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도윤이 중국에 있는 동안 검찰총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이 새로운 인물로 바뀌었다. 특수부의 전시헌 차장 역시 대전지방 검찰청의 검사장으로 승진해서 자리를 옮겼고, 조명근은 평검사에서 한 등급 승진해 부부장 검사가 되었다. 서울중앙지검장에서 물러난 박상하는 약속대로 청파 갤러리의 고문 변호사가 되어 출근을 시작했다.
검찰은 그리넘 일당의 납치 사건을 언론에 브리핑하는 과정에서 도윤의 이름을 뺐다. 윤다솔 과장과 조명근이 내부에서 힘을 많이 써준 덕분이었다. 여전히 검찰 내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박상하 전직 지검장도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주었다.
그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어느 날, 도윤은 최서라와 함께 모처럼 서울 근교에서 주말 데이트를 즐겼다. 두 사람은 얼음이 두껍게 언 강변의 고즈넉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근교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커피가 나왔을 때, 최서라가 문득 납치 사건을 다시 입에 올렸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영국 사람들 말이에요. 다시 또 납치를 시도하지 않을까요?”
도윤은 들었던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에이,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놈들 모두 감옥에 있는데 무슨 수로 다시 시도를 해?”
“여덟 명 모두 전직 특수부대 출신이라면서요? 박상하 변호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정도 인원이 고작 사람 한 명 납치하려고 입국했다면 적어도 돈을 노린 건 아닐 거래요.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대개 다른 일당이 더 있기 마련이라고 하셨어요.”
박상하 변호사로부터 뭔가 언질을 받았구나. 도윤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다른 일당이 더 있다면 놈들이 무슨 국제 범죄 조직이라도 된다는 거야? 박 변호사님이 나한테 뭔가 물어보라고 하셨어?”
“아뇨. 하지만 전 걱정이 돼요. 다니엘 로스차일드는 집요한 노인네예요. 그 사람은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알고 있구나! 도윤은 더 이상 적당히 상황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 변호사님이 그러신 거야? 이번 일의 배후에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있다고?”
“그 분도 도와주셨지만 그보다는 미래 그룹의 자체 정보망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에요.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크리스티에서 파베르제의 달걀을 사갔던 사람 맞죠? 도대체 그 사람이 왜 도윤 씨를 노리는 거예요?”
도윤은 새삼 재벌 그룹의 정보력에 감탄했다. 미래 그룹은 검찰로부터 이번 일의 주동자, 그리넘 피티의 여권 사본을 비롯한 신상 정보를 넘겨받았다. 그걸 바탕으로 그리넘의 행적을 추적해서 그가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일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물론 미래 그룹의 정보 팀을 움직이게 한 건 다름 아닌 최서라일 것이다.
도윤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최서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알지?”
“특별한 능력 어떤 거요? 뭐든지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말이에요? 아니면 어떤 미술품도 완벽하게 진위를 가려내는 능력? 그것도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도윤 씨의 치료 능력을 말하는 건가요?”
“나한테 치료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할아버지를 고치셨잖아요. 설마 도윤 씨가 안마 몇 번 했더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믿는 줄 아셨어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 궁금했을 텐데?”
“묻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도윤 씨가 직접 얘기해줄 거라 믿고 기다렸죠. 솔직히 쉽게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했고요.”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막상 말을 꺼내려니 새삼 지금까지 숨겨왔던 게 미안했다.
“라스푸친의 목걸이라는 게 있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물건이었지. 내가 파베르제의 달걀 안에서 그걸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면서 문제가 시작됐어.”
도윤은 최서라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파베르제의 달걀로부터 라스푸친의 목걸이, 파라켈수스의 검과 건릉에서 사라진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신이 유물에 숨겨진 능력을 주인에게 전해줄 수 있는 링커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이로써 그가 링커임을 아는 사람이 안석훈에 이어 두 명으로 늘었다.
그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최서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요?”
도윤은 옆 자리에 환각 능력을 잠시 사용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최서라가 깜짝 놀라는 사이 원숭이는 안석훈으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다니엘 로스차일드 바뀌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지고 다시 텅 빈 의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최서라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정말이네요.”
“정말이야.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솔직히 말하기가 쉽지 않았어.”
최서라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진정을 하고 냉정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도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미 얻은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방법은 없는 거죠?”
최서라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몰라.”
“그럼 다니엘 로스차일드는 앞으로도 계속 도윤 씨를 노리겠네요? 라스푸친의 목걸이에 담긴 능력을 이미 도윤 씨가 가졌다면서요? 게다가 그 사람이 건릉에 있다는 진신 사리가 천 년 전에 사라졌다는 걸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아요.”
“내 생각도 비슷해. 그러니까 이번에도 부하들을 보냈을 테고.”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니엘 로스차일드를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갑작스러운 최서라의 말에 도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냥 둘 수 없다니? 쓸 데 없는 생각하지 마. 그 노인네는 위험한 인간이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서라는 가만히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도윤 씨 일이 곧 제 일이에요. 저도 나름대로 알아볼 테니까 그 사람에게 대항할 방법을 함께 찾아봐요. 적어도 이번 같은 일이 또 다시 벌어지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도윤은 최서라의 눈빛이 그렇게 새파랗게 빛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이 아가씨도 의외로 투지가 장난이 아니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 *
김지윤이 전국 학생 미술 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학교 홈페이지에 그 사실이 올라갔을 때만 해도 오주현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부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림을 포기한 지가 벌써 언젠데……. 그런데 수상 소식이 알려진 며칠 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한 명이 몰래 다가와서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기, 이 얘기를 할까 말까 한참 망설였는데, 그래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지윤이가 상 받은 그림말이야. 그거 네가 그리다 만 걸 적당히 고쳐서 낸 거야.”
오주현은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자 친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이 참, 너 지난 학기 미술 시간에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다가 담임한테 호출 받았던 거 기억나? 그래서 중간에 교무실에 갔었잖아? 담임하고 얘기하다가 수업 시간 끝나는 바람에 나중에 들렀더니 캔버스가 없어졌었지? 그거 그때 지윤이가 보고 가져갔었어.”
“지윤이가 내 그림을? 왜?”
“왜긴? 당연히 그림이 탐이 나서 그랬겠지. 아무튼 걔가 그걸 완성시켜서 이번 대회에 출품했어. 그래서 동상까지 받은 거고. 덕분에 미대 지원할 때 확실한 스펙이 생겼지, 뭐. 아무튼 내가 그랬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렇게 알고 있어.”
친구는 그 말을 남기고 휭 하니 사라졌다. 오주현은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어차피 미대에 갈 수 없다. 몹시 가고 싶었지만 아빠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이미 입시 미술을 준비하기에는 시기상 너무 늦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교실에 돌아와 앉자 공연히 가슴이 허전했다. 어차피 2월 봄방학을 기다리는 어중간한 시기라 수업 시간에도 영화를 틀어주거나 자습을 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그날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만 쳐다보다 힘없이 교문을 나섰다.
그 주 주말, 오주현은 혼자서 아리움 미술관을 찾아갔다. 그곳 별관에 자신의 그림이, 아니 김지윤이 손을 대서 완성시킨 그림이 걸려 있었다. ‘숭례문 야경’이라고 제목까지 떡 하니 붙어 있었다.
“정말 동상을 받았구나. 대단하네.”
무심코 혼자 중얼거리고 나자 정작 어떤 게 대단한지 알 수가 없었다. 저 그림을 처음 그린 자신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남의 그림에 손을 대서 동상까지 받은 김지윤이 대단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숭례문 야경’이라는 그림 자체가 대단한 걸까.
‘근데 그림이 많이 망가졌네. 남의 그림을 가져갔으면 차라리 손대지 말고 그냥 내지.’
김지윤이 어설프게 손을 대는 바람에 오히려 그림이 어색해졌다. 저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완성해서 제출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 생각을 하자 공연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왈칵 솟구칠 것 같았다. 오주현은 별관에 들어간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은 공부가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주현 학생이죠?”
낯선 사람이, 아니 TV나 인터넷 뉴스를 통해 얼굴과 이름만큼은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이 나타나 갑자기 말을 건 것은 그녀가 미술관을 다녀온 지 보름 쯤 지났을 때였다.
“어, 이도윤 박사님?”
오주현이 깜짝 놀라 내뱉은 말에 오히려 도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설마 고등학생이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저를 아세요?”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오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TV에서 봤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감정가시잖아요.”
또 트루쓰 앤 밸류 얘기로군. 그래도 그게 방송을 탄 지도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용케 얼굴을 알아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지금은 현소 화랑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어요? 그림 때문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그림이요? 어떤 그림이요?”
“그건 일단 어디 앉은 다음에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커피 한 잔 사도 될까요?”
오주현은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그녀를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각자 음료를 한 잔씩 시키고 나서야 그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얼마 전에 열린 전국 학생 미술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습니다. 거기서 ‘숭례문 야경’이라는 작품을 봤어요. 출품자가 김지윤 학생으로 되어 있던데, 그거 사실은 오주현 학생이 그린 거 맞죠?”
오주현은 순간적으로 입 속에 있던 과일 쥬스를 도로 뱉을 뻔 했다. 상대가 설마 그 대회의 심사위원이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그녀는 얼른 쥬스를 삼키며 손을 내저었다.
“쿨룩. 그거 제가 아니라 지윤이가 그런 거 맞아요. 뭔가 오해를 하셨나 봐요.”
이제 와서 그걸 내가 그렸다고 한 들 무슨 소용이겠어? 괜히 잘못하면 말썽만 날 거야. 그녀는 애써 부인했지만 도윤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그거 오주현 학생이 그린 거 맞아요. 학생이 그린 그림에 김지윤 학생이 나중에 손을 대서 수정한 거잖아요. 내 말이 틀려요?”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주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저 멍한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보기만 했다.
“굉장히 좋은 그림이었는데, 나중에 이상하게 손을 대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느낌이 어색해졌어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대상을 줘도 아깝지 않았을 작품인데. 왜 그 좋은 그림을 남에게 줬어요? 본인은 자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거듭된 도윤의 질문에 오주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 거는 아니에요. 그냥 지윤이가 , 아니 제가 잃어버렸어요.”
그렇군. 도윤은 몇 마디 듣지 않고도 일이 어떻게 됐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되도록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주현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와서 사실을 확인해서 수상 결과를 바꾸려고 온 게 아니니까. 그보다는 오지윤 학생에게 관심이 있어서 왔어요. 계속 그림 그릴 거죠? 솜씨도 그렇고 무엇보다 발상이나 감각이 대단하던데.”
“그림이요? 아니에요. 전 그림 안 그려요.”
“왜요? 제가 보기에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그게, 아빠가 반대하셔서…….”
“아빠가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해요? 그냥 공부해서 평범하게 대학 가라고 하세요?”
“네. 어릴 때부터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보면 혼을 내셨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없어요.”
혼을 낸다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도윤은 아빠가 반대한다는 오주현의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부모들 중에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자식이 미술이나 음악을 취미로 하는 건 적극 권장하면서도 막상 그걸 전공한다고 하면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
“글쎄요. 오주현 학생 정도의 재능이면 그냥 썩히기는 너무 아까와요. 비록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 준비하더라도 미대 입학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고. 만약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우리 현소 화랑이 후원해주는 조건이면 어때요? 미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지급할게요. 등록금 전액이면 한 번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어요?”
오주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전부 대준다고? 당장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래도 역시 곤란해요. 아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는요? 엄마도 반대하세요?”
“엄마는……. 엄마는 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어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미안해요. 엄마가 계시지 않은 줄 미처 몰랐네요. 그럼 아빠한테 이 명함을 좀 전해줄래요? 저한테 전화를 달라고 부탁하더라는 말을 전해주세요. 제가 아빠를 만나서 한 번 설득해 볼게요. 아빠만 허락하시면 미대 입시를 위해 공부할 뜻은 있는 거예요?”
오주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정에서 도윤은 충분히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오주현 학생은 확실히 미술에 재능이 있어요. 그건 아무나 타고나는 그런 흔한 재능이 아니에요. 제가 학생의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주제는 못되지만, 그래도 자기 진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고, 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제야 오주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이튿날, 그가 현소 화랑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주현이 아빠입니다. 제 딸에게 미술을 공부하라고 권하셨다죠?”
차갑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상대에 대한 불쾌감과 적의가 뚝뚝 묻어나왔다. 순간 도윤은 오주현의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