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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78화 (178/300)

178화

두 사람이 루이스 체스맨을 살피는 동안, 어느새 음식이 준비되었다. 천상섭은 여러 밑반찬들과 함께 양념에 재인 갈비를 가지고 나와 직접 구워주는 성의를 다했다. 고기는 연했고 양념도 간이 잘 배어 있어서 입에 착착 감긴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였다.

“이거 정말 맛있어요. 서울에 올라가도 다시 생각날 거 같지 않아요?”

최서라가 즐거운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녀가 설마 이보다 육질이 좋은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놀리는 것은 아마도 식당의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기 때문인 듯 했다.

“저기…….”

식사가 모두 끝나고 수정과가 나왔을 때, 도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식당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진열되어 있는 루이스 체스맨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말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천상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어려운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윤은 꺼내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어려운 부탁이요? 어떤 부탁인데요?”

“아까 그 붉은 항아리 말입니다. 그거 혹시 이 박사님께서 이따 서울 올라가실 때 함께 가지고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뜻밖의 제안에 도윤은 깜짝 놀랐다.

“홍도관을요? 아니 왜요?”

“솔직히 그게 천억이 넘는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갖고 있기가 무서워져서요. 그런 엄청난 물건을 그냥 집에 두었다가 강도라도 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저한테 그만한 물건을 팔 재주가 있을 리도 없으니까 솔직히 암담한 심정입니다. 박사님은 서울에 있는 화랑에서 일하시지 않습니까? 가져가서 저 대신 처분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미 유기찬이 보는 앞에서 물건을 감정했으니 조만간 부산을 시작으로 홍도관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게 뻔했다. 천억이 넘는 보물은 평범한 사람을 강도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도윤은 별로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죠. 임자가 나서면 홍도관을 파실 생각인 거죠?”

“당연히 팔아야죠.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어서 제가 뭐하겠습니까? 팔아주십시오.”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워낙 비싼 물건이라서 한국에서는 살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이왕이면 중국에서 경매에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중국이요? 그걸 중국까지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까?”

“그래야 제 값을 받기가 좋습니다. 최근 들어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경매에서 중국 미술품들을 낙찰 받는 사람들은 대개 중국인들입니다. 인구만큼이나 갑부들이 많은 나라가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홍도관은 원래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까?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역시 중국에서 경매를 붙이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팔아도 천 억 정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보다 가격이 올라갈 확률이 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기가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경매 시장이 뜨거운 곳이니까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아무래도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많으니까 적어도 두세 달 이상 걸릴 거예요”

도윤은 물건을 경매에 올리는데 필요한 절차와 수수료 및 세금,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천억에 판다고 해도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그보다 못할 겁니다. 일단 경매 수수료가 10~20퍼센트 정도 붙고, 저 역시 판매가의 5%를 중개 수수료로 받게 됩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천상섭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건은 이 박사님한테 맡기겠습니다. 어차피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 시간은 좀 걸려도 상관없어요.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얘기가 끝나자 도윤은 즉석에서 천상섭에게 물품 보관증을 써주고, 대신 그로부터 판매 위임장을 받았다. 그런 뒤에야 도윤은 처음 꺼내려고 했던 용건을 말할 수 있었다.

“저기 있는 상아로 만든 조각 말입니다. 저거 혹시 어떤 물건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도윤이 루이스 체스맨 한 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천상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요? 글쎄요? 저는 그냥 평범한 기념품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버지도 저게 어떤 건지 특별히 설명을 해주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그러자 최서라가 나섰다.

“그냥 조각이 아니에요. 체스 아시죠? 서양장기 말이에요. 저건 루이스 체스맨이라고 꽤 유명한 체스 기물 가운데 일부에요. 32개 한 세트 가운데 두 개이거든요.”

그러자 천상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런가요? 저는 우리나라 장기도 들 줄 몰라서……. 혹시 마음에 드세요?”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꽤 귀한 물건이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럼 잘 됐네요. 마침 두 개가 있으니까 두 분한테 하나씩 선물로 드릴게요. 어려운 일을 부탁하게 돼서 죄송했는데 그거라도 드리면 제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도윤과 최서라는 기가 막혀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 개에 최소 15억 원짜리를 선물로 주겠다고? 최서라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기 있는 체스맨들은 각각 나이트와 워더라는 기물이에요. 워더만 해도 얼마 전에 소더비에서 100만 파운드에 팔렸어요. 우리 돈으로 15억이 넘죠. 그런데 나이트는 그보다 귀한 거라서 더 비쌀 거예요.”

조그만 상아 조각이 그렇게 비싼 물건이라는 말을 듣자 천상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이내 씩 웃었다.

“그래도 일단 저것들은 두 분이 가지고 가세요. 제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럼 저 체스맨들도 경매에 올려드릴까요?”

최서라의 말에 천상섭이 고개를 저었다.

“이 박사님이 붉은 항아리를 천 억 이상에 팔아주겠다고 하셨죠? 말씀대로 해 주시면 저도 저 조각들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좋을 것 같은데요?”

“저기,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저 체스맨들은 정말로…….”

최서라가 다시 설명을 하려는 순간, 천상섭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저는 홍도관이라는 그 붉은 항아리를 어렸을 때부터 봐 왔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십 년이 넘게 가게 안에 진열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보물이라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죠. 잘못해서 깨지거나 잃어버렸어도 크게 아까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알고 지냈을 테고요. 저 조각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씩 웃었다.

“저 조그만 놈 하나가 유 회장에게 판 박수근 화백의 그림보다 비싼 거라고 하셨죠?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짐작도 못했죠. 두 분의 말을 듣고 보니까 항아리하고 조각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금덩어리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던 셈이 아닙니까? 아마 아버지도 그것들이 그렇게까지 귀한 물건인 줄 몰랐을 거예요.”

천상섭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더니 루이스 체스맨을 집어 들고 돌아와 두 사람 손에 각각 하나씩 쥐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 같은 놈은 이런 물건을 남에게 선뜻 선물할 주제가 못 됩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어요. 항아리 잘 팔아주십시오. 그럼 이 조각들은 완전히 두 분의 것입니다.”

도윤과 최서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상섭에게 허리를 숙였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조각들을 그냥 삼킬 생각은 없었다. 만약 홍도관이 제값에 팔리지 못한다면 강제로라도 체스맨 값을 천상섭에게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감사히 선물을 받기로 했다.

슬슬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천상섭의 집을 떠났다.

도윤은 마주보는 네 좌석의 표를 몽땅 끊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그는 황도관이 든 상자를 옆 좌석에 올려두었다. 최서라 역시 홀린 듯한 눈빛으로 조각을 쳐다보며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번 부산 출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뜻밖의 소득이 많았다. 좋은 물건을 구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측면에서도.

* * *

서울로 돌아온 도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도쿄 국제 학생미술대회에 출품한 오주현의 그림이 은상을 수상한 것이다. 한국처럼 금상 위에 대상이 따로 있는 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등수로 따지면 2등에 해당하는 놀라운 성적이었다.

“아빠는 별로 기쁘지 않으신가 봐요. 그냥 덤덤하게 축하한다고 그러신 게 다예요. 시상식에도 저 혼자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잔뜩 들 뜬 목소리로 전화했던 오주현이 나중에는 풀이 죽어서 전한 소식이었다. 그 양반 참 고집 세네. 도윤은 오광표의 완고함이 못마땅해서 혀를 찼다.

오주현은 그 주 주말을 이용해 일본에 가서 시상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도윤의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라도 함께 다녀오고 싶었지만 워낙 일이 많이 밀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갑자기 오광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따 오후에 역삼동 쪽으로 외근을 나갈 일이 있습니다. 일 끝나고 나서 인사동에 잠깐 들를까 하는데 혹시 시간이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커피나 한 잔 같이 하시지요.”

그날 오후,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에 도윤은 인사동의 한 커피숍에서 오광표와 마주앉았다. 오광표는 자리에 앉자마자 도윤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주현이 일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덕분에 아이가 좋은 성적을 얻었기에 감사를 드리고 싶어 만나자고 했습니다.”

도윤은 약간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감사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기쁘기는 하신 겁니까?”

오광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기뻐하는 걸 보니 저도 기분이 좋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게 주현이를 위해서 정말로 잘 하는 일인지는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아요.”

“복잡하게 생각하실 거 뭐 있습니까?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고 게다가 잘하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경제적인 형편도 나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적극적으로 밀어주시죠. 주현이는 좋은 화가가 될 재능을 가진 아이입니다.”

오광표가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고 미국 대학에서 입학 허가까지 받으면 더 이상 그림 공부하는 걸 반대하지 않기로 주현이와 약속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아빠로서 딸과 한 약속은 꼭 지킬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박사도 저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도윤은 입맛을 다셨다. 누가 대기업 임원 아니랄까봐 엄청 깐깐하시네.

“일정이 빡빡한 건 사실이지만 박은비 화백의 특별 전시회는 6월 중에 반드시 열릴 겁니다. 청파와 아리움이라는 한국 화랑계의 양대 산맥이 함께 추진하는 일이에요. 저를 비롯한 현소 화랑 직원들도 최선을 다해 매달리고 있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광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동안 도윤과 현소 화랑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다. 적어도 불법적인 일이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없었다. 믿을 만한 곳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알아보니까 현소 화랑이 생각보다 내실이 있는 곳이더군요. 이 박사님도 지금 상장을 준비 중인 베트남의 비에코에 투자를 하셨다고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갑자기 비에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도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자 오광표가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안심하십시오. 저도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비에코의 상장 신청은 조만간 받아들여질 겁니다. 양질의 원유가 펑펑 쏟아지는 유전의 개발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니까요. 비에코가 상장되면 이 박사님이 그곳의 대주주라는 사실도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명색이 대기업 간부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알게 된 것뿐입니다.”

도윤은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오광표는 그런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이더니 앞에 있던 커피 잔을 마저 비웠다.

“주현이하고 분당에서 외식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 전시회 잘 부탁드립니다. 그 일이 무사히 마무리 되면 저도 박사님한테 조그만 보답을 해드리죠.”

“보답이라니요? 새삼스럽게 무슨 보답을…….”

“비에코에 투자한 액수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의외로 그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 조그만 정보를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어머님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이후에 말이지요. 그럼 저는 이만.”

오광표는 그 말과 함께 커피숍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도윤은 얼떨떨했다. 조그만 정보? 그게 조그만 건지 큰 건지 어떻게 알아?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그러네.

도윤을 찾아온 사람은 오광표 말고도 또 있었다. 그를 만난 며칠 뒤, 도윤은 중국의 왕이푸 회장에게 사진 파일이 첨부된 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대학 연구소에 부탁해서 홍도관에 대한 연대 측정을 실시했는데, 그 검사 결과도 함께 들어 있었다. 메일을 보낸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왕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이거 진짜인가? 장난 아니지? 정말 이 물건이 한국에 있는 게 맞아?”

“맞습니다. 제 감정 결과로는 은나라 말기에 만들어진 진품이 확실해요.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상태도 완벽합니다.”

“이걸 아리스 옥션에서 경매에 붙이고 싶다고 했지? 진심인가?”

“그럼 그런 일을 가지고 제가 농담을 하겠습니까? 어떠세요? 괜찮을 것 같으세요?”

“괜찮을 것 같으냐고? 이게 정말 진품이라면…, 아니 자네가 감정을 했다니까 진품이 맞겠지. 아무튼 그걸 경매에 올리면 우리 회사는 단번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거야. 꼭 좀 부탁하네. 그걸 반드시 아리스 옥션에서 경매에 올릴 수 있도록 해주게.”

이미 그러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왕 회장은 다른데 물건을 보여주지 말라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불과 이틀 후, 그의 딸인 왕화가 몇몇의 감정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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