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장은서는 각성하고 오윤수는 깊어졌다. 그것이 두 사람의 그림을 본 도윤의 소감이었다.
은서의 그림은 한 마디로 말해 사람의 솜씨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색과 형태의 조작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보니 원하기만 하면 사진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극한의 묘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정밀 묘사에만 치우쳐서 붓을 놀린 건 아니었다. 도윤은 그녀의 그림을 보고 꿈의 현실화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면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유는 현실의 제약을 받으며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그런데 은서의 그림은 꿈에서 누렸던 그 무의식의 자유를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재현했다. 도윤은 그녀의 그림을 보는 내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능력이 더 발전한 거니?”
그녀의 작품을 둘러본 도윤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능력이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한 순간부터 전보다 훨씬 능숙하게 능력을 쓰는 게 가능해졌어요.”
“다행이네. 힘들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줄곧 남의 그림만 모방하며 살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저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까 오히려 혼란스럽더라고요. 거의 반 년 이상 뭘 그려야할지 몰라서 방황했어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모든 화가들은 남의 작품을 흉내 내면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장은서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완벽한 모방이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독이 됐다. 더구나 남의 그림을 위조해서 팔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예 자기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고 지냈다.
한창 자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해야 할 시기를 오로지 남의 그림만 베끼면서 살다 보니 나중에는 화가가 아니라 사진가가 된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천부적인 능력이 오히려 스스로를 더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니?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거야?”
도윤의 물음에 장은서가 한쪽에 멀리 떨어져 있던 오윤수를 힐끗 쳐다봤다.
“윤수 오빠가 덕분이에요. 아마 오빠가 옆에 없었으면 지금까지도 뭘 어떻게 그려야할지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을 거예요.”
“윤수 덕분이라고?"
“윤수 오빠 그림은 저하고는 정반대잖아요. 오히려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아련한 꿈처럼 표현한다고나 할까? 여기 와서 가장 많이 본 게 윤수 오빠 그림인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나는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꿈을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게 가능하겠구나. 그때부터 그림이 확 풀리더라고요.”
순간 도윤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의 말처럼 오윤수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광목천에 먹물을 들였다가 다시 빨아서 말리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세계를 개척했다. 마치 허공에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듯한 그의 그림은 도윤이 처음 봤을 때부터 구체적인 형상을 넘어선 저 너머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었는데, 두 사람을 같은 건물에서 작업하게 한 게 의외의 효과를 낳았네. 그냥 두 사람이 서로 적절한 자극을 주고받기를 바랐던 건데.’
물론 오윤수 역시 일방적으로 장은서에게 영향을 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본 그의 그림 역시 전과는 뭔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동일한 표현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그림 속에 묘사된 구름들은 전보다 더 복잡하게, 그리고 때로는 훨씬 더 단순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의 그림이 표현의 결과를 우연에 의지하는 측면이 강했다면, 지금은 훨씬 더 자유자재로 자신의 뜻대로 캔버스를 지배하고 있어. 그림을 통해 드러나고 전달되는 사고의 깊이도 전보다 더 깊어진 게 분명하고. 윤수도 화가로서 한 단계 더 성장했구나.’
그것은 반갑고 즐거운 발견이었다. 도윤은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 이들을 돕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보다 열 배의 돈을 더 썼다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뼉을 짝 하고 쳐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다들 수고했다. 오늘은 내가 한 턱 낼 테니 다들 허리띠 풀러놓고 마음껏 먹도록 해. 식당 재료가 다 동이 날 때까지 달려보자.”
“어제도 한 턱 내셨는데 또 내신다고요?”
장은서의 얘기에 도윤이 피식 웃었다.
“어제 그거야 어디 반 턱이나 되나? 오늘이야 말로 진짜 한 턱이 뭔지 보여주마.”
그러자 오윤수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물었다.
“그 한 턱에 술도 포함됩니까?”
“당연하지. 나한테 반말을 지껄일 정도로 망가기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마셔도 상관없어.”
“에이, 적당히 마시라는 얘기네.”
오윤수의 중얼거리는 바람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 * *
도윤은 올해가 가기 전에 두 사람의 합동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는 아직 미정이지만 그건 두 사람과 협의해서 천천히 정하면 된다. 더 중요한 건 전시회 주제였다.
그는 사흘 동안 뉴욕에 머물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오윤수와 장은서의 작업실에서 보냈다. 완성된 작품들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피고 그 가운데서 전시회에 내보낼 것들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그 동안 꽤 활발하게 작업을 했고, 완성된 작품들의 수준도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모조리 전시할 수는 없었다.
“먼저 전시회의 주제를 잡아야 돼. 주제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만 일단 그걸 잡아야 어떤 작품들을 전시할 것인지 기준을 잡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전시장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전시 방법 역시 거기에 따라 정해질 테고. 만약 주제에 맞는 작품 수가 부족하면 전시회가 열리기 전까지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서 부족한 수를 채워야 해. 그건 각오하고 있지?”
막상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하자 갑자기 고려해야 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한국이라면 현소 화랑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이곳에서는 모두 도윤이 직접 결정하고 뛰어다니면서 처리해야 했다. 물론 아직은 시간 여유가 제법 있었지만 적어도 전시회 개최 시기와 장소만큼은 미리 결정해야 했다.
결국 최서라까지 가세해서 네 사람이 치열하게 논의한 끝에 전시회 주제는 ‘꿈과 현실’로 잡았다. 도윤이 생각한 두 사람의 작품 특성을 전시회 주제로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주제 자체가 오윤수와 장은서의 예술 세계를 폭넓게 포괄하다 보니 전시할 작품을 고르는 일 자체는 비교적 쉬워졌다. 이미 완성한 작품들이 대부분이 그 주제에 부합했던 것이다.
“나는 일단 보스턴에 가야 해. 거기서 파티에 참석한 다음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올 거야. 그 동안 너희들끼리 잘 얘기해 보고 나한테 건의할 사항이 있으면 얘기해 줘.”
도윤은 두 사람에게 이제부터 바짝 긴장해야 한다는 점을 신신당부하고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최서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전시회 장소를 구하는 게 큰 문제네요. 시간이 촉박해서 적당한 전시장을 고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원래 전시장을 빌리려면 보통 1년 전에, 늦어도 반 년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이 벌써 6월말이니 연말에 전시회를 연다고 해도 시간이 빡빡했다. 설사 운 좋게 적당한 전시장을 발견한다고 해도 막상 대관을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좋은 전시장일수록 자신들의 품격에 맞는 전시회가 아니면 대관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약 오윤수와 장은서가 미국에서 제법 이름 있는 중견 화가였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국에서 완벽한 무명 화가였고, 그나마도 외국인이었다. 그렇잖아도 이미 몇 군데 전시장에 전화를 걸었다가 완곡하게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정 안 되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서라도 장소를 빌려야지. 미국 내에 있는 지인들에게도 여기저기 부탁해 보고. 설마 이 넓은 땅에 두 사람 전시회를 열 장소가 없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정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도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서라가 조금 더 실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막상 그림을 전시했는데 아무도 보러 오지 않으면 차라리 전시회를 열지 않는 게 나아요. 자칫하면 성급하게 전시회를 열었다가 두 사람에게 상처만 남길 수도 있으니까요. 홍보 계획을 잘 세워야 할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소더비의 까미유와 메트로폴리탄의 하이든 큐레이터 부장에게 부탁을 해 볼 생각이었다. 명망 있는 애호가들을 포함해서 미국 내에 지인이 많은 사람들이니 그들이 주변에 두루 추천을 하면 전시장이 썰렁해지는 사태는 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과연 선뜻 한국의 무명화가를 홍보해 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뉴욕에 돌아오면 까미유 씨와 하이든 부장을 작업실에 한 번 초대해야겠어. 누구보다 그림 보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들이니 최소한 윤수하고 은서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뛰어난 신인들이라는 걸 인정해 줄 거야.”
하지만 좋은 화가라는 걸 인정하는 것과 그들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두 사람은 도윤에게 적지 않은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은서와 윤수 역시 좋은 화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좋은 그림이 늘 사업적인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좀 더 세밀한 홍보 계획이 필요했다.
“미국에는 내가 잘 아는 기자들이 없어. 그게 문제네.”
일단은 트루쓰 앤 밸류를 주관했던 INB 방송국에 부탁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공중파 방송국 가운데 한 곳이니, 만약 문화계 동향 같은 곳에서 두 사람의 전시회 개최를 보도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홍보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도윤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미리 연락을 해 둔 덕분에 보스턴 공항에는 가드너 미술관에서 보낸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게릭 올슨. 도윤과 함께 트루쓰 앤 밸류에 지명 참가자로 출연했던 남자. 장신의 흑인 감정가이자 가드너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 박사. 반갑다. 정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올슨은 몇 년 전에 헤어졌을 때와는 달리 훨씬 밝아진 모습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트루스 앤 밸류 3회전을 녹화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가드너 미술관 측에서 꾸몄던 꼼수로 인해 적지 않게 마음고생을 했었다. 결국 자진 사퇴를 표명했던 그는 염려와는 달리 여전히 가드너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사하세요. 제 여자 친구 최서라에요. 그녀도 금속 공예 부분의 감정가입니다.”
도윤은 올슨에게 당당하게 최서라를 소개했다. 올슨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이 박사, 당신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지금까지 본 여자들 가운데 우리 마누라를 제외하고는 가장 미인입니다. 반갑습니다, 최서라 씨.”
이 양반이 못 보는 사이에 넉살이 많이 늘었네. 그리고 당신 마누라는 왜 빼. 이왕이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 줄 것이지.
도윤과 최서라는 올슨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거기서 짐을 푼 두 사람은 다시 그의 차를 다고 가드너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 관장이 두 사람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 안에서 올슨이 조금 껄끄러운 얘기를 전했다.
“우리 미술관에서 몇 개월 전에 새로운 수석 감정사를 채용했습니다. 에밀 파스쿠레라는 프랑스 사람인데 자존심이 아주 강해요. 가드너 관장과는 오래 전부터 집안끼리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관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다고요? 혹시 올슨 씨하고 무슨 갈등이라도 있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올슨이 난처한 웃음을 머금었다.
“글쎄요. 저하고도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다고 할 수 있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이 박사를 벼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뭘 벼른다는 거예요?”
“간단히 말하면 이 박사의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트루쓰 앤 밸류 첫 시즌에 출연했던 모든 출연자들을 우습게보고 있어요. 심지어 방송에서 나왔던 감정 모습들이 실제로는 모두 방송국 측과 각본을 짜고 연출한 가짜라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방송에는 올슨 씨도 출연했잖아요.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던가요?”
“그 사람이 제 말을 믿었더라면 관계가 불편할 리가 없겠죠. 아무튼 이따 미술관에 가게 되면 그 사람과도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력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관장님도 많이 양보하는 편이거든요. 혹시 그 사람과 부딪치게 되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라는 뜻에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력은 좋은데 인간성은 별로인 사람인가 보군.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널렸다. 도윤은 올슨의 충고를 받아들여 되도록 에밀 파스쿠레라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 어떻게 하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드너 미술관의 관장 조나단 가드너입니다.”
조나단 가드너는 백발의 노신사였다. 옷감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정장을 걸친 그는 전형적인 미국 동부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억양 역시 약간은 영국의 그것과 닮은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에서 온 이도윤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여자 친구인 최서라 박사입니다. 런던의 소더비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금속 공예 전문 감정사이기도 합니다.”
도윤은 정중하게 자신과 최서라를 소개했다. 올슨은 도윤을 관장에게 안내한 뒤 곧바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손님들을 위한 접객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잠시 후, 비서가 들어와 세 사람 앞에는 각자의 취향대로 커피와 홍차를 놓고 나갔다. 그러자 가드너 관장이 내일 있을 파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손님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내일 개관 기념 파티의 주인공은 이 박사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초대자 명단에 없던 몇 분을 특별히 더 모시기로 했죠.”
“저를 위한 특별한 초대 손님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도윤의 물음에 가드너 관장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가 바로 트루쓰 앤 밸류 아닙니까? 그래서 내일 저녁에 열릴 파티에 당시 심사를 맡았던 세 분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의 에릭 타일러 교수도 오실 겁니다.”
“아, 그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마침 모두 한 번씩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던 분들인데, 가드너 미술관 측에서 초대를 했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버드의 에릭 타일러 교수는 바로 도윤의 박사 학위 지도교수였다. 트루쓰 앤 밸류의 심사위원을 맡았던 소더비의 까미유, 시카고 예술 대학의 브렌트 교수,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의 큐레이터 부장을 맡고 있는 하이든 부장과 함께 오윤수를 위해 추천장을 써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었다.
도윤은 원래 뉴욕에서 까미유와 하이든 부장을 만나 오주현의 그림을 보여주고 추천서를 받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두루 연락을 한 결과 추천장을 써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모두 가드너 미술관의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보스턴에서 네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 오주현의 그림을 보여주기로 약속을 다시 잡았다.
한동안 내일 있을 파티와 최근의 미술계 동향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가드너 관장이 문득 최서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재빨리 눈치 챈 도윤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먼저 말을 꺼냈다.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최 박사도 알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가드너 관장이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표시했다.
“CIA의 보이드 국장으로부터 어떻게 그림을 되찾게 됐는지 대충 들었습니다. 그 양반이 중요한 부분은 다 빼고 얘기를 하는 바람에 약간 김이 빠지기는 했지만, 들은 것만으로도 무슨 첩보 영화를 보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선대 때부터 이어져온 오랜 숙원이 풀렸습니다. 이 박사는 우리 미술관의 은인입니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으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한 거지요. 더구나 덕분에 큰 상금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대가는 이미 넘치게 받은 셈입니다.”
도윤이 겸손하게 자신의 공을 낮추는 순간,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삼십대 후반의 깡마른 백인 남자 한 명이 문을 열었다. 관장이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이었다.
“에밀입니다, 관장님.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순간 도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게릭 올슨이 경고했던 인물이 제 발로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