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우리 아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남의 자식에게 괜한 바람을 불어넣는 짓은 그만 두시죠. 만약 제 허락 없이 또 다시 주현이에게 접근하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화가 난 게 분명하지만 오주현의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차갑고 냉정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윤은 신호가 끊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딸에게는 접근하지 않으면 되겠네.
그는 컴퓨터를 켜서 석훈이 만들어 준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오주현의 아버지 오광표. 서울 공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물려받은 재산이 적지 않아 집안이 넉넉한 편이고, 현재도 미래 전자에서 연구 이사로 재직 중인 잘 나가는 직장인.’
도윤은 오광표의 직장이 미래 전자라는 항목에서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미래 전자라면 최서라의 아버지인 최병호가 사장으로 있는 미래 그룹의 핵심 기업이었다.
“한두 다리 건너면 죄다 아는 사람이라더니.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무섭네.”
이어지는 내용 역시 부정적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서른두 살에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두었음. 아내와 일찍 사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눈 한 번 팔지 않은 채 묵묵히 홀아비 노릇을 고수하고 있는 건실한 아빠.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최대한 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알려졌음.’
적어도 주변에서 나쁜 아빠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고 산다는 뜻이다. 딱 하나. 딸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대 진학을 결단코 반대한다는 점만 빼고.
“이런 사람이 진짜 설득하기 힘든데…….”
딸에게 무심하거나 사랑이 적은 것은 아니고, 오로지 미술에만 이상할 정도로 강한 혐오감을 드러낸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석훈이 올린 보고서 어디에도 오광표가 그렇게 미술을 싫어하는 이유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도윤은 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훈아. 혹시 돌아가신 오주현 어머니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얘기는 없니?”
“그건 모르겠어요. 벌써 십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기는 어려워요.”
“오광표 집안에 혹시 그림 그리다가 망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형. 저는 경찰이나 국정원 직원이 아니라고요. 그 보고서도 며칠 동안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서 만든 거예요.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으면 형이 흥신소에 직접 의뢰를 해 보세요.”
이 자식 봐라? 그러니까 이게 발로 뛰어서 만든 보고서는 아니라는 거지? 그는 직접 인터넷을 뒤져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검색했다. 다행히 오주현이 나온 중학교는 사립이어서 당시의 선생님들이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거기 미술 선생님 중에 전혜선 선생님이라고 계시죠? 여기 현소 화랑인데요. 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전혜선 선생님하고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전혜선은 오주현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주현이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오광표에게 미술 공부를 시킬 것을 권했던 사람. 도윤은 그녀와 통화를 한 다음에 약속을 하고 학교로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에 몇 통의 전화를 한 뒤 이메일로 파일 여러 개를 전송했다. 그로부터 며칠 사이에 다행히 그가 메일을 보낸 사람들로부터 호의적인 답장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사이 도윤은 국립 현대 미술관을 방문하고 몇 명의 수집가들을 차례로 만났다. 최근에 높아진 그의 명성이 일을 쉽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대강의 준비 작업이 끝났다.
* * *
미래 전자의 반도체 생산 공장과 R&D 연구 센터는 모두 경기도 이천 시에 있다. 청주에도 좀 더 규모가 큰 공장과 연구 센터가 있지만 본사는 이천이었다.
오광표는 입사 이후 줄곧 이천 연구 센터에서 근무했다. 청주로 내려갈 경우 조금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회사의 제의가 몇 번 있었지만 그는 줄곧 이천을 고집했다. 이천에서는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분당까지 출퇴근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주로 내려가면 어쩔 수 없이 딸을 그곳으로 전학시켜야 했다.
남들이 들으면 욕할지 몰라도 그는 청주보다는 분당의 교육 환경이 딸의 대학 진학에 더 유리하다고 확신했다. 승진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딸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불이익은 감수할 만했다. 그렇잖아도 직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제법 멀어서 주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에 늘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데리러 가야 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요즘도 가끔씩 미안했다.
오광표가 회사 주차장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친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을 서두르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광표 이사님이시죠?”
겨울이라 이미 해가 저문 야외 주차장은 그리 환한 편이 아니었다. 오광표는 자신의 차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비교적 나이가 젊은 청년이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보았다.
“누구시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그를 향해 청년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명함을 내밀었다.
“일전에 통화했던 현소 화랑의 이도윤 팀장이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오광표의 얼굴이 와각 구겨졌다. 그는 운전석 문을 벌컥 열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분명히 더 이상 접근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내 말이 그냥 해보는 소리로 들렸습니까?”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전에 말씀하실 때는 따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때 이후로는 따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사님을 찾아온 겁니다.”
“쓸 데 없는 짓을 했군. 난 당신에게 할 말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그가 싸늘한 말을 내뱉고 운전석에 몸을 실으려는 찰나, 도윤의 한 마디가 송곳처럼 그의 등 뒤에 틀어박혔다.
“박은비 화백의 위작 사건 때문입니까?”
오광표는 이미 차 안으로 내밀었던 발을 도로 뺐다. 도윤을 향해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서 거센 분노의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여차 하면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도윤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벌써 이십년도 더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미술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는 일이죠. 박은비 화백의 그림 열여섯 점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져 나온 사건 말입니다.”
“그건 모두 가짜였소. 위작이었단 말입니다.”
오광표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달리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윤이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네 점은 확실히 진작이었어요. 나머지 열두 점은 가짜였지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얘기를……. 아, 그렇군. 우리나라 최고의 감정가라고 했던가? 그 알량한 유명세를 믿고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는 거요?”
“과찬의 말씀을. 직업이 감정가인 건 맞지만 우리나라 최고라는 칭찬은 과분합니다. 그리고 제 말이 믿기 어렵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설명드릴 수도 있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면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광표는 잠시 도윤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차를 가지고 오셨소?”
“네. 가지고 왔습니다.”
“분당 죽전역 근처에 하모니라는 커피숍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시간 뒤에 봅시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서 주차장을 떠났다. 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로써 어쨌든 일단 서로 길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 * *
1997년, 한국이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면서 터진 이른바 IMF 사태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일반인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당시 미술 시장 역시 큰 홍역을 치렀다. 기업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한꺼번에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시장에 나온 작품들 가운데 유난히 박은비 화백의 그림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여섯 점 정도가 한꺼번에 경매에 오르는가 싶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너도 나도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1998년 한 해 동안 공개적인 경매를 통해 거래된 작품의 수만 해도 무려 열여섯 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림 열여섯 점이라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수다. 아무리 다작을 하는 화가라고 하더라도, 소위 대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이 한 해에 열여섯 점이나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은비 화백은 평소 다작을 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활발하게 활동을 할 때도 일 년에 고작 서너 점을 발표하는 게 전부였다.
문제는 작품이 모두 거래되고 난 이듬해인 1999년에 터졌다. 당시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들이 유학 중인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박은비 화백이 몇 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박은비 특별전을 열면서 그녀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시실을 한 바퀴 쓱 둘러본 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 그림이 아니에요. 위작입니다.”
깜짝 놀란 기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들이 위작이냐고 캐물었다. 그러자 박 화백은 잠시 망설이더니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열 점의 제목을 불러주었다. 그러고는 한국에서의 남은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면서 기자들의 추가 취재가 뒤따랐다. 그들은 박 화백이 불러준 작품들을 일일이 확인한 뒤, 그게 모두 IMF 때 시장에 쏟아져 나온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바람에 박 화백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을 포함해서 1998년에 거래된 열여섯 점이 모조리 위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하지만 결국 그 가운데 위작으로 판명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소위 미술계의 중진이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오히려 우리 어머니를 욕해댔지요. 아직 노망 들 나이도 아닌 사람이 벌써부터 자기 작품도 못 알아본다고.”
오광표는 그 얘기를 하면서 치를 떨었다. 당시 그런 식으로 박은비 화백을 비난하는데 가장 앞장 선 곳이 바로 얼마 전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는다고 선언한 한성 옥션이었다. 그들은 박 화백이 오랫동안 지병을 앓은 탓에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제 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건 부모가 오랫동안 공들여 키운 자기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는 얘기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렇게 미술계가 일제히 손을 들어 비난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가슴에 큰 상처가 남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간신히 병이 나아가는 중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어요. 어머니는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머니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오광표였다. 그 충격으로 인해 그는 학위 취득을 일 년이나 뒤로 미루어야 했다.
“전 그때 한국 미술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곳인지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대형 옥션과 전문 감정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가짜를 진짜라고 말하더군요. 대학 교수라는 자가 기자를 만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곳이 바로 미술계라는 말입니다. 제가 귀하게 키운 딸을 그런 쓰레기통에 처박을 것 같습니까?”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오광표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박은비 화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순간 그가 단순히 그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미술계 전반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기를 바랐는데,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니 짐작대로였다.
“IMF 이전에 박은비 화백의 그림을 수집가들에게 팔아치운 곳이 바로 한성 옥션이었습니다. IMF 당시에 그걸 다시 경매에 올린 곳도 마찬가지로 거기였고요. 한성 옥션으로서는 그 그림들이 위작이라는 걸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윤의 말에 오광표가 발끈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어요. 당시 한성옥션의 편을 들어 우리 어머니를 비난한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아십니까? 이름난 감정가와 화가, 대학 교수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서 우리 어머니를 치매 노인 취급했다고요.”
“모두는 아닙니다. 일부였지요. 다만 그 일부만 목소리를 높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박 화백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죄다 한성 옥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당시의 미술계 현실이었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강도질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만 있다면, 그런 동네는 이미 사람 살 곳이 아닙니다. 전 제 딸을 그런 곳에 몸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 옥션은 비록 한시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는 했지만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현재 소송 중인 사건에서 일부라도 유죄를 받으면 아마 꼬리표를 떼고 완전히 회사 청산 수순을 밟아야 할 것이다. 지금 그곳을 비난해봤자 현재 오광표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제가 돌아가신 박 화백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도윤이 조심스럽게 던진 말에 오광표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요? 어떻게 말입니까?”
“여기 오기 전에 몇 명의 미술 관계자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박은비 화백을 위한 특별 회고전을 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오갔지요. 물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지금부터 시작하면 올 상반기 내에는 전시회를 여는 게 가능할 겁니다.”
도윤이 전화를 한 곳은 청파 갤러리와 아리움 갤러리였다. 현재 한국 화랑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의 책임자들과 통화를 한 끝에 일단은 긍정적인 언질을 받았다.
물론 진짜로 전시회를 열려면 그 밖에도 수많은 수집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건 오주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그런다고 그 분의 명예가 회복이 될 거라 보십니까?”
오광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특별전을 하면서 동시에 박 화백의 작품 전체를 담은 도록을 만들 계획이에요. 권위 있는 감정가들을 모아 박 화백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죄다 감정해서 진작으로 판명된 것만 싣는 거죠. 그게 완성되면 앞으로도 박 화백의 작품을 감정하는 기준이 될 겁니다. 그러면 남은 가족들의 한도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요?”
도윤의 말에 오광표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남은 가족들의 한이요? 제 한은 그런다고 풀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눈을 감기 힘들어하셨는지 몰라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에 이어 딸의 가슴에까지 한이 맺히게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오광표가 다시 한 번 발끈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시오! 난 주현이를 나름대로 열심히 키우고 있어요. 걔는 굳이 그림 같은 걸 그리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커다란 태블릿을 하나 꺼냈다. 그는 몇 개의 그림 파일을 띄워 그것을 오광표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모두 주현이가 중학교 때 그린 그림들입니다. 고맙게도 당시의 담임선생님이 버리지 않고 보관하셨더군요. 대가를 어머니로 두신 분이니 그림 보는 안목이 있으실 거예요. 직접 보고 판단하시죠. 이런 그림을 그리는 중학생이 흔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윤의 손가락을 따라 그림 사진이 하나씩 넘어갔다. 그걸 보고 있던 오광표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그의 눈을 주시하면서 사진을 계속 넘겼다. 이건 그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작업의 일부에 불과했다. 진짜 설득은 이제부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