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한대길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에 두 번 소환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 자신이 떳떳했기 때문이 아니라 매번 많은 돈을 들여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인맥을 동원해 정치적으로 검찰을 압박한 덕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법이란 약간 불편하지만 꽤 유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는 게 불가능했고, 압박 수단으로 사용할 만한 정치적 인맥도 없었다. 그나마 이럴 때 믿을만한 사람이 왕이푸 회장이었는데, 이미 그와는 중국에 입국한 이후로 한 번도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는 난생 처음 맨몸으로 자신에게 철저하게 적대적인 수사관과 마주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위작을 들여온 겁니까?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이면 아무 짓이나 해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중국 미술품 시장이 너무 만만하게 보였어요?”
심문실에 통역을 대동하고 들어온 담당 수사관이 다짜고짜 꺼낸 말이었다. 한대길은 순간적으로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얼굴이 벌게졌다. 아마 이곳이 한국이었으면 주먹으로 책상부터 내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위작을 들여오다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수사관이 대뜸 코웃음을 쳤다.
“한성 옥션에서 아리스 옥션의 개관 기념 경매에 올려달라고 미술품을 잔뜩 보냈잖아요? 아니 어쩌다 가짜가 좀 섞이는 건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그쪽에서 보낸 104점 가운데 고작 여섯 점을 뺀 나머지 98점이 전부 위작으로 밝혀졌어요. 명색이 합작 회사의 개관 기념 경매인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우리가 보낸 미술품들은 모두 진작이에요. 저희 회사 감정가들의 간혹 물건을 잘못 감정했을 수는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104점 가운데 98점이 위작이라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건 모함이에요.”
“모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수사관이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그의 앞에 사진을 하나 내밀었다. 영조 시대에 활약했던 문인 화가 이인상의 ‘계류탁족도’라는 그림이었다. 기존에 발견되지 않은 그림이지만 서명과 낙관은 모두 이인상의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거 한성 옥션 측에서 아리스 옥션으로 보낸 그림 맞죠?”
한대길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상의 계류탁족도군요. 맞습니다. 우리가 이번 경매를 위해 보낸 그림이에요.”
“그쪽 감정사가 진작이라라는 감정서까지 첨부해서 보낸 그림이죠. 그런데 우리가 다시 감정한 바에 의하면 명백한 위작이에요. 이게 위작이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틀림없이 이인상의 진작이 맞아요. 도대체 누가 그걸 위작이라고 주장했다는 겁니까? 그랬다면 그쪽에서 잘못 감정한 겁니다.”
중국에 이인상의 작품을 제대로 감정할 만한 전문가가 있을 리 없다. 한대길은 그걸 믿고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수사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은 노골적으로 혀를 쯧쯧 차더니 ‘계류탁족도’ 오른쪽 위에 쓰인 글귀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그림 위에 쓰인 글귀 말이에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 이거 굴원의 ‘어부사’를 옮겨 적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글자 하나하나가 모조리 이인상의 다른 작품에 있는 글자들을 하나씩 베껴서 옮겨 적은 거잖아요.”
수사관은 그 말과 함께 이인상의 다른 작품들을 찍은 사진들을 여러 장 내놓았다. 각각 작품의 글자들을 크게 확대한 사진들이었는데, 그걸 모두 합하면 ‘계류탁족도’에 쓰인 글귀가 만들어졌다. 수사관이 각 그림들의 글자들을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요즘 과학이 발달해서 프로젝터 같은 것으로 종이 위에 사진을 비추고 그걸 따라 붓을 놀리면 필체 흉내 내기가 참 쉬워졌어요. 보시면 알겠죠? ‘계류탁족도’의 ‘어부사’는 다른 이인상의 다른 작품에 있는 글자들을 하나씩 베껴서 집자 형식으로 위조한 거잖아요. 이래도 위작이 아니에요?”
순간 한대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본인이 위조를 직접 지시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인 성진아로부터 실제 그런 식으로 ‘계류탁족도’의 글자를 위조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지 않은가? 그런데 중국 감정가가 어떻게 이인상의 다른 글씨들을 찾아냈지? 그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않고 진땀만 흘리자 수사관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책상 위의 사진들을 모두 치웠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새롭게 다른 사진들을 꺼냈다.
“한성은 짜깁기를 참 좋아하나 봐요? 이 금동여래입상은 당신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하고 부여 박물관에 있는 걸 적당히 섞어서 조합했더라고요. 불상 제작이 무슨 합성 사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참 대단하십니다. 무게까지 딱 맞춘 걸 보면 애 많이 썼겠어요?”
수사관의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담기기 시작했다. 한대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사관이 꺼낸 사진의 금동여래입상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불상을 부분적으로 복제해서 합쳐놓은 게 맞았다. 한대길은 그게 정확히 어떤 작품에서 베낀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중국 공안이 불상의 위조 수법을 정확히 알아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그는 침묵을 고수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위조 수법을 찾아낸 감정가가 누구일지를 생각하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에 그 정도로 대단한 한국 미술품 전문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발버둥 치듯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도 책상 위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진들이 올라왔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아예 먹까지 옛날 걸 똑같이 구해다 썼더군요. 그럼 뭐합니까? 글씨의 품격이 다른데. 이걸 감정한 감정가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렇게 졸렬하고 거친 글씨를 추사의 필체라고 우기면 돌아가신 양반이 화가 나서 관에서 벌떡 일어날 거래요.”
수사관의 얘기가 거듭될수록 한대길의 입은 점점 굳게 닫혔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의 말을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나? 성진아는 이번에 보낸 미술품들을 모두 제대로 감정하려면 한국에서도 각 분야의 전문 감정가들이 열 명 이상 달려들어야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만큼 한성이 보낸 작품들의 종류는 많고 다양했으며, 위조 수법도 정교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하나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도윤! 그 개자식이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번 중앙지검에서 있었던 공개 감정에서도 녀석이 모든 작품을 혼자 감정하고 설명했었잖아?’
하지만 당시에는 그가 공개 감정에 나서기 전에 미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는 추측이 많았다. 사실 현소 화랑에는 공동 대표인 이세준과 서연희를 비롯해서 실력 있는 다른 감정가들이 여럿 있었다. 혼자서 동서양의 모든 작품들을 감정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인 이상 그 추측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성진아나 한대길 역시 그렇게 짐작했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직접 수사관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추궁을 당하자 한대길의 생각이 달라졌다.
‘분명히 우리가 보낸 작품들을 감정하기 위해 한국에서 전문 감정가들을 불러왔을 거야. 하지만 그 많은 미술품들을 모조리 감정하려면 한두 명 정도 불러서는 감당이 안 됐을 텐데? 그렇다고 진짜 실력 있는 감정가들을 십여 명씩 부르는 것도 힘들 테고.’
아무리 왕이푸 회장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전문 감정가들을 불러들여 작품을 일일이 감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와 성진아도 자신감을 가지고 물건을 보냈다. 중국 감정가들로서는 기껏해야 그중 극히 일부만 위작임을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수사관의 심문을 받자 자신의 예상이 아주 크게 틀렸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모릅니다. 옥션에 관한 일은 모두 아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 사람한테 물어보시오. 나는 국회의원이에요. 정치인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미술품 위조에 대해 내가 뭘 안다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까? 자꾸 이러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당장 심문을 그만 두고 나가게 해 주시오.”
결국 그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미술품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이대로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그는 미술품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방패삼아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명확하게 혐의를 입증할 수 있다면 모를까,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이웃나라의 국회의원을 마냥 붙잡아둘 수는 없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미루면 자신의 정치적인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겠지만 그게 중국에서 구속 수감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한대길이 수사관과 마주 앉아 있는 시각, 다른 방에서는 아내인 성진아가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 역시 여장부라 불릴 정도로 기가 센 여자였지만, 남편과는 달리 누군가에게 취조를 당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공안 심문실의 차갑고 냉정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저희도 굳이 한국의 회사 대표와 정치인을 수감시켜서 외교적 마찰을 빚을 생각은 없어요. 조사가 끝나는 대로 두 분의 신병을 한국 검찰에게 넘기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뻔한 사실을 놓고 시간 끌지 말고 인정할 건 빨리빨리 인정합시다. 이미 증거도 다 나온 상태인데 서로 피곤하게 줄다리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성진아를 담당한 수사관은 협박과 설득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그녀를 압박했다. 게다가 도대체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증거자료들을 하나씩 내놓으며 다그치자 성진아는 한대길의 짐작보다 훨씬 쉽게, 그리고 빨리 무너졌다. 그녀는 다급하게 자신의 살길을 모색했다.
“그건 저희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구입했거나 경매 의뢰되었던 작품들 가운데 가짜임이 판명돼서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에요. 그래서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남편이 이번 기회에 중국으로 보내 팔아치우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안 된다고 계속 반대했지만 남편이 당장 돈이 필요하다면서 하도 몰아붙여서 그만…….”
성진아는 남편을 방패막이로 삼아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리석은 판단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판단력은 평소의 영민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사실 옥션 회사가 가짜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죄도 안 된다. 범죄 사실은 그걸 진짜인 것처럼 속여서 팔려고 하면서부터 생기는데, 그녀는 그 과정을 남편인 한대길이 주도했다고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덜어내려고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무려 나흘 동안 공안국에 구금된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구금된 당사자 가운데 한 명이 무려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한국에서는 중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한대길이 소속된 여당 역시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한국 외교부에서 중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하려는 찰나,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기자들이 취재 경쟁에 나서면서 낯 뜨거운 사실들이 속속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에서는 이례적으로 한국 특파원들에게 보도 자료를 배포했고, 아리스 옥션 측에서도 직접 위작들을 꺼내 보여주면서까지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한대길 부부가 공안에서 풀려나오기도 전에, 여론은 이미 완벽하게 뒤집혔다. 여기저기서 나라 망신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럴 즈음, 중국 정부는 두 사람을 풀어주면서 공식적인 기자 회견을 열었다.
“중국 정부는 한국의 한대길 의원과 성진아 사장을 추방하면서 영구히 그들의 입국을 금지합니다. 그들의 범죄 사실에 대한 심문 결과는 이미 증거와 함께 한국 검찰에 넘겼습니다. 한국 검찰이 이번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서 다시는 양국 사이에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재발되지 않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본래 외국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해당 범죄가 발생한 지역의 사법 당국이 처벌 권한을 갖는다. 그런데 중국 공안은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다소 애매하게 처리했다.
한대길과 성진아가 작품을 위조하고 중국에 보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위조가 행해진 장소가 중국이 아닌 한국이었다. 게다가 가짜를 팔려고 했던 그들의 시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미수에 그쳤다는 얘기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중국 공안은 고의적으로 그 부분을 얼버무렸다. 성진아의 거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리스 옥션에 대한 한성 옥션의 지분을 포기할게요. 중국 정부에 넘기겠어요.”
중국 정부는 처음에 난색을 표시했다. 그 지분을 넙죽 넘겨받을 경우, 중국 정부가 외국 기업을 압박해서 재산을 강탈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왕이푸 회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세간의 이목이 있으니 제가 직접 한성 측 지분을 넘겨받는 건 곤란합니다. 하지만 적당한 인수자를 찾아드리겠습니다. 그 인수자가 한성 측 지분을 받고 대금을 지불하면 정부에서 그걸 좋은 곳에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신 인수 대금을 파격적으로 깎아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중국 당국은 고민 끝에 왕 회장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불과 며칠 사이에 일은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가 한대길과 성진아 부부의 영구 추방과 한국 검찰로의 신병 인도였다.
* * *
북경 공안국에서 풀려난 두 사람을 맞이한 사람은 아들인 한치호였다. 그는 부모가 잡혀 들어간 이후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들과 가볍게 포옹을 한 한대길의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물었다.
“한국 쪽 상황은 어떠냐?”
그는 공안에 갇혀 있는 나흘 동안 일체의 뉴스를 접할 수 없었다. 자신과 아내가 곧장 공항으로 이동되어 추방당할 것이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중국 땅을 밟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통보받았다. 그 역시 다시는 중국에 오고 싶지 않았으니 그 점은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 한국의 여론이나 분위기가 어떻게 됐는지가 더 궁금했다.
“다 끝났어요, 아버지. 우리는 이제 사람들을 피해 살아야 한다고요. 어디 다른 나라로 이민이라도 가야 할 판이에요.”
한치호는 울먹였다. 한대길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을 피해 살아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치호는 일단 대기하고 있던 차에 부모를 태웠다. 그들을 공항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경 공안국에서 준비한 차였다. 차가 출발하자 한치호가 한숨을 섞어가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요. 우리더러 나라 망신을 시킨 매국노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어요. 회사 정문은 물론이고 아버지 국회위원 사무실과 당사 앞에서도 사람들이 매일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다음 총선 공천은 이미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고 지금은 출당 조치까지 거론되는 중이에요. 귀국하자마자 검찰에서도 소환 통보가 올 거예요.”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모두가 끔직한 소식들뿐이었다. 한대길과 성진아는 도대체 자신들이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소송 중인 재판도 이번 일로 인해 결과가 안 좋게 나올 거 같아요. 그거 모두 손해 배상 판결을 받으면 우린 거지나 다름없게 된다고요. 조금이라도 재산이 남아 있을 때 그거라도 들고 외국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요? 그게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에요.”
아들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한대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불과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이 완전히 뒤집혔다.
그 시각, 도윤은 왕이푸와 함께 북경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마주 앉았다. 로비나 식당이 아니라 객실 하나를 빌려서 마련한 그 자리에는 두 사람 외에도 중국 정부에서 나온 관계자 두 명이 함께 했다. 도윤은 중국 관계자들이 내놓은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한 다음 즉석에서 그들이 지정한 계좌로 거액을 송금했다.
일이 모두 끝나자 지금까지 말없이 있던 왕이푸 회장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도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로써 이 박사가 아리스 옥션의 지분 49퍼센트를 소유한 대주주가 된 겁니다. 나로서는 든든한 동반자를 얻은 셈이라서 여간 기쁜 게 아니에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하하하.”
왕이푸 회장은 정말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핏물이 낭자한 전장에서도 승자는 웃는 법이다. 도윤은 속으로는 고소를 삼키면서도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대주주라고는 해도 경영에 대한 전권은 왕 회장님에게 있는 게 아닙니까? 저야 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자 참석했던 정부 관리들이 서류를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 회장님의 제안에 따라 이 박사에게 지분을 넘기기는 했지만, 이 사실을 외부에 공표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대주주를 반드시 공시해야 하는 의무가 없어요. 이 박사님만 비밀을 지켜주시면 세상이 시끄러울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는 경고와 부탁을 겸한 묘한 말을 남기고 객실을 떠났다. 도윤은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삼켰다.
그가 오늘 인수한 주식은 앞으로 최소 일 년 동안 시장을 통해 거래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대신 액면가의 절반 이하라는 싼 값에 인수했으니 내년 쯤 주식이 상장되면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도윤은 찜찜한 마음을 그것으로 달래기로 했다. 남의 등에 칼을 꽂은 대가로 얻은 이익이지만, 애초에 자기 손에 그 칼을 들려준 사람이 바로 한대길과 성진아였다.
“이 박사에게는 종종 부탁드릴 일이 있을 거예요.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이가 됐으니 서로 잘 지내봅시다.”
객실을 떠나기 전 왕이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도윤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왕이푸가 이번에 베푼 호의는 다소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공짜는 아닐 것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