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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77화 (177/300)

177화

천상섭이 가져온 그림과 도자기는 모두 진품이었다. 하지만 유기찬이 구입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박수근 화백의 그림과 건륭제의 화병뿐이었다. 은나라 때의 붉은 항아리인 홍도관은 도윤이 책정한 감정가가 너무 높아 감히 흥정을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감정과 설명을 모두 끝낸 도윤은 두 개의 도자기에 대해서도 감정서를 작성했다. 그 일이 모두 끝나자 유기찬이 천상섭에게 물었다.

“원래 도자기 두 점에 1억을 불렀었지? 근데 결국 하나만 사게 됐으니까 5천만 원만 더 주면 되겠나?”

시가 수천 억짜리 호텔을 가진 양반이 참 알뜰하기도 하지. 유기찬은 당장이라도 계좌 이체를 하려는 듯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때 도윤이 써준 감정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천상섭이 문득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림만 하더라도 처음 제가 불렀던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았잖습니까? 게다가 이 붉은 항아리의 감정가는 솔직히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고요.”

유기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럴 필요 없다니? 안 팔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고요. 사실 이게 다 이 박사님 덕분인데, 달리 생각하면 박사님을 부산까지 불러주신 분이 바로 유회장님 아닙니까? 저 화병은 그냥 회장님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천상섭이 유기찬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의외의 일격을 당한 셈이 된 유기찬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껄껄. 그 사람 참. 그래도 아주 경우를 모르지는 않는군. 나도 남의 물건을 공짜로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네 성의니까 고맙게 받겠네.”

놀고 있네. 도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덕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을 그냥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건륭제의 화병을 선뜻 선물한 천상섭은 홍도관을 다시 상자에 넣고 잘 포장했다.

“이 사람아, 그거 잘 간수해. 혹시 깨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 물건이니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충고를 던진 유기찬은 최서라에게도 약속대로 6월 1일까지 박은비 화백의 그림을 청파 갤러리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칫 골치 아프게 풀릴 수도 있었던 감정 건이 무사히 끝났다. 다소 이르기는 하지만 이젠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도윤과 최서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천상섭이 상자를 올려놓은 카트를 끌고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카트를 세운 천상섭이 문득 도윤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 이도윤 박사님을 우리나라 최고의 감정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덕분에 큰돈을 벌었으니 한 끼 대접하고 싶습니다.”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도윤이 시계를 확인한 뒤 최서라에게 의견을 묻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천상섭에게 물었다.

“어디 맛있는 집 아는 데 있으세요?”

“사실은 제가 교외에서 한식집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래 정식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한식 요리사거든요. 저희 집 양념 갈비 맛이 죽이는데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정말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도윤과 최서라는 천상섭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와 함께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천상섭의 차는 복잡한 부산 시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외곽에 자리 잡은 한적한 음식점 앞에 멈췄다. 교외로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커플들이 들르기 적당할 것 같은 한식집이었다.

“생각보다 식당이 크네요.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깔끔해요.”

식당을 둘러본 최서라의 소감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천상섭의 식당은 손님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 공간만 서른 평 남짓 될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도 돋보였지만 곳곳에 각종 도자기를 비롯한 소품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놓아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게 했다.

“여기 있는 도자기와 소품들 가운데도 진품이 많은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실내를 둘러본 도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물론 상당수가 복제품이었고, 진품 역시 눈에 걸리는 한두 점을 제외하고는 몇 백만 원씩 하는 고가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장소가 식당이다 보니 혹시라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다가 밀쳐서 깨트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상섭은 태평스럽게 웃었다.

“박수근의 화백 그림을 제외하면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모두 팔아버렸습니다. 액수가 상당했는데 인심 좋게 여기저기 기부하셨죠. 여기 있는 건 그렇게 팔고 남은 것들입니다. 어차피 큰돈은 되지 않을 것들이니까 그냥 인테리어용으로 쓰는 거죠.”

“수집품을 팔아서 모두 기부하셨다고요?”

“모두는 아니에요. 저한테도 땅하고 돈을 조금 물려줬으니까요. 덕분에 변두리에 식당을 세울 수 있게 돼서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욕심이 없으시네요? 저 같으면 조금 아까웠을 것 같은데.”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수집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돈만 낭비하는 골치 아픈 취미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불만이셨는지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려고 했는데, 제 반응이 워낙 시큰둥하니까 결국에는 포기하셨죠. 그런데 그나마 떠맡듯이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것들 덕분에 뜻하지 않게 큰돈을 벌게 됐으니 세상일이란 게 참 희한하죠?”

천상섭은 감회가 새로웠는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늘어놓았다. 말을 들어보니 그의 선친은 딱히 미술품 애호가라고 하기는 어려운 양반이었다. 수집품 가운데 상당수가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룡 알 화석이라든가 운석, 희귀한 곤충 표본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냥 잡다한 수집광이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제가 고등학교 때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결국 가족이라고는 저 하나뿐이었는데, 아마 아들이 당신의 수집품을 제대로 관리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제가 군 복무를 하는 2년 동안 꾸준히 물건을 처분하셨죠. 일부는 외국의 수집가들에게도 판 모양인데 정확한 내용은 저도 몰라요.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고요. 하하.”

“그럼 식당에 장식해 놓은 게 팔고남은 전부입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천상섭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팔리지 않거나 아버지가 나름대로 아끼던 물건들만 몇 개 남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우리 식당에 들렀던 유 회장님이 식당에 있던 화병하고 항아리를 보고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얘기 좀 하자고 뒤쪽에 있는 제 사무실로 오셨다가 거기 걸려 있는 박수근 화백 그림을 본 거예요. 그때부터 당장 팔라고 달려드셨어요.”

박수근의 그림이 꽤 비싼 거라는 건 천상섭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혹시 형편이 진짜로 궁해지면 마지막 비상금으로 생각하라며 남겨준 유일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돈이 급한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안 팔겠다고 거절했는데 유 회장님이 정말 집요하게 졸라대더라고요. 결국 지쳐서 그냥 팔기로 마음을 바꿨는데, 그게 설마 10억도 넘을 줄은 몰랐죠.”

“하지만 아까 호텔에서는 도자기 두 점에 2억을 부르셨잖아요? 선친께서 아끼던 작품이라고도 하셨고요. 그럼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최서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천상섭이 난처해하며 웃었다.

“아까 이 박사님이 물었을 때는 그냥 민망해서 고개를 끄덕였던 겁니다. 그 화병과 항아리는 사실 아버지가 아주 오래 전에 중국 여행을 하다가 싸게 구입하셨던 거예요. 그 때 우리 돈으로 각각 십만 원 정도 줬다던가? 살아계실 때 아끼던 물건인 건 맞지만 아버지도 그렇게까지 비싼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그걸 한 점에 1억이나 불렀다고요?”

“그냥 불러봤던 거예요. 그림 값은 대충 3억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유 회장님이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싶어 도자기도 하나에 1억씩 불러봤죠.”

“그런데도 유 회장이 관심을 보이더라는 말인가요?”

“화병은 흥정을 해볼 뜻이 있어 보였어요. 하지만 항아리는 어림도 없는 가격이라면서 언짢아했지요. 그래서 저도 세 개 합해서 5억에 사겠다면 팔고, 아니면 하나도 안 팔겠다고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유기찬에게 도윤의 이름을 먼저 꺼낸 사람은 천상섭이었다. 유기찬이 끈질기게 물건 값을 가지고 흥정하자, 나중에는 너무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이럴 거면 차라리 서울로 들고 가서 도윤에게 감정을 맡기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저한테 감정을 부탁할 생각이었다고요?”

도윤이 황당해서 묻자 천상섭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저 같은 사람이 아는 감정가가 있을 리가 있나요? 방송하고 뉴스에 이 박사님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어서 그냥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랬더니 유 회장이 직접 이 박사님을 불렀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윤과 최서라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결국 일이 돌고 돌아서 유회장이 꺼내든 회심의 카드가 오히려 자기 발등을 찍는 도끼가 되고 만 꼴이었다.

* * *

천상섭은 그 말을 끝으로 음식을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보조 요리사도 있는 것 같았지만 아마 자기 손으로 직접 조리를 할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를 뜨자 도윤이 슬그머니 일어나 창가 쪽에 놓인 얕은 선반을 향해 다가갔다. 그 위에도 몇 가지 소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다들 고만고만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 가운데서 한 쌍의 조그만 조각품이 계속 눈에 밟혔다.

“도윤 씨가 보기에도 좀 특이한 것 같았어요?”

그가 선반을 향해 다가서자 어느새 뒤를 따라온 최서라가 옆에서 물었다. 도윤은 조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응. 이거 아무래도 어디서 본 거 같아서 말이야. 느낌도 이상하고.”

한 쌍의 조각은 동물 뼈나 이빨 같은 것을 깎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각각 10cm 정도 높이의 작은 크기였다. 하나는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고깔모자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왼쪽 팔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칼을 든 형태였다. 다른 하나도 전체적으로 모습이 비슷했지만 칼 대신 창을 들었고 말을 타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도윤은 보통 한 번이라도 관심 있게 본 물건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억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듯 본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뜻밖에도 옆에 있던 최서라가 단정하듯 말했다.

“루이스 체스맨이에요.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활 소품 전시물 가운데 하나죠. 칼을 든 건 워더(Warder)고 창을 든 건 나이트(Knight)예요.”

그제야 도윤도 눈앞의 조각들을 어디서 봤는지 드디어 기억이 났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이게 정말 그 루이스 체스맨이라고?”

“네. 분명해요. 저는 이런 물건들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번 구경하러 갔었거든요”

도윤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루이스 체스맨이 왜 여기에 있지?

체스맨이라는 건 폰이나 비숍, 나이트처럼 체스를 둘 때 쓰는 기물들을 가리킨다. 최서라가 말한 워더는 과거에 쓰이던 기물의 이름인데 현대 체스의 룩(Rook)에 해당한다.

루이스 체스맨은 아마 모든 체스 세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831년, 스코틀랜드 지방의 루이스 섬에서 바이킹들이 바다코끼리의 상아를 깎아서 만든 93개의 체스 말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82개는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11개는 에든버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워더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게 그 사라진 나이트라면 가격이 엄청나겠는데요?”

최서라의 말에 도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눈앞의 조각들에서는 그다지 밝은 빛이 나지 않았다. 대단한 예술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인데, 그래서 도윤이 처음 이 물건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로 루이스 체스맨의 일부라면, 그것도 워더와 나이트라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원래 체스 세트는 흑백을 합해 32개의 기물로 이루어져 있다. 발견된 루이스 체스맨의 기물 수가 93개라는 건 여러 개의 세트가 합쳐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세 세트를 완성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발견된 기물 가운데 몇 개가 과도하게 중복되어 있는 대신, 오히려 나이트 1개와 워더 4개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2019년 6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워더 1개가 런던 소더비 경매에 올라왔다. 무려 55년 동안이나 가정집 서랍 속에서 뒹굴던 작은 조각품이 우연한 기회에 진품 루이스 체스맨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워더는 1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15억 원에 팔렸다.

“이게 정말로 사라진 루이스 체스맨의 일부라면 두 개 합쳐서 최소 30억이겠는데요?”

최서라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나이트는 하나만 더 있으면 짝이 완전히 맞잖아. 이건 그보다 훨씬 비싸게 팔릴 거야.”

도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다시 한 번 천상섭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가 눈앞의 조각들에 흥미를 느낀 것은 그것이 루이스 체스맨의 일부라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그의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대영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모든 미술품들을 낱낱이 머릿속에 담고 다닐 수는 없다. 더구나 시계나 체스 기물, 시계나 구두 같은 생활용품들은 그의 전문 분야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루이스 체스맨을 알아본 사람은 오히려 최서라였다. 도윤과는 달리 그녀는 그런 쪽의 물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와는 달리, 도윤이 체스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아까 식당 내부를 둘러볼 때 이 조각들에게서 아주 희미한 붉은 빛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너무 약해. 이걸로는 설사 주인을 만나더라도 안에 있는 능력을 전해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세트가 모두 갖춰져야 된다는 건가?’

도윤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형태의 유물이라는 뜻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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