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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69화 (169/300)

169화

“저기, 그러면 나머지 네 점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전부 진짜인가요?”

백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이어진 도윤의 대답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나머지 네 점은 모두 위작입니다.”

그가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도윤이 재차 물었다.

“네 점 모두 명나라 때의 문인 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그림과 글씨를 베끼거나 모방한 것이에요. 잘 그리고 잘 썼지만 진작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도 파실 건가요?”

백담이 시들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팔아야지요. 하지만 가짜라면서요?”

“제법 비싼 가짜들입니다. 작품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 있는 네 점 모두 싸구려는 아니에요. 싼 건 천만 원이 조금 넘을 거고, 이쪽의 ‘영객해우(迎客解憂)’라는 그림은 경매에 올릴 경우 오천만 원까지 나오겠는데요?”

약간 숙여졌던 백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네? 얼마라고요?”

“천만 원에서 오천만 원이요. 네 점을 모두 합하면 1억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예요.”

“1억이라고요? 무슨 가짜가 그렇게 비쌉니까?”

백담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도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짜라고 해서 전부 쓰레기는 아닙니다. 동기창의 그림과 글씨는 워낙 위작이 많은데, 그 중에는 작가 본인이 서명하고 낙관을 찍은 것들이 많아요. 동기창 스스로가 가짜를 만들어 파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욕을 많이 먹습니다. 이 그림과 글씨들도 전부 가짜이기는 하지만 서명과 낙관은 분명히 동기창의 것이에요.”

동기창은 1555년에서 1636년까지 살다 간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다. 그는 과거 대가들의 글씨와 화풍을 철저히 연구해서 그 장점들만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른바 남종화의 완성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최악의 인성을 지닌 최고의 예술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작품의 수준과 삶의 품격이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로도 유명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동기창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글씨와 그림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는 작품을 하나씩 줄 때마다 엄청난 대가를 받았는데, 실상 그가 서명하고 낙관을 찍어준 작품의 대다수가 다른 사람이 만든 가짜였다. 심지어 나중에는 돈 많은 부자들이 처음부터 가짜 그림을 노비의 손에 들려 보내 동기창의 서명을 받아오기까지 했다.

“동기창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술가의 재주와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예술가의 양심이나 영혼 같은 것은 없었지요. 게다가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대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을 터부시 하지 않았어요. 그 자체를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동기창의 위작 가운데는 명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도윤의 설명을 들은 백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 그림을 모두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저한테 지금 파신다면 심주의 진작과 동기창의 위작을 모두 합해 4억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경매에 올리면 최소한 그보다 1억 이상은 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값을 받으려면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서 경매에 올리는 게 낫습니다. 원하시면 저희 화랑에서 수수료를 받고 중국 경매에 올리는 일을 대행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뜻 족자를 팔 듯하던 백담이 갑자기 망설이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결국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족자 다섯 개를 다시 말아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죄송하지만 이걸 파는 건 아무래도 다른 곳을 더 둘러보고 나서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감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석훈이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감정도 공짜로 해줬는데 기껏 얘기를 다 듣고 나서는 다른 데를 더 둘러보겠다고요? 방금 아이가 아파서 병원비가 급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윤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뭘 그래? 아이가 당장 오늘내일하는 게 아닌 이상 조금이라도 더 비싼 가격에 팔고 싶겠지. 그리고 어차피 저 사람은 우리한테 도로 오게 돼 있어.”

“도로 온다고요? 왜요?”

“저 그림들을 제값 받고 팔려면 최소한 조태석 교수님 정도는 찾아가야 할 걸? 웬만한 감정가들은 가치를 알아보기 힘들 테니까. 동기창의 그림은 워낙 진위를 판별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한국에서는 제값을 받기도 어려워. 아마 몇 군데 더 둘러보다 내가 눈이 삔 줄 알고 서둘러 다시 찾아올 거야. 땡잡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형도 처음부터 좀 싸게 부르지 그랬어요? 눈치를 보니까 다섯 점 모두 합해서 천만 원 정도 불렀으면 오히려 당장 팔고 갔을 것 같던데요?”

“그건 거래가 아니라 사기잖아. 나도 솔직히 정직하게만 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업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건 안 돼.”

“그럼 감정료라도 받지 그랬어요? 사기 치지 않고 정당하게.”

“아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잖아? 그림 가격대로 감정료를 받으면 그것만 해도 수백만 원이었을 거야. 그 돈 있는 사람이 장롱 속에 처박아 두었던 족자까지 들고 나왔겠냐?”

“형, 부자가 된 이후로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진 거 같아요.”

“난 원래부터 그랬어. 근데 이 자식이 오늘따라 계속 시비네? 너 조민아 씨한테 얻어터지기라도 했냐? 왜 그래, 자꾸?”

석훈이 공연히 야단을 맞은 사흘 후, 전보다 더욱 초췌해진 백담이 아침 일찍 도윤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품에는 예의 족자를 넣은 가방이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이거…, 전에 사주신다고 해서 다시 들고 왔는데요.”

석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족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물건은 전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지금 파신다면 모두 합해서 3억을 드리겠습니다. 그 가격에 파시겠습니까?”

순간 백담의 얼굴색이 변했다.

“전에는 분명히 4억을 주신다고…….”

“네. 그랬죠. 하지만 그때도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 저한테 파신다면 4억을 주겠다고. 이미 시간이 사흘이나 지났으니 더 이상 ‘지금’이 아니죠. 3억에 파신다면 당장 사겠지만 그 이상을 원하시면 다른 곳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럼 3억 5천만이라도 주십시오.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3억에서 한 푼도 더 못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도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다면 두 번 다시 저희 화랑에 오실 필요가 없어요. 저도 무료 감정까지 해 주고 남 좋은 일만 시킬 정도로 마냥 속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담은 도윤의 얼굴과 테이블 위의 가방을 몇 번이나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는 몹시 갈등되는 표정을 지으며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3억에 팔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서류를 작성하시죠.”

도윤은 즉석에서 족자들에 대한 감정서를 작성하고 매매 서류에 필요한 사항을 기입했다. 백담이 서류에 사인을 하자 지체 없이 그의 계좌로 3억을 송금했다.

“세금부터 먼저 납부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저희 쪽에서도 세무서에 신고를 하기 때문에 그냥 다 쓰시면 나중에 세금 때문에 고생하실 수도 있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은 감사하다고 했지만 백담은 건성으로 인사만 꾸벅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자 도윤이 석훈을 가까이로 불렀다.

“저 양반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지? 어느 병원인지 알아봐.”

“왜요? 설마 그림도 사주고 아들도 치료해 주려고요? 자비천사 나셨네.”

석훈이 툴툴거리자 도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덕분에 나도 2억 이상 이익을 본 셈이잖아. 그 정도 애프터서비스는 해 줘도 돼. 그리고 이것도 모두 인연인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껴서 뭐하겠냐? 무엇보다 내 치료 능력은 자꾸 연습을 해야 더 발전하는 거야.”

다음날 점심시간, 백담의 아들이 입원한 병실에 키 큰 젊은 남자가 몰래 찾아왔다. 아들의 옆을 지키던 엄마가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남자는 그날부터 며칠 동안 엄마가 없을 때를 이용해서 잠깐씩 다녀가고는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백담의 아들은 기적처럼 완쾌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 * *

아리스 온라인과 한성 옥션이 베이징에 세우기로 한 합작 경매 회사가 드디어 문을 열게 되었다. 다만 회사의 이름은 처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 옥션’으로 확정되었다. 한성 옥션이 잠정 폐업을 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왕이푸 회장이 갑자기 난색을 표시하면서 사명 변경을 제안한 것이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중국에도 알려지면서 한성아리스로 등록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정부 관료들이 워낙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요. 그냥 밀어붙이면 개관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양해해 주십시오.”

급하게 중국으로 날아간 한대길의 앞에서 왕이푸는 태연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한대길은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판을 깰 수도 없는 처지였다. 지금으로서는 되도록 빨리 일을 진행시켜서 눈앞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회사 이름은 제가 양보하지요. 하지만 이번에 보내는 물건들은 반드시 경매에 올려주셔야 합니다. 그것마저 반대하면 저도 회사 등록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왕 회장님께서도 처음부터 회사 설립을 다시 추진하셔야 할 겁니다.”

“당연히 올려 드려야지요. 그런데 보내시는 물건은 확실한 겁니까? 불쾌하시겠지만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건이 확실한지는 알아서 그쪽에서 알아서 잘 살펴보시지요. 저희 쪽에서는 이미 감정이 모두 끝난 것들이니까요.”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한대길의 등에 대고 왕이푸는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데다가 분수도 모르는 자식 같으니라고. 네가 지금 그렇게 성질을 부릴 처지가 아닐 텐데?

옥션 개관이 열흘 정도 남았을 때, 도윤에게 왕이푸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하필이면 한 달 넘게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간신히 숨을 조금 돌리려던 참이었다.

‘그래도 중국까지 다녀오기에는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던 참에 왕이푸 회장의 딸인 왕화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저더러 개관 기념 경매에 올릴 물건들을 감정해달라고요?”

뜬금없는 요구에 도윤이 뜨악한 목소리를 내자 그녀가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한성 옥션 측에서 경매에 올릴 물건을 너무 많이 보냈어요. 그런데 보내온 물건들 가운데 진위가 의심스러운 것들이 많다는 게 저희 쪽 감정사들의 의견이에요. 문제는 아직 개관 초기라서 우리도 다른 나라 미술품을 감정할 전문 감정사들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다는 거죠. 이 박사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정 물건이 의심스러우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감정해서 진위가 판명된 것만 올리면 되잖습니까? 굳이 개관 경매 때 그걸 다 올릴 필요가 있어요?”

“한성 측에서 자기들 물건을 반드시 개관 기념 경매에 올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어요. 명색이 합작 파트너인데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대놓고 거절하기는 어려워요. 그러지 말고 이 박사께서 좀 맡아주세요. 감정료는 후하게 드릴게요.”

도윤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한성 측에서 아직도 그렇게 많은 물건을 경매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도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다. 마침 조금 무리를 하면 며칠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오주현의 그림은 이미 교토로 보내서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어 공부에 조금 더 신경을 쓰라고 당부했지만 미국 대학으로 입학 신청 서류를 보내려면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박은비 화백의 특별전은 아리움 갤러리에서 열기로 했고, 도록 작업을 겸해 소장품을 대여하기 위해 수집가들을 만나는 일은 어차피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의 얘기에 왕화가 반색했다.

“뭔데요? 무리한 조건만 아니면 들어드릴게요.”

“특별히 무리한 조건은 아닐 거예요. 얼마 전에 제가 새로 입수한 그림하고 글씨들이 다섯 점정도 있는데 그것도 개관 경매에 올려주실 수 있습니까?”

“작품이요? 어떤 작품을 내놓으시려고요?”

“심주의 삼여도와 동기창의 위작 네 점입니다. 동기창의 위작들은 그림과 글씨가 각각 두 점씩인데 모두 그의 서명과 낙관이 찍혀 있어요.”

“서명과 낙관은 진짜인데 그림과 글씨가 가짜라는 말인가요?”

“네. 그림과 글씨 자체는 잘 쓰고 잘 그렸는데, 그래도 동기창의 솜씨는 아니에요.”

“작품을 가져오시면 따로 감정을 해봐야 하겠지만 그 정도라면 일단 경매에 올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겠네요. 동기창의 위작은 수준에 따라 고가에 낙찰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심주의 삼여도는 진작인가요?”

“네. 제가 감정한 결과로는 그렇습니다. 물고기를 처리한 솜씨도 그렇고, 그림 위에 쓰인 글씨도 모두 심주 본인의 것이에요. 서명과 낙관도 모두 진짜고요.”

“그 정도면 경매에 올리는 데는 문제가 없겠네요. 다른 조건은 뭐예요?”

“한성에서 보낸 물건들 말이에요. 그거 제가 감정을 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세요. 만약 가짜라는 감정 결과가 나오면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얼굴을 붉힐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이 박사는 이미 그쪽하고 얼굴 붉힐 일이 꽤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말싸움 좀 했다고 굳이 주먹까지 날릴 필요는 없잖아요.”

“알겠어요. 그럼 감정만 이 박사님이 하고 만약 감정서를 작성해야 할 일이 생기면 우리 쪽 감정가의 이름으로 발부할게요. 그럼 되는 거죠?”

“그쪽 언론에도 제 이름이 밝혀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우리 쪽 언론에서는 한국 미술품을 누가 감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을 거예요. 혹시 한국 측 기자들이 개관 경매에 참여할지도 모르니까 그쪽만 조심하시면 돼요.”

왕화가 모든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여준 덕에 도윤은 결국 한성에서 보낸 물건을 감정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개관 경매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석훈과 함께 중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왕화는 조금이라도 일찍 와 달라고 계속 재촉했지만 더 이상은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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