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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75화 (175/300)

175화

“말씀은 고맙지만 내려오면서 간단히 요기를 했습니다. 식사보다는 감정을 먼저 했으면 좋겠군요. 일단 일을 끝내야 밥을 먹어도 속이 편할 것 같아서요.”

도윤이 감정을 먼저 하겠다고 하자 유기찬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어, 나야. 서울에서 오신 분들이 지금 감정을 하시겠다니까 천상섭이한테 연락해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해. 응. 그래. 되도록 빨리.”

물건을 가져오라고? 되도록 빨리? 도윤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저기. 감정할 물건이 지금 여기에 없는 겁니까?”

그러자 유기찬이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죠. 아직 사지도 않은 물건을 제가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건 주인한테 연락해서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도착할 겁니다.”

기껏 사람을 불러놓고 정작 감정할 물건이 없다고? 황당해진 도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최서라가 먼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히 미리 전화를 드렸을 텐데요? 그런데도 아직 감정 받을 물건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일이라는 게 다 순서에 맞춰서 진행해야 하는 법입니다. 감정할 사람도 없는데 물건만 미리 가져다 놓아 뭐하겠습니까? 제 물건도 아닌 걸 가지고 있다가 혹여 손상이라도 입으면 곤란하기도 하고요. 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그런 거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유기찬은 여전히 최서라에게 정중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행동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실례를 범하고 있는지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게 도윤과 최서라를 더욱 기가 막히게 했다.

금방 온다던 물건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도윤과 최서라는 억지로 불만을 누르며 입을 꾹 다문 채 앉아서 기다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유기찬이 은근히 도윤을 상대로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즘 이 박사 이름이 대한민국 전체에 아주 유명합니다. 미술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예요. 아직 나이도 젊으신데 분이 대단하십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까 방송이나 뉴스에 이름이 조금 오르내렸을 뿐입니다.”

“에이, 그게 어디 조금 오르내린 겁니까? 요즘 같은 미디어 세상에서는 그저 유명해지는 게 최고지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 박사에게 좀 부탁할 게 있어요.”

“물건을 감정하는 것 말고 다른 부탁이 더 있단 말씀입니까?”

“하,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조금 있다가 물건을 가져올 사람이 천상섭이라고, 원래 부친이 유명한 수집가였던 양반입니다. 그 양반이 살아계실 때는 물건 보는 안목이 상당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들은 영 아니에요. 그래서 물건 값을 함부로 불러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하나 사려면 아주 골치 아파요.”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최대한 정확하게 감정해드리겠습니다.”

“에이, 그래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내려온 보람이 조금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건 값을 딱 절반만 깎아주십시오. 그럼 올라가실 때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도윤과 최서라가 동시에 입을 떡 벌리고 유기찬을 쳐다봤다. 지금 우리더러 부산까지 내려와서 협잡질을 해달라고?

“제가 그런다고 해서 통하겠습니까? 물건 주인도 나름 시세를 알고 있을 텐데. 괜히 이상하게 감정했다가는 욕만 먹고 거래가 깨질 염려가 더 큽니다.”

도윤의 말에 유기찬이 어울리지 않게 눈을 찡긋했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 박사를 내려와 달라고 했겠습니까? 천상섭이라는 그 친구가 이 박사를 대한민국 최고의 감정가라고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 말이라면 몰라도 이 박사 말이라면 꾸뻑 죽을 겁니다. 잘 좀 부탁드려요. 하하하.”

이 개자식이! 도윤은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유기찬이 왜 그토록 자신을 지목해서 부산까지 불렀는지, 그리고 그가 왜 자신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물건 주인에게 연락을 하는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시간을 끌었는지 이해된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저를 부르신 거라면 …….”

도윤이 벌컥 화를 내려는 순간, 갑자기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회장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유기찬의 비서였다.

“천상섭 씨가 도착했습니다.”

도윤이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키는 사이,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대형 창고에서 화물을 옮길 때 쓰는 넓은 카트 위에는 잘 포장된 그림 한 점과 두 개의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감정할 물건이 그림 한 점과 도자기 두 점이라고 했으니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게 도자기일 것이다.

“아, 거참. 사람하고. 연락한 지가 언젠데 이제 오나?”

유기찬이 짐짓 천상섭이라는 남자를 타박하자 그가 뜨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회장님. 저희 집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늦었다고 그러십니까? 더구나 지금 이 시간에는 시내가 얼마나 막히는데요. 그렇게 급하셨으면 미리 연락을 하시든가요.”

순간 유기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천상섭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도윤은 ‘이게 뭐지’ 싶어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 했다.

자기 입으로 귀한 손님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상대로 시중 양아치들이나 쓸 법한 수작을 부리려는 사람. 자기 물건을 사주겠다는 사람에게 오히려 퉁명스럽게 대하는 작품 주인. 마치 잘 짜인 한 판의 코미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도윤 자신이 그 코미디의 한 부분만 아니었어도 틀림없이 재미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천상섭은 얼핏 볼 때 순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고집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도윤이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는 사이, 천상섭은 말없이 그림과 도자기의 포장을 벗겨 사무실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물건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도윤의 생각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뭐야, 이거? 대충 감정할 물건들이 아니잖아?’

천상섭이 가져온 미술품들은 모두 진작이었다. 그림과 도자기에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환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예상보다 훨씬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작품이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건 귀한 물건을 앞에 둔 감정가의 본능적인 행동 같은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여기 이 친구가 그림과 도자기를 합해서 5억을 부르더군요. 이 박사께서 보시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유기찬이 뒤에서 슬쩍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천상섭의 시야를 몸으로 가린 채 계속해서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미친 자식!

도윤은 그의 눈짓을 무시하고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서 흰 장갑을 꺼내 착용한 그는 커다란 확대경을 손에 들고 먼저 그림부터 꼼꼼하게 살폈다. 일단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래도 감정을 하고 가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림은 6호 정도의 아담한 크기였다. 여자가 아이를 등에 업고 집 앞에 서 있는데 등 뒤로 낡은 판잣집이 보이는 그림이었다. 집의 모양이나 여인의 복장에서 1960년대 도시 빈민가의 모습이 엿보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약간의 서글픔과 함께 아련한 향수를 느끼도록 해주는 명작이었다.

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색을 복잡하게 쓰지 않았고 선의 형태 역시 비교적 간단했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캔버스의 표면에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서 화강암 표면처럼 거칠거칠한 느낌이 나도록 처리한 점이었다. 도윤은 그림에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은 박수근 화백의 진작이 분명하군요. 저도 처음 보는 작품인데 혹시 소장자께서는 제목을 아십니까?”

감정을 마친 도윤의 질문에 천상섭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좋아하던 그림이기는 하지만 제목은 정확히 모릅니다. 아버님은 그냥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화가가 직접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경우, 주요 소장자나 평론가가 부르는 이름이 그대로 그림의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천상섭의 선친이 그렇게 불렀다면 이 그림의 제목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로 굳어질 확률이 컸다.

“그림과 도자기를 합해서 5억을 요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자기 감정은 천천히 하도록 하고 우선 그림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죠. 이 그림의 가격은 얼마로 보십니까?”

도윤이 가격을 언급하자 유기찬이 두 사람을 향해 바짝 다가왔다.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본 천상섭이 별다른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미술품 가격을 잘 모릅니다. 제가 모은 게 아니라 죄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물려주신 거거든요.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 그 그림을 팔면 언제든 3억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유 회장님에게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유기찬이 얼른 나서며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허풍 좀 떨었기로서니 그걸 그대로 믿으면 어떡하나? 사람이 융통성이 좀 있어야지. 그렇잖아도 자네가 그럴까봐 내가 서울에서 특별한 손님을 모셔왔어. 자네도 이도윤 박사 이름은 들어봤다고 했지?”

“압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감정가로 유명한 분이 아닙니까?”

“그렇지. 잘 아는구먼. 그러니 괜히 자네가 설레발치지 말고 그림 값은 전문가에게 맡겨 둬. 이 박사께서 보시기에는 이 그림 가격이 어느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까?”

도윤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유기찬을 보고 기가 막혔다. 다시 한 번 속에서 불길이 확 솟구쳤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회장님, 잠깐 밖에서 저 좀 보실 수 있겠습니까?”

도윤이 갑자기 사무실을 나가며 그를 부르자 유기찬이 당황했다. 그는 방안의 사람들을 잠시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도윤을 따라 나섰다.

“이 박사.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러면 천상섭 저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저 친구가 보기에는 소처럼 생겼어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유기찬은 지금 상황이 영 불쾌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께서는 혹시 박수근의 그림 시세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유기찬이 다시 한 번 자기 사무실을 힐끗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대충은 압니다. 호당 3억 정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상한 미술품 거래 관행이 바로 그림의 크기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것이었다. 1호란 엽서 한 장 크기를 가리킨다. 10호면 엽서 열장의 넓이가 되는 것이다. 도윤은 유기찬이 그림의 시세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욕지기가 치밀었다.

“천상섭 씨가 가져온 그림은 6호짜리입니다. 호가대로 계산할 경우 저 그림의 가격이 대충 18억이라는 뜻이에요. 그걸 고작 3억에 사려 하셨단 말입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저더러 가격을 절반으로 후려치라고요?”

“이보세요, 이 박사. 아무리 우리나라 그림 값이 크기에 따라 매겨진다고 해도 다 그렇지는 않아요. 잘 아시겠지만 그림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저 작품은 박수근 씨 그림들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경매에 올리면 최소 20억 이상 나갈 거예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뭘 말이요?”

“만약 저 그림을 15억 정도에 구매하실 의향이 있다면 저도 그 가격으로 감정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경매에 올려 되팔 때 붙을 수수료와 세금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히 이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유기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한참 동안 도윤을 노려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이 박사. 그러지 말고 그냥 3억에 퉁 칩시다. 상대가 부른 가격을 다 주고 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 박사 의견이 정 그렇다면 깎지 않고 그냥 돈을 내지요. 그럼 천상섭이나 나나 서로 불만 없이 거래가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박은비 화백의 그림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 박사에게도 두둑이 사례하겠소.”

유기찬은 자신이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제가 회장님의 요청으로 왔다고 해도 시세 20억 짜리를 3억으로 후려치는 엉터리 감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감정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요. 죄송하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습니다.”

유기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도윤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구려. 이 박사께서는 그냥 서울로 돌아가시오. 그림 값은 내가 천상섭하고 알아서 잘 흥정을 해 볼 테니까. 대신 박 화백 그림 대여 건은 없었던 일로 하겠소. 원 사람이, 누가 젊은 사람 아니랄까봐 앞뒤가 꽉 막혀서는.”

찬바람이 일 정도로 매몰차게 돌아서려는 유기찬의 팔을 도윤이 붙잡았다.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분명히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유 회장님을 위해서 일하는 감정가가 아닙니다. 맞습니까?”

“물론이오. 의뢰자의 요구를 무시하는 사람을 어떻게 내 감정사라고 할 수 있겠소?”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안에 들어가서 천상섭 씨하고 직접 흥정을 해도 되겠군요. 솔직히 저만한 작품이 고작 3억에 나왔다면 그냥 놓치는 게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유기찬의 얼굴이 확 변했다.

“감히 감정가가 고객의 물건에 직접 손을 대겠다고?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좀 유명해지더니 간이 배밖에 나온 모양이군. 당신이 그러고도 대한민국 땅에서 감정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바닥에서 매장 당하고 싶어?”

제 딴에는 협박을 한답시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도윤의 입장에서는 가소롭기만 했다. 감정가가 구매자로 돌변하는 게 뭐 어때서? 그리고 도윤을 매장시키기 위해서는 현소 화랑을 상대해야 한다. 현소 화랑이 아무리 중견 화랑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부산의 호텔 주인이 함부로 매장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은 아니다.

도윤은 유기찬의 반응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예전에 가짜 미술품을 사들여서 크게 손해를 본 적이 있다고 하더니, 이 사람이 지금까지 도대체 어떤 감정가들을 상대하며 살아왔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는 감정가를 언제든지 돈을 주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용역 직원쯤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적지 않은 감정가들은 그 자신 강력한 구매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였다. 좋은 물건을 앞에 두고도 의뢰자가 구매를 망설일 경우 그걸 놓치고 싶은 감정가가 어디 있겠는가? 능력이 되는 감정가들은 그럴 때마다 거리낌 없이 자기 지갑을 연다. 사두면 이익이 될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 감정가를 12억까지는 낮춰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그 가격에 사시더라도 손해를 볼 확률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러면 회장님이나 천상섭 씨나 서로 이익을 보는 셈이지요. 그 가격에 구입하시겠다면 저도 그림에 욕심을 내지 않겠습니다.”

유기찬은 도윤이 자신의 협박에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자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도윤을 노려보더니 결국 턱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저 그림의 시세가 최소 20억이라는 말은 확실한 거요?”

“그림 시세에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다만 제 감정 결과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저를 믿으신다면 그 가격에 사십시오. 아니면 제가 사더라도 저로서는 불만이 없습니다.”

유기찬은 그 뒤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참. 이런 황당한 경우도 생길 수 있군. 알았소. 12억에 사도록 하지.”

“아울러 안에 들어가자마자 박은비 화백의 그림을 대여해준다는 서류에 사인을 해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마음 놓고 도자기들을 계속 감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각보다 대단한 젊은이로군. 그러지. 곧바로 사인을 해 주겠소.”

유기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도윤은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양반아, 아직 안 끝났어. 본 게임은 지금부터라고.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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