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간단하게 서로 인사만 하고 자리를 뜰 줄 알았던 손창현은 계속 도윤의 곁에 머물면서 말을 걸었다. 도윤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사람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조금 의아했다. 그때 손창현이 문득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이 박사를 심사위원으로 모셔달라고 강력하게 건의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혹시 바쁘신데 공연히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한테는 영광스러운 기회죠. 그런데 왜 저를 추천하셨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손창현이 희미하게 웃더니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이름을 꺼냈다.
“오윤수와 장은서라는 화가를 아시죠? 지금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 말입니다.”
“윤수하고 은서를 아십니까?”
도윤이 놀래서 되묻자 손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안다고 하기는 어렵고 잠깐 인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연말에 일 때문에 뉴욕에 들렀다가 우연히 젊은 무명화가들의 합동 전시회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두 분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지닌 분들이더군요.”
“아, 거길 가보셨습니까? 신진 화가들이 자체적으로 기획한 파티 같은 것이어서 별다른 광고나 홍보도 없었을 텐데요? 어떻게 알고 가셨습니까?”
심지어 도윤도 오윤수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그의 SNS를 통해 전시 작품을 확인하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조그만 전시회를 손창현이 직접 찾아갔었다는 게 신기했다.
“저도 정말 우연히 구경하게 된 전시회였습니다. 외부인은 신진 화가들을 찾아다니는 미술 중개상이나 저같이 한가하게 시내 구경을 다니던 운 좋은 관광객 정도가 전부이더군요. 그런데 전혀 기대 하지도 않았던 한국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셨군요. 직접 보니까 어떻던가요? 그 친구들 그림말입니다.”
손창현이 망설임 없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치켜 올렸다.
“천재들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몇 년 만 더 뉴욕에서 경험을 쌓으면 충분히 세계적인 화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보셨습니까? 제 생각에는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오윤수 씨는 동양화적 테크닉을 활용하면서도 인류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줄 알더군요. 젊은 나이인데도 이미 확실한 자기 세계를 구축했어요. 장은서 씨의 그림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과연 사람의 머리로 이런 구도와 색상을 구현해낸다는 게 가능할까 싶더군요. 지금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과 기회뿐입니다.”
도윤으로서는 절로 마음이 흐뭇해지는 평가였다. 지난번에 콜롬비아로 갈 때 잠시 뉴욕에 들러서 두 사람의 그림을 직접 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인터넷으로 보내온 사진만으로 그간의 작업 결과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낯선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들에 대한 칭찬을 들으니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본 손창현이 씩 웃었다.
“사실은 전시회에서 두 분의 그림을 보자마자 즉석에서 구입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이미 몇 년 동안 현소 화랑과 독점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군요. 무척 아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천재 화가들을 일찍부터 알아본 이 박사에 대해 크게 흥미가 일었습니다.”
“별 말씀을. 저야말로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두 사람을 발견한 것뿐입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운이 좋은 사람은 오윤수 씨와 장은서 씨였을 것 같습니다.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보석을 발견해내는 건 운이 아니라 안목이지요.”
“과찬이십니다.”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도 종종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야 전기 회사에서 일하는 아마추어 애호가에 불과하지만 마침 아내가 아리움 미술관을 맡고 있거든요. 서로 좋은 인연을 맺을 기회가 자주 있기를 바랍니다.”
아리움 미술관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앗다. 그러나 적어도 손창현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첫눈에 오윤수와 장은서의 재능을 알아볼 정도라면 이 사람도 단순한 아마추어 애호가의 수준을 뛰어넘는 안목을 지닌 게 분명해.’
도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손창현을 쳐다봤다. 단순히 후원 기업의 임원 자격으로 심사위원 자리를 맡았는 줄 알았는데 느낌 상 그건 아닌 것 같았다.
* * *
“이도윤을 놓쳤다고?”
다니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분출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용암 같은 분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숙소와 행선지를 계속 바꾸면서 추적을 따돌리는 바람에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간신히 꼬리를 잡았을 때는 이미 서울에 도착한 뒤였습니다.”
“그럼 서울까지 쫓아가서 놈을 잡아오면 되잖아?”
“한국은 무기를 반입하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녀석을 납치해서 진신 사리를 어떻게 했는지 털어놓게 하려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장소도 마련해야 하고요. 제대로 준비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작해야 미술사 박사에 불과하잖아? 무슨 국가 요인도 아닌데 왜 무기까지 필요해? 녀석을 고문할 곳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까 일단 서울로 출발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서울로 가겠습니다.”
그리넘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때 다니엘이 그의 등 뒤에 경고하듯 말을 뱉었다.
“그나마 서안에서 팔각금잔을 회수했으니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거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난 자네한테 정말로 실망하게 될 거야.”
그리넘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렸다.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요.”
그리넘은 서재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뒤에서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 * *
전체 출품작들 가운데 보조 심사위원들의 예심을 거쳐 본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2점이었다. 본심 첫날, 도윤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서 다시 스무 점을 골라냈다. 일곱 점은 대상을 비롯한 금상, 은상, 동상 등의 본상 수상 대상이었고, 나머지 열세 점은 입선과 가작으로 선정될 예정이었다.
“스무 명이나 상을 받는다면 수상작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도윤의 얘기에 손창현이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줄인 겁니다.”
“스무 점이 최소한이라고요?”
“네. 처음에는 입선과 가작까지 합해서 수상작이 모두 열두 점에 불과했거든요. 그러다 작년에는 그게 열다섯 점으로 늘었고, 올해는 다시 스무 점까지 확대된 겁니다. 동상까지는 수상자 수가 첫 해와 똑같지만 몇 년 사이에 입선과 가작이 대폭 늘었죠.”
“장학금 혜택은 동상까지만 주어지지 않습니까? 입선과 가작을 더 늘려봤자 상장 몇 장 더 주는 것에 불과한데 구태여 그걸 늘려서 생색을 낼 필요가 있습니까?”
“저희야 상장만 몇 장 더 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수상자들은 입장이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어떻게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 있는 학생 미술 대회가 아닙니까? 여기서 수상하면 대학에 진학할 때 가산점을 받거든요. 입시 스펙이 되는 거죠. 그래서 입선과 가작이라도 좋으니까 가능하면 수상자를 늘려달라는 압력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이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한 명에게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준다. 금상에게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은상 두 명에게는 1학년 때까지 등록금을 지원하고 동상 세 명은 입학 등록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손창현의 말에 의하면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내도 좋으니까 수상자로 뽑아주기만을 바라는 학부모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창의성 있는 작품보다는 미술 학원에게 가르치는 입시 실기용 그림들이 대거 출품되고 있습니다. 대회의 취지에 맞지 않는 작품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탈락시킬 수도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손창현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왜요? 이 대회가 입학 시험장은 아니잖습니까?”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난리가 나거든요.”
“객관성이요? 예술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미술이든 음악이든, 그것이 입시와 연관되면 언제나 객관성이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술 대회나 음악 콩쿠르도 가능하면 오지선다로 진행되길 바랄 거예요.”
도윤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중적인 것이 모두 예술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모든 예술이 다 대중적이지도 않다. 낯선 작품에서 독창적인 예술성을 감지해내는 사람들이 바로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전문적 주관성을 신뢰하지 않으면 새로운 예술은 발전할 수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그저 일반화된 익숙함에 불과하다. 그런데 고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작품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익숙해지기도 한다.
‘이 대회도 결국 오래가지는 못하겠군.’
객관적 잣대를 들이대는 대회에서는 더 이상 창의적 예술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
스무 점의 수상작들을 선정하는 데까지는 심사위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었다. 어차피 심사는 현직 화가와 대학 교수들이 주도했고, 도윤을 비롯한 나머지 다섯 명은 그들의 의견에 크게 토를 달지 않았다.
‘한 점을 빼면 나머지는 다들 고만고만해. 게다가 그 한 점마저 어딘지 좀 어색하고.’
심지어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두 명의 국회의원은 심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정작 대상부터 동상까지의 본상 수상작을 뽑아야 하는 순간이 되자 뒤늦게 나타난 그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2306번 ‘아침 시장’은 스킬이 참 좋네요. 하지만 뭐라고 할까, 가슴에 팍 와 닿는 게 없어요. 그보다는 378번 ‘조깅하는 사람들’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본상을 수상할 정도가 되려면 역시 보는 사람에게 느낌을 주는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차라리 3107번 ‘여명’을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어떨까요? 학생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깊이 있는 철학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역시 대상은 저런 작품이 받아야죠.”
“대상이요? 동상 정도라면 몰라도 대상은 무리입니다. 대상은 누가 뭐래도 76번 ‘가을 운동장’이지요. 고등학생 그림에 무슨 철학입니까? 아직 학생들이니까 기술적인 완성도나 어쭙잖은 철학보다는 역시 아이디어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혹시라도 심사에 인맥이나 선입견이 개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작품에는 출품자의 이름 대신 번호와 제목만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미 몇몇 작품은 누가 그렸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도윤은 한 발 뒤로 물러나서 그들이 하는 말을 지켜보다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얼굴이 안 좋아 보입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봤는지 손창현이 다가와 물었다.
“아닙니다. 막상 대상을 정하려고 하니까 선뜻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워서요. 그런데 다른 분들이 너무 확신에 차계시니까 뭐라고 말을 하기가 어렵네요.”
“아무래 몇 분들은 저 작품들을 누가 그렸는지 알고 있는 것 같죠?”
“손 전무님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화가도 아닌 분들이 선뜻 대상 후보작을 추천할 때는 아무래도 확고한 기준이 있는 거겠죠. 그 기준이 예술성이나 독창성과는 무관한 것 같지만.”
이 양반도 은근히 반골 기질이 있네? 이러면 대기업 임원으로 버티기 어렵지 않나? 도윤은 그냥 씁쓸히 웃었다. 그때 손창현이 지금까지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던 작품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4273번 ‘숭례문 야경’ 말입니다. 저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도윤은 그가 하필이면 4273번 작품을 가리키는 바람에 내심 움찔했다. 잘 그리기는 했지만 어딘가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4273번 ‘숭례문 야경’은 풍경화였다. 모양으로 봐서는 분명히 숭례문을 그린 것 같은데 주변에 사람이나 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밤거리에 숭례문 하나만 빛을 받아 허공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터치는 붓이 아니라 나무토막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를 긁어댄 것처럼 거칠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 간유리를 대고 찍은 흑백사진처럼 화면이 군데군데 부옇게 번져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다른 그림들과 차별되는 독창성을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도윤은 어딘지 모르게 저 그림이 완성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운 작품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그림을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 군데군데 다른 사람이 덧칠을 한 것처럼 일관성을 잃어버렸어요. 아마 심사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뒤늦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도윤의 말에 손창현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입시 실기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말이지요?”
“네. 그래서 어색합니다. 마치 화강암을 일부러 반들반들하게 갈아놓은 것 같아요.”
“그런 건 호텔 로비 바닥에는 깔 수 있지만 정원석으로는 불합격이죠.”
“그렇습니다. 하하하.”
도윤은 의외로 손창현과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손창현이 갑자기 으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어느 작품이 더 나은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다른 심사위원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제 생각에는 4273번 ‘숭례문 야경’을 대상으로 선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스무 점들 중에서는 가장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실내가 잠시 고요해졌다. 도윤은 갑작스러운 손창현의 추천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이 양반 정말 엉뚱한 면이 있네?
지금까지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다른 심사위원들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던 심사위원장이 손창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달대학교 미대 교수인 주승엽이었다.
“그 작품이 상당히 독창적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뭐랄까, 작품 전체의 완성도가 좀 부족하지 않습니까?”
주승엽의 말에 손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대회는 고등학생들을 위한 대회입니다. 완성도보다는 독창성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 물론 이건 아마추어로서의 견해일 뿐입니다. 그냥 참고만 해 주십시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씩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명색이 대회의 실질적인 후원 기업을 대표로 해서 나온 사람이 꺼낸 의견이었다. 그로 인해 회의실에 지금까지와는 성격이 다른 논쟁이 다시금 불붙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