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26. 수확의 계절>
왕화와 동행한 감정가들은 서울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홍도관을 철저히 감정했다. 그들은 먼저 눈으로 항아리를 살피는 안목 감정을 거친 뒤, 밑바닥의 굽 부분에서 약간의 시료를 채취했다. 또한 항아리 주변에 새겨진 갑골문자를 사진으로 찍은 다음, 내용을 해석하는 작업도 거쳤다. 모든 감정을 끝낸 뒤, 왕화가 일행과 함께 도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채취한 시료를 북경으로 보내 열 발광 측정법으로 제작 연대를 측정할 거예요. 하지만 현재까지의 감정 결과로 볼 때 말씀하셨던 대로 은나라 시기의 토기가 맞는 거 같아요.”
그녀는 되도록 차분하게 감정 결과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함께 왔던 감정가들은 달랐다. 그들은 저다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의견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 임금 때 만들어진 토기죠. 나는 감정을 하다 하마터면 울 뻔 했소.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이 생생하게 기록된 유물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홍도관의 존재가 알려지면 학계가 발칵 뒤집힐 게 틀림없습니다.”
“그냥 토기가 아니에요. 점을 친 결과를 직접 기록했으니 황실에서 주도해서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거북점(卜)이 아니라 별 점이라니! 점사(占事)를 거북이 껍질이나 동물 뼈에 새긴 것은 많이 봤어도 그 내용을 토기로 구워 만든 건 극히 드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나라 시대의 토기들과 비교해 볼 때 당시에 제작된 토기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은나라 토기가 저렇게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왕화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단순한 감정가가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었다. 그들은 홍도관의 발견을 세기적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도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점사(占事)란 점을 쳤던 일, 혹은 그에 관한 기록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왕실 주도로 점을 쳐왔다. 그런 경험과 기록들이 긴 세월 동안 누적된 끝에 하나의 정형화된 형식으로 완성된 결과가 바로 주역(周易)이다.
은나라 시기에는 ‘복(卜)’, 즉 거북점이라고 해서 주로 민물 거북이의 배 부분 껍질로 점을 쳤다. 거북이 껍질에 몇 개의 구멍을 뚫은 뒤 불에 구우면 껍질이 갈라지면서 잔금이 생긴다. 미리 뚫은 구멍을 중심으로 그 금들의 모양을 해석한 결과가 점괘가 되는 것이다.
점을 치는 행위 자체가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기록되었다. 이때 무엇을 점쳐 물었으며, 그 결과가 실제로 어땠는지를 기록한 글자가 갑골문자다. 거북이 껍질(甲)이나 동물의 뼈(骨)에 새겨 넣은 문자라는 뜻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복점은 황제뿐만이 아니라 제후나 귀족들도 치는 점이 되었다. 그러나 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별 점을 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황제, 혹은 황제의 명을 받은 전문 관리뿐이었다. 홍도관의 겉에 새겨진 ‘불길하게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다’라는 문구는 별 점을 쳤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이 토기가 황실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북경에서 시료를 검사한 결과도 은나라 토기가 맞는 걸로 나오면 곧바로 그 사실을 공표하고 홍도관에 대한 경매 계획을 세울 거예요. 그렇다고 홍도관 하나만을 위해서 경매를 열 수는 없으니까 실제 경매는 빨라야 6월이나 되어야 가능할 거예요.”
왕화의 얘기에 도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시기적으로 적당할 것 같네요. 7월 전에만 경매가 열리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시작가를 얼마로 하느냐는 건데, 이 박사 생각은 어때요?”
왕화의 질문에 도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냥 솔직히 말했다.
“사실 저도 얼른 감이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은 처음 다뤄보거든요. 10억 위안 정도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10억 위안이면 한화로 1500억이 넘는다. 천상섭에게는 1000억 정도로 낮춰 불렀지만 실제로는 그게 도윤 자신이 생각한 진짜 감정가였다. 하지만 왕화는 한 술 더 떴다.
“그 정도면 시작가로는 적당할 거 같아요. 하지만 낙찰가는 틀림없이 그보다 훨씬 높을 거예요. 이 토기가 진품이라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중국 유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문서 기록이 될 테니까요. 이 박사는 중국이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되찾아주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 말과 함께 왕화는 한국식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녀의 뒤에 있던 감정가들도 같은 예를 취했다. 도윤도 미소를 지으며 마주 허리를 굽혔다.
* * *
왕화가 돌아간 뒤 도윤은 다시 정신없이 전시회 준비와 도록 제작에 매달렸다. 말이 쉽지 한 화가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전작 도록을 만드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미 발굴 작품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대상이 되는 모든 작품을 일일이 감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소장자가 작품 공개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한 화가의 전작 도록을 만드는 일은 수많은 인원이 달려들어도 몇 년 이상이 소모되는 엄청난 작업이다. 그걸 단 몇 달 사이에 완료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광표가 처음 도윤의 제안을 들었을 때 코웃음을 쳤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도윤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제안을 했던 건 아니다.
우선 박은비 화백은 작품 수가 많은 화가가 아니었다. 가령 이미 전작 도록 작업이 완료된 박수근의 경우 판화와 크로키, 잡지에 기고한 삽화까지 합하면 작품 수가 무려 천 점을 넘는다. 마흔 한 살에 사망한 이중섭 역시 540점 남짓한 작품을 남겼다. 그에 반해 박은비 화백의 그림으로 알려진 작품 수는 고작 이백 점 남짓이다.
그녀는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수채화나 크로키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오직 유화만, 그것도 5~60호 이상의 비교적 큰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였기 때문에 소품을 발굴해야 하는 수고를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데다 그나마 위작 사건이 터졌던 1997년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지인들에게 선물한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화랑이나 경매를 통해 거래되었다는 사실도 일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었다. 작품의 소재를 파악하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일에는 청파와 아리움이라는 두 대형 갤러리의 수많은 직원들이 적극적이고 헌신적으로 나서주었다.
“생각보다 소장자들이 작품 대여를 쉽게 허락하네요. 예상하셨던 일이에요?”
5월 중순쯤 되었을 때, 오랜만에 도윤과 함께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왔던 최서라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개인 소장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작품을 외부에 공개하기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도윤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강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강변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차를 마시자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결 가시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에 국내에서 제일 큰 경매 회사였던 한성 옥션이 위작 사건으로 인해 문을 닫았잖아. 그래서 다들 불안해진 거야. 혹시 내가 가진 작품도 위작이 아닐까 하고. 그런 불안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청파와 아리움이라는 양대 갤러리가 나서서 무료로 감정을 해주겠다고 하니까 잘 됐다 싶은 거지. 게다가 대여료도 보통 때보다 많이 주기로 했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이도윤 박사가 직접 감정에 나선다고도 하고요. 맞죠?”
최서라가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윤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애매하게 웃었다.
솔직히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다는 것도 원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본인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낯부끄러웠지만 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정가였다. 국내 최대의 이슈였던 한성 옥션의 몰락 사건과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던 중국의 건릉 발굴에 모두 그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줄지는 몰랐어.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힘들 거라고 각오했었거든.”
그의 말에 최서라가 고개를 저었다.
“재벌가에서도 어떡하든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학벌에 대한 선망 의식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도윤 씨는 하버드 출신의 박사에다 트루쓰 앤 밸류의 우승자이기도 하잖아요. 덕분에 일반인들도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많죠. 요즘 같은 세상에서 대중적인 지명도는 큰 힘이 돼요.”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인정하기에는 조금 낯 뜨거운 칭찬이었다. 도윤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전시회가 끝나면 함께 미국으로 갈 거야?”
“당연하죠. 이번 전시회 때문에 저도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일에 매달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시회가 마무리 되면 휴가를 낼 거예요. 제가 함께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나야 고맙지.”
아무렴. 고맙고말고.
며칠 전에 뜻밖에도 미국에 있는 가드너 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다. 매년 7월 첫 주에 개관 기념 파티를 여는데, 혹시 와 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만약 초대에 응할 경우 숙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두 장의 왕복 비행기 티켓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정중하게 초대를 한 이유는 당연히 잃어버렸던 그림을 되찾아 준 일 때문이었다.
에스코바르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림들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CIA 비밀 정보국의 타일러 보이드 국장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반환 작업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그림을 되찾은 개인과 미술관들은 그 일이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비밀 작전이 거둔 성과로만 알고 있었다.
딱 한 군데 예외가 바로 가드너 미술관이었다. 그곳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의 그림을 비롯한 도난 작품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무려 천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었다.
가드너 미술관의 관장은 그림을 되찾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에게 반드시 그 돈을 주어야 하겠다고 우겼다. 그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진 보이드 국장이 도윤의 허락을 얻어 그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관장은 현재까지 그 약속을 잘 지켜왔다. 그러다 이번에 도윤을 파티에 초대한 것이다.
“미국에 가게 되면 가드너 미술관이 있는 보스턴에 가기 전에 먼저 뉴욕에 들르게 될 거야. 그래서 일정이 며칠 더 지체될 텐데 그래도 되겠어?”
도윤의 물음에 최서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뉴욕에서는 오윤수 씨하고 장은서 씨를 만나려는 거죠?”
“응. 윤수가 미국에 간 지도 벌써 만으로 2년이 되었거든. 은서도 발전 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것 같고. 슬슬 미국에서 데뷔 전시회를 생각해 볼 때가 됐어.”
오윤수의 경우에는 이미 현소 화랑을 통해 국내 데뷔를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공식 전시회를 연 적이 없었다. 장은서는 물론 말 그대로 첫 전시회를 열게 되는 셈이었다.
전시회를 열기 위해서는 우선 두 사람의 그림을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그림이 전시회를 열 정도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그동안 계속 생각해 왔던 재단 설립도 본격적으로 착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그 전에 먼저 기금을 모아야 했다.
* * *
5월 한 달은 아마 도윤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바쁘게 보낸 기간이었을 거다.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에도 이처럼 밥 먹을 시간마저 아까울 정도로 쫓기지 않았었다.
5월 첫 주가 되었을 때, 왕화가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홍도관을 북경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유물의 포장과 운송을 전문적으로 담당해온 업체의 사람들과 함께 직접 한국으로 와서 모든 과정을 일일이 감독하고 지시했다.
“열 발광 분석법으로 절대 연대를 측정한 결과, 홍도관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에서 3300년 사이에 제작된 물건임이 밝혀졌어요. 겉에 새겨진 글귀의 내용으로 볼 때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 임금 때 만들어진 게 확실해요.”
그녀는 도윤의 부탁대로 늦어도 6월 말에는 홍도관을 중심으로 한 경매를 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언론에 홍도관에 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소개되면서 나라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홍도관으로 인해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 서 있던 사건이 완전히 공인된 역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윤의 이름은 어떤 면에서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해졌다. 아리스 온라인이 홍도관의 발견자로 그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중국의 일반인들도 이름을 아는 한국의 감정가가 되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아닌 인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엄청난 양의 작업 때문에 나날이 지쳐가던 도윤에게 다시 한 번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예상보다 다소 이른 5월 마지막 주, 드디어 비스코 주식이 상장 허가를 받은 것이다. 그로 인해 이번에는 도윤의 전담 변호사인 노영태 변호사가 바빠졌다.
정식으로 상장 허가가 떨어지기 직전, 미리 언질을 받은 비에코의 고정혁 사장은 약속대로 지분 분할 작업을 완료했다. 그때까지 도윤의 투자금은 비에코의 부채로 남아 있었는데, 미리 작성했던 계약서에 따라 그것을 주식으로 상환한 것이다.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 도윤은 비에코 주식의 29퍼센트를 넘겨받아 고정혁에 이은 2대 주주가 되었다. 본래는 30퍼센트의 지분을 갖기로 했었지만, 주식 전환 과정에서 1퍼센트를 안석훈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안석훈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윤이 넘겨받은 주식은 액면가로만 따졌을 때 700억을 약간 상회하는 양이었다. 석훈은 25억 가량의 주식을 받았다. 그리고 비에코가 정식으로 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가는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당분간 주식을 팔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정혁과 권두철의 설득에 의해 세 사람 모두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보유 주식 가운데 일부를 시장에 풀기로 했다. 일단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이 있어야 시세의 추이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비에코의 주가가 상장 한 달만에 무려 10배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풀자. 지금까지 시장에 풀린 게 전체 지분의 5퍼센트 정도니까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원활하게 거래가 될 만한 양일 거야.”
그때쯤 고정혁과 권두철, 그리고 도윤은 보유 주식의 방출을 중지했다. 그 사이에 도윤의 지분은 1퍼센트가 준 28퍼센트가 되었지만 그 대신 통장 잔고가 200억 이상 늘어났다. 비에코 주식은 처음부터 그의 이름으로 보유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해외 투자 회사에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그의 돈이라는 뜻이었다.
숨 가쁠 정도의 강행군으로 일관되었던 전시회 준비 작업은 더위가 슬슬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던 6월 둘째 주가 되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박은비 화백의 특별 전시회가 문을 연 것이다. 전시회 장소는 청파 갤러리로 결정되었다.
전시회가 처음 시작되던 날, 개막 테이프를 끊은 사람들 중에는 박 화백의 아들과 손녀인 오광표, 오주현 부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주현은 전시회가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할머니가 그린 그림들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광표는 선뜻 전시실 안으로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도윤의 손을 꼭 붙잡았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평생의 한이 풀리는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의 한이 풀린다는 그의 말이 도윤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면 이번 전시회로 오광표의 한이 다 풀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 화백이 돌아가신 지도 어느 새 이십 년이 흘렀다. 사랑과 미움은 어느 쪽이나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이번 특별전으로 인해 오광표는 그동안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마음의 짐을 크게 덜어낸 것 같았다.
사실 이번 일을 기획하면서 진짜로 어려웠던 부분은 전시회 자체보다 오히려 도록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 일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청파 갤러리와 아리움 갤러리의 직원은 물론이고, 미술계의 여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무리 도윤이라고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미술계 내에서 이 박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어. 옆에서 지켜본 나로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으니까. 다시 봤어, 이 박사.”
어느 새 다가온 최수아 관장의 덕담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을 통해 도윤의 추진력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젊은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과감한 추진력까지 겸비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도윤을 보는 그의 시각에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신뢰감을 가져다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