴단에서 자체적으로 복원하기에는 손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서안 박물관에 맡겼답니다. 그곳에서 한창 복원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서 찾아와.”
“네?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가서 찾아와.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건 엄청나게 귀중한 물건이야.”
“알겠습니다.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그리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침입해서 복원 중인 유물을 훔쳐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걸 마치 비어있는 옆집에 들어가 냉장고를 터는 일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다니엘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독이 잔뜩 오른 그에게 다른 얘기를 했다가는 당장 난리가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돌려나가려고 하는데 다니엘이 또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이도윤 말이야. 그 자식은 지금 어디 있지?”
“아직 발굴단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눈치로 봐서는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올해를 넘기지는 못할 겁니다.”
“그놈을 조사해. 분명히 놈이 사리를 가지고 있을 거야. 어떡하든지 그걸 찾아. 놈을 납치해서 손발을 다 잘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사리를 찾아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넘이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제야 다니엘이 그만 나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는 그리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지난 번 테러를 당한 이후로 그의 상사는 점점 모시기 어려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 *
도윤이 예전에 중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사람이 북적대는 관광지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여행이나 관광을 다니는 내국인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그 때문에 웬만한 곳에 가면 관광지가 아닌 관광객들을 구경하다 돌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오랜만에 찾은 백마사 역시 사정이 비슷했다.
“일찍 오길 잘 했네. 한 시간만 늦었으면 정찰은 고사하고 구경도 제대로 못할 뻔 했다.”
점차 늘어나는 인파를 보며 도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석훈과 함께 낙양 시내의 호텔에 숙소를 잡은 뒤, 차를 렌트해서 아침 일찍 근교에 위치한 백마사를 찾았다. 겉으로는 한가하게 경내를 구경하는 관광객인 척 했지만 애초에 그가 귀국까지 미뤄가면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근데 정말 하실 거예요?”
석훈이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야지. 건릉에 얼마나 많은 유물이 묻혀 있었는지 너도 봤지? 그런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고도 고작 발굴단 참여 수당하고 보너스만 받고 돌아가는 건 아깝잖아?”
“건릉 발굴에 참가한 건 상해 비밀 경매에서 금동불상을 양보 받는 대가로 한 약속 때문이었잖아요? 아깝긴 뭐가 아깝다는 거예요?”
“그건 그거고 이건 또 이거지. 그리고 저 밑에 뭐가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어쩌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 근데 너는 측천무후가 뭘 남겨놨는지 정말 안 궁금해?”
“궁금하죠. 하지만 저도 명색이 보안 요원 출신이잖아요?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유적지에 몰래 숨어들어가려니까 영 찜찜해요.”
두 사람이 아침부터 벌써 몇 시간 째 주변을 살피고 있는 대상은 오래된 우물이었다. 원래는 절에 식수를 공급하려고 판 것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소원을 이루어주는 우물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더 유명해진 장소. 바로 ‘허원정(許願井)’이었다. 그런 이름이 붙은 지 벌써 천 년이나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몇몇 관광객들은 여전히 우물을 찾아 소원을 빌곤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더 이상 허원정을 관찰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미 주변의 건물과 지형을 모두 살피고 사진까지 충분히 찍어둔 터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백마사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인근의 식당을 향해 차를 몰던 석훈이 은근히 물었다.
“무후가 쓴 ‘허원’이라는 글자가 정말 백마사의 허원정을 가리키는 걸까요?‘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지야.”
“백마사가 측천무후와 관계가 있는 건 확실하고요?”
“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나라 이름을 주(周)로 바꿨어. 그리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지. 백마사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아직까지 건재한 절이야. 무후는 불교를 숭상했었기 때문에 황제에 즉위한 뒤에도 낙양 근교의 백마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어.”
“다 좋은데, 무후가 정말 우물 밑에 뭔가를 숨기기는 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형이 생각하기에는 뭘 숨겼을 거 같아요?”
“글쎄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새로운 인생을 사는데 꼭 필요한 거였겠지. 우리의 짐작이 맞는다면 무후는 젊어진 새 몸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됐을 테니까.”
무후에게 가장 익숙한 곳은 황궁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른 몸이었다. 그런데 새삼스레 새파랗게 젊어진 모습으로 나타나 ‘내가 바로 황제의 어미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 아닌가?
그녀는 자기 힘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 년 전의 당나라는 여자 혼자서 뭔가를 이룩하기는 지극히 힘든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무후는 과연 자신을 위해 어떤 물건을 우물 밑에 숨겨놓았을까?
* * *
도윤과 석훈은 미리 사서 차에 싣고 왔던 스쿠터 한 대를 꺼내 백마사 근처의 숲속에 감춰두었다. 그걸 싣기 위해 일부러 트렁크가 큼직한 해치백 스타일의 SUV를 렌트해서 타고 왔다. 그런 뒤에 일부러 낙양 시에 잡아둔 호텔까지 돌아가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백마사가 문을 닫기 두 시간 전, 두 사람은 렌트한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워둔 채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호텔은 이미 체크아웃을 했고, 차는 렌트카 회사에서 호텔 주차장에서 와서 직접 와서 회수하기로 했다.
그들은 일상복 차림으로 캐리어를 끌며 호텔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걸어 나온 뒤 거기서 택시를 탔다. 택시는 잠시 시내를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낙양 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북경까지 가는 첫 번째 고속 기차표를 끊고 미리 짐을 코인 라커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에야 스포츠 백 하나만을 든 채 다시 택시를 타고 백마사로 향했다.
백마사 근처에서 택시를 내린 두 사람은 그제야 입장권을 끊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에 미리 봐두었던 경내 화장실에 들어가 그곳에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시간이 되어 관람객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미리 준비했던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굴에도 눈과 입 주위에만 구멍이 뚫린 복면을 뒤집어썼다.
“근데, 형. 우리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호텔에서 그렇게까지 몰래 빠져나올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기차표는 왜 끊었어요? 어차피 타고 갈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영락없이 좀도둑 같은 이 옷차림은 또 뭐고요?”
석훈이 나지막하게 투덜대는 소리를 들은 도윤이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서안을 떠나기 전에 숙소가 두 번이나 털렸던 거 기억 못해?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릴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해. 어쩌면 낙양까지 쫓아왔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주변을 살폈지만 미행당한다는 느낌은 없었잖아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우리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미행에 능숙한 놈일지도 모르니까. 일단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만이라도 최대한 조심하자.”
도윤과 석훈은 각각 라스푸친과 척준경의 능력을 얻은 뒤로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눈과 귀가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적어도 중국 땅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좋다는 게 도윤의 생각이었다.
그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 건 서안에서 두 번이나 방과 짐을 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두 번째 도둑은 가방은 물론이고 옷장 안에 있던 옷들과 침대 시트까지 칼로 조각을 냈을 정도로 철저하게 뒤졌다. 기가 막힌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귀중품이나 여권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찾으려고 했던 거야.’
일단 의심이 가는 놈은 런던의 다니엘 로스차일드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왕이푸 회장이나 탕가오위안 발굴 단장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 역시 사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 서로 다른 두 일당이 각자 한 번씩 침입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범인이 누구든 도윤으로서는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낙양으로 올 때도 기차와 버스, 택시 등을 갈아타면서 행선지를 복잡하게 꼬아놓았다. 그 때문에 서안을 떠나 그다지 멀지도 않은 낙양까지 오는데 무려 이틀이나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자니 사실 도윤도 심신이 피곤할 수박에 없었다.
관광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빠져나와 허원정으로 다가갔다. 도윤이 도르래가 달린 쇠갈고리를 우물 가장자리에 걸고 밑으로 내려가자, 석훈은 근처의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 거기서 누가 다가오는지 감시하다가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면 곧바로 휴대폰 진동을 이용해 신호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허원정은 보통의 옛날 우물들처럼 땅을 파고 구멍 안쪽에 자연석을 쌓아올려 벽을 만든 형태였다. 도윤은 줄에 매달린 상태에서 그 돌들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그는 처음부터 무후가 뭔가를 숨긴 장소가 바닥이 아니라 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모두 말랐다지만 천 년 전에는 분명히 물이 차 있었을 거야. 그때 물건을 숨겼다면 밑바닥이었을 리가 없지. 그랬다가는 다시 파낼 때도 잠수를 했어야 됐을 테니까.’
숨기는 건 남을 시킬 수 있다고 쳐도 그걸 다시 꺼내는 건 무후가 직접 해야 한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녀가 굳이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물속에 잠긴 무언가를 꺼내려 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라면 우물 벽을 이루고 있는 돌멩이를 하나 꺼내고 그 안을 파서 물건을 숨겼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꺼내기도 쉬울 테니까. 다만 시간이 워낙 오래 흘렀으니까 천 년 전에는 느슨했던 돌멩이도 이미 단단히 굳어졌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
도윤은 우물 벽의 돌멩이들 틈을 일일이 칼로 쑤셔가면서 세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움직이는 돌멩이는 점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밤중에 몇 시간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작업을 하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석훈이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숨을 죽인 채 우물 벽에 바짝 붙어 있어야 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고층 건물 유리창 닦이를 해도 되겠군.’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었다. 피곤한 건 둘째 치고 밧줄에 걸린 어깨와 등, 허벅지 등이 참을 수 없이 저리고 아파왔다.
‘오늘은 포기하고 내일 다시 와서 그냥 우물 바닥을 파야 하나?’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돌멩이 하나가 칼의 힘을 받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가 칼을 지렛대로 삼아 세게 잡아당기자 돌멩이가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작은 손전등으로 돌이 빠진 안쪽을 비추는데 거무튀튀한 색깔의 상자 하나가 흙에 파묻힌 채로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저거다!’
도윤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두 손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끝에 나무로 만든 게 분명한 네모난 상자가 잡혔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자 나무로 만들고 밀랍으로 틈새를 메운 상자가 딸려 나왔다. 나무는 워낙 오래되어 힘을 주면 부서질 것처럼 약했지만 그래도 칠을 잘해 놓은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자를 꺼낸 도윤은 그것을 열어 안을 살폈다. 짐작했던 대로 옥과 보석으로 만든 여러 가지 장신구들과 금붙이가 잔뜩 들어있었다. 무후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기 위해 마련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욱 더 그의 눈을 끈 게 하나 있었다. 기름종이로 싸여 있는 그것은 검은색의 깃털로 만든 사람 얼굴만 한 부채였다.
“이건…….”
도윤은 그 부채에서 선명한 붉은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천 년의 세월을 이겨낸 끝에 여전히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부채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곧바로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이 부채의 주인이라고?”
그의 입이 저도 모르게 떡 벌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